
[다이스가] 우리는 서로에게 처음이었다.
W. GGyutizel
0.
너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나도 너에 관한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먼저 방 한 칸이었다. 그래 봤자 이 넓디넓은 곳의 고작 방 한 칸이라 신경 쓰일 정도가 아니었다.
두 번째는 이름이었다. 너에게 직접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그때는 몰랐지만 문장 맨 앞에 네 이름이 들어감으로써 시시하던 말이 어떤 이야기보다 재미있어졌다.
세 번째는 -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거리를 좁히고, 마음을 맞추면서 가까워졌고 그것이 너에게는 호의를 넘어선 더 큰 감정으로 변해갔다. 그렇게 우리는…
1.
해가 뜨면 일어나고, 달이 뜨면 잠드는 일상이었다.
새 생명이 고개를 내미는 봄과 태양이 타오르는 여름을 지나 손을 뻗어도 닿지 못할 정도로 높은 하늘의 가을을 거쳐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겨울을 보내는 것이 몇백, 몇천 번째인지 오늘이 몇월 며칠의 몇 시인지 확인하는 것도 지겹고 귀찮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여름이 다가오는지 낮이 더웠기 때문에 이렇게 이른 아침의 서늘한 공기가 더욱 반가웠다.
아침의 습기를 머금어 마루는 차갑고 조금 습했지만 일어나자마자 걸은 탓에 건조한 맨발과 나무 바닥이 스치는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잠들기 전에 오비를 슬쩍 풀어둔 덕에 가슴께가 살짝 벌어져 손을 넣기 딱 좋았다. 옷 속에 손을 집어넣고 명치 부근을 긁으며 아직 다 떨쳐내지 못한 졸음 때문에 가는 하품을 내뱉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하품은 점점 길어지고 커져서 입이 찢어질 것처럼 벌어졌다. 긴 하품이 끝나고 입을 닫으려 할 때 그의 시야에 걸린 것이 하나 있었다.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나뭇잎과 시시때때로 자라나는 화초, 그리고 가끔 찾아오는 자유로운 동물들이 전부인 마당에 누워 잠든 어린 짐승 한 마리, 말로만 들어왔지 처음 보는 어린 텐구였다.
2.
시기가 초여름이다 보니 땅은 봄의 여린 새싹들로 가득한 들판이 아니었다. 그러나 잡초와 억센 풀들이 중구난방으로 자라지 않았다 해도 아침 이슬로 촉촉이 젖은 땅은 그다지 좋은 잠자리가 아니었다. 아직 아침이라 햇볕은 강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 해가 뜨고 오후가 되면 땅이 지글지글 끓을 것이다. 게다가 그날 한 점 만들어지지 않는 곳이니 더욱이 말이다. 심지어 저렇게 다친 생물에게는.
자신 이외의 살아있는 생물을 본 것이 그저 오랜만이라는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스가와라는 한 손은 여전히 옷 속에 집어넣은 채 지켜보았다. 텐구는 좋은 의미를 가진 생물이 아니었다. 지나가다 본 것만으로도 불길하다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이 산에서 가장 신성한 곳에 발을 들여놓았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소멸시키겠지.”
그러나 우습게도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 어린것은 잠든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해 한계까지 버티다 이곳에 쓰러졌다는 표현이 맞다 싶을 정도로 처참했다. 그래서인지 쉽게 손을 쓸 수 없었다. 이게 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거다. 예전 같았으면 일말의 고민도 없이 없애 버렸을 거라고 중얼거리며 이 어린 것을 안아 들었다. 이 산에서 가장 영험한 터인데 그런 곳에 누가 죽게 둘 수는 없어서 그런 거라고 아무도 듣지 않는 핑계를 대며 안으로 들어갔다. 다 나으면 내쫓을 거다. 그래, 그러면 되지.
집으로 들어간 스가와라는 품의 아이를 눕힐 방에 들어와서야 순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방에는 이불은커녕 그 흔한 방석조차 없는 빈방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생각해낸 것이었다.
*
제 것을 제외한 이불 전부를 어딘가에 치워둔 터라 찾은 데 시간을 보내고 케케묵은 먼지들을 털어내는데 또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서야 잘 덮지도 않는 제 이불을 가져다주면 되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바보 같다고 자책하는 것은 혼자만의 비밀로 숨겨두고 차갑고 불편한 다다미 위에 불편하게 잠들어 있을 텐구를 위해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이불 속에서 곤히 잠든 어린 텐구를 지켜보는 스가와라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다. 거부감이 든다기보다는 기나긴 시간 동안 혼자 지내오던 이 집에 살아있는 온기라고는 저를 제외하고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 방에서 숨을 쉬고, 잠들어 있는 모습이 익숙하지 않아 생기는 불편함이었다.
어린애들은 원래 이렇게 자는 건가. 어린 텐구는 자신의 몸을 최대한 웅크렸는데 안 그래도 몸집이 작은 아이가 이렇게 웅크리고 있으니 마치 작은 공 또는 털 뭉치 같았다. 성인인 데다가 인간의 존재가 아닌 스가와라에게 있어 이 방의 공기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요괴이나 어린 아이이고 다치기까지 한 텐구에게는 온기가 필요했다.
허공에 손을 휘젓자 공기의 흐름이 서서히 바뀌었다. 서늘하기 짝이 없던 방은 서서히 데워지고 오랫동안 한 곳에서 맴돌던 썩은 공기는 저 멀리 물러나고 맑고 신선한 공기로 바뀌었다. 웅크린 채 잠든 어린 짐승은 편안하게 누워 고른 숨소리를 냈고, 스가와라는 느릿하고 가늘게 들리는 그의 호흡을 들으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3.
나뭇잎 하나가 바람을 타고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왔다. 나뭇잎 끝을 쥐고 빙글빙글 돌리기도 하고 입술을 좁게 만들어 후후 불기도 하면서 이 무료한 오후를 재미없는 장난으로 보내고 있었다. 나뭇잎의 흔들리는 방향이 달라지고, 옆방의 안정적이던 공기가 흐트러졌다.
읏차, 무릎을 짚고 일어나 조용히 옆방의 문을 열려다 잠시 멈칫하고 문틀을 두드렸다. 반쯤 열린 문으로 이미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 저를 보고 있는 텐구와 눈이 마주쳤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옆에 앉아 짐승을 살폈다. 어린아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별을 가득 뿌려놓은 밤하늘 한 조각을 가져다 넣은 것처럼 까만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그 안에는 호숫가를 거닐다 우연히 본 몇백 년 전의 자신과 똑같은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어린 텐구는 그저 스가와라를 빤히 쳐다볼 뿐 그렇다 아니라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제 좀 괜찮냔 말이다.”
작은 짐승은 건방지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 방에는 버르장머리 없는 짐승을 눕힌 이부자리가 전부이지만 낯선 곳에서 눈을 뜬 아이를 위해 다정히 말했다.
“여긴 내 집이다. 마당에 쓰러져 있어서 여기로 옮긴 거고.”
“…….”
“이름이 뭐냐?”
“…….”
“난 스가와라. 일단은 이 산의 신이야. 내가 여기서 몇백 아니, 몇천 년을 살았지만 텐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디서 온 거야?”
“…….”
서서히 화가 나려던 찰나, 고개만 끄덕이고 흔드는 것이 무언가 이상했다. 입술 한 번을 달싹이지 않는 것에 그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혹시 말을 할 줄 몰라?”
끄덕.
이거-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
누군가에게 있어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 일일 줄 몰랐다. 더군다나 하나부터 열까지 아주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시작된 가르침이었기에 스가와라는 어느 것부터 가르쳐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었다. 본인의 답답함 해소와 간단하게라도 의사소통을 위해 우선 예, 아니오부터 가르쳤다. 하지만 이후 더 급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름.
이 어린 것을 부르는 이름이 없었다.
4.
참 빨리도 알아차렸다. 생각해보면 이제까지 이 아이를 부른 것은 ‘어이.’, ‘야.’, ‘꼬마야.’, ‘너.’와 같은 대명사가 전부였기에 스가와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다이치(大地). 이 넓은 산 가장 좋은 터에 자리한 이 집 마당에 쓰러져 있는 것을 주웠기에 다이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너무 성의 없이 정한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다행스럽게도 텐구는 좋아했기에 스가와라 또한 만족했다. ‘좋다.’라는 말로 대답한 것은 아니지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다이치. 그냥 이름을 중얼거렸을 뿐인데도 이렇게 웃음이 나는 것은 왜일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세월을 보낸 늙은이가 방정맞게 헤실거리며 웃는 게 산신이라는 체통에 맞지 않았지만 뭐 어떤가.
다이치. 누가 지었는지 참 좋은 이름이다.
5.
이름도 없고, 부모도 어디 있는지 모르며, 어디에서 왔는지조차도 모르는 어린 요괴를 거둔 지 몇 주하고도 며칠이 지났다. 처음 이 아이를 데려와 눕혔던 방은 아예 그의 것으로 내주었고, 상처를 손수 치료해주고 혼자 밥을 떠먹을 수 있을 때까지 옆에서 챙겨주었으며, 없던 이름마저 붙여 불러주니 스가와라가 어딜 가던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꼬리가 되었다. 스가와라는 그것이 싫지 않았고 괜히 왼쪽으로 가려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이 방으로 가려다 저 방으로 향하는 장난도 치며 순진한 아이를 놀려먹었다.
다이치는 제 이름은 곧잘 외웠다. 아마 발음이 쉬웠으리라. 입을 크게 벌렸다가 양옆으로 쭉 늘리면 되는 발음이라 금방 익혔지만, 그에 반해 글자 수도 많고 입술과 혀를 이리저리 움직여야 하는 스가와라의 이름은 힘든지 계속해서 틀렸다.
“스.”
“수…”
“가.”
“가.”
“와.”
“와아-”
“라.”
“라!”
“스가.”
“스가아-”
“와라.”
“오, 오아- 으아라!”
이렇게 얼굴 근육을 크고 활동적으로 움직인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지만 몇 번 움직인 것 같지 않은데 벌써 뻐근했다.
‘스가’까지는 편하게 발음되면서 ‘와라’는 힘겨운지 몇 번이고 틀리는 탓에 스가는 그냥 편하게 스가라고 부르게 할까, 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애칭을 이 어린아이에게, 그것도 요괴에게 허락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저 이웃 산의 산신과 수신부터 시작해서 하늘의 옥황상제까지 놀라 뒤로 넘어지면서도 반대하겠지만 정작 본인은 대수롭지 않았다.
“힘들면 그냥 스가라고 불러도 괜찮다.”
“아니야.”
말할 수 있는 언어가 한정적이고, 문장을 완벽히 할 수 없어 ‘아니다.’라는 말로 거절했지만 이 정도면 훌륭한 대답이었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스가와라는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조급해할 것 없어. 천천히 하면 돼.”
“아니야.”
하지만 본인은 아니었다. 무엇이 그렇게 조급한지 모르겠지만 욕심이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소매를 붙잡고 매달리는 다이치의 머리를 쓰다듬던 스가와라는 그를 제 다리 위에 앉히고 작은 고사리 같은 손을 잡았다.
예전에, 아주 먼 옛 기억 속, 누군가가 가르쳤던 방법이 생각났다. 다이치의 작은 주먹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집어넣어 쭉 펼친 뒤, 그중 하나를 잡아 제 입에 넣었다. 따뜻한 입속에 들어간 손가락은 물컹한 혀와 축축한 타액이 감쌌다. 이번에는 스가와라 쪽에서 손가락을 내밀었다. 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다이치는 자연스럽게 입을 벌렸고, 제 입보다 큰 스가와라의 손가락을 입에 넣고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입 모양은 눈으로 보고 금방 따라 할 수 있었지만, 입안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 혀의 움직임과 위치를 손가락을 통해 직접 알려주는 것이었다.
“천천히 해봐.”
그의 이름이 한 음절씩 발음될 때마다 다이치는 손끝의 감각에 모든 신경이 쏠리는 기분이었다. ‘스’라고 발음될 때 그의 혀는 뒤로 물러나 손가락을 뒤에서 앞으로 훑었고, ‘가’와 ‘와’를 발음할 때는 혀가 아래로 내려가 손가락 아래를 간질였고, ‘라’를 발음할 때는 마지막 음절이라 그런지 위에서 아래로 튕기다가도 손가락 전체를 감쌌다.
어린아이의 손가락을 넣은 스가와라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다이치는 달랐다. 어른의 손가락을 입에 넣으니 발음은커녕 혀를 움직이는 것조차도 힘들어 막힌 소리를 내는 게 고작이었다. 스가와라는 제 손가락을 빼고 입 주변에 흐르는 침을 옷소매로 닦아 주었다. 혹시나 옷의 거친 면에 피부가 상하지 않을까 톡톡 두드리듯이 닦아주다가도 안 되겠는지 엄지로 문질렀다. 다이치의 입술 주변이 막 봉오리를 맺은 진달래처럼 연한 분홍빛으로 변했을 때 스가와라는 앗차, 싶어 얼른 손을 뗐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늦었으니 얼른 자. 그래야 쑥쑥 크지.”
다이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온 스가와라는 입가에 흐른 침을 소매로 북북 문질러 닦으며 얼른 제 방으로 돌아갔다.
스가와라가 방을 나간 뒤 다이치는 아직 그의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을 가만히 보다가 조금 전까지 스가와라의 입에 있었던 손가락을 제 입에 넣고 그가 알려준 혀의 움직임을 따라 우물거리며 소리 냈다.
“수가아와아라…”
완벽하지는 않지만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제대로 말했다. 기뻐서 당장 그에게 달려가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잠시 이대로 있고 싶었다. 조금만 더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그가 가르쳐 준 대로 혀를 움직이며 그의 이름을 말하고 싶었다.
5.
달도 구름 뒤에 숨을 정도로 늦은 밤이었다. 저 옆방에 누워 있을 요괴의 눈동자처럼 둥글고 예쁜 보름달이 하늘 높이 떴지만 구름에 가려 달빛을 온전히 보지 못하는 아쉬운 그런 밤이었다. 어느새 가을이 지나 겨울의 문턱에 있어서 그런지 찌르르 우는 풀벌레와 그에 장단을 맞추는 부엉이 소리가 구슬펐다. 쉬이 오지 않는 잠자리에 들기 위해 뒤척거리던 중에 간간이 들리는, 그리고 서늘한 공기에 뒤섞인 열기에 스가와라는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옆방 문을 열었다.
어디가 아픈 것인지 가는 호흡으로 헐떡이는 아이는 노란 꽃이 지고 맺힌 산수유 열매처럼 불그스름했다. 스가와라는 얼른 소매를 걷어붙이고 손을 휘저었다. 왼쪽으로 손을 흔드니 물방울이 모여들었고 오른쪽으로 손을 흔드니 그 물방울들이 하나로 뭉쳐져 다이치의 이마 위에 둥둥 떠다녔다. 손가락을 튕기니 거대한 물방울은 겉의 얇은 막을 제외하고 가장 안쪽에서부터 점점 동결되었고 어느 정도 얼었을 때 손가락을 움직이자 다이치의 이마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차가운지 다이치는 얼굴을 찌푸렸고, 스가와라는 얼른 온도를 다시 조절해 달뜬 열을 식혀주었다.
“스가와라…”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놀랐잖아.”
“걱정시키기 싫어서…”
다이치의 어휘 실력은 계절이 바뀔 즈음에 눈에 띌 정도로 놀라운 발전을 보였다. 아직 엉성하긴 하지만 존대를 섞어 쓰기도 하고, 어려운 발음도 몇 번 알려주면 곧잘 따라 하는 것이 가르칠 맛이 났다. 하지만 이 뿌듯함을 여기에서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게 더 걱정시키는 거야. 앞으로는 아프면 말해.”
다이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 것인지 물어도 그냥 온몸이 아프다고 대답하는 그 증상이 어떤 병의 증세인지 알 수 없어 함부로 약초를 쓰지도 못하고 그저 옆에서 열을 식히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임에 스가와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잠든 줄 알았던 다이치가 눈을 떴다. 다이치의 조그만 움직임에도 눈을 뜬 스가와라는 얼른 이마와 몸 구석구석을 만지며 열이 떨어졌는지 확인했다. 조금 전에 혹시나 해서 먹인 산수유 열매즙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내일 뭐 해요?”
“이 몸으로 하긴 뭘 해. 얌전히 누워서 잠이나 자.”
“나 말고. 스가와라요.”
“네가 아파서 뭘 가르쳐주지도 못하니까 오랜만에 누워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보낼 거야.”
“아무 생각없이…”
열이 떨어졌다는 것에 안심하며 괜히 퉁명스럽게 말이 나왔다. 다이치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면서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내 포기했는지 입술을 앙다물었다. 아이가 용기를 낼 때까지 기다리던 산신은 피식 웃으며 그의 가슴께를 토닥여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포기가 아닌 큰 도약을 위한 준비 자세이자 신호였다.
“그럼 내 생각해 주세요. 아니, 나랑 같이 있어 주세요.”
몇 달간 같이 지내면서 무언가 해달라는 직접적인 요구는 처음이었다. 저 또래의 아이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기억 속의 저만한 아이들은 떼를 쓰거나 고집을 부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은 손에 쥐고 입에 넣고 봐야 얌전해지는 줄 알았는데 다이치는 그런 것 하나 없었다. 그저 자신의 뒤만 따라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열이 내리긴 했지만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얼굴과 졸음이 가득해 흔들거리는 눈동자를 어떻게든 붙잡고 단호하게 말하는 모습은 우스웠지만, 쉽고 어려움을 떠나서 어떻게든 들어주고 싶고 우습지 않았다.
“그래, 여기 있을게.”
*
“스가와라, 일어나요. 감기 걸린다고요.”
“괜찮아… 산신은 감기 안 걸려…”
“그럼 이불에서 주무세요. 거긴 불편하잖아요.”
이불에서 자라고 권유하는 굵직한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몸을 빙글 돌렸다. 얇은 요 하나 깔지 않은 다다미는 확실히 불편했기에 그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목소리 참 좋네.’
산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어 뇌에서 울렸다. 익숙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다른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몸을 뒤척였다. 초겨울의 아침 공기는 생각보다 싸늘해 몸을 웅크리자 그 목소리의 주인이 스가와라의 흐트러진 옷을 정리해주며 이불을 덮어주었다. 따뜻한 솜이불과 맞닿은 살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스가와라는 어미에게서 떨어지기 싫은 아이처럼 그 온기를 꼭 잡고 놓지를 않았다.
단단한 살과 그 위로 튀어나온 뼈, 그리고 꿈틀거리는 핏줄의 감각에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눈꺼풀은 어떻게 들어 올렸지만 초점이 잘 맞춰지지 않아 눈에 있는 힘껏 힘을 줬다. 커다랗지만 흐릿한 실루엣이 점점 선명해지자 스가와라는 누구냐는 외침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이불과 옷이 뒤엉켜 저 멀리 물러나지 못했지만 이 정도라면 힘을 써 저 요괴를 처치하기 충분했다. 스가와라의 손에서 무언가가 나올 것 같은 이 급박한 상황에서 요괴는 웃으며 공격할 마음이 없다는 의미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저 다이치예요.”
“난 너 같은 놈- 다, 다이치?.”
“네, 다이치요.”
어젯밤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의 온몸을 닦아주고 토닥여주었다. 제 생각을 해달라며 옆에 있어 달라고 붙잡던 아이였다. 어린아이라서 혹시나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밤을 지새우다 까무룩 잠드는 순간까지 눈에 보이던 것이 품에 꼭 안길만큼 작은 아이였다.
“스가와라 덕분에 열이 이렇게 내리고 어른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이제야 문장을 말하고 엉성한 존댓말을 하던 아이가, 뒤만 졸졸 쫓아다니던 아이가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커졌다는 건 대체 어느 나라 이야기에서 봤던가. 저기 저 멀리 서쪽 나라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에서 어린 신이 사랑의 화살을 실수로 자신의 손에 찔러 눈앞의 인간에게 반해 어른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았지만, 요괴가 이렇게 되었다는 것은 처음 들었다. 서쪽 나라의 전설이 여기에서도 통하던가? 갑작스러운 성장과 변화에 정작 본인은 덤덤한데 맞은편 사람 아니, 산신의 표정에는 지금 저 작은 머리로 하고 있을 오만 생각들이 다 드러나고 있었다.
“왜 갑자기 이런-”
“글쎄요. 저 멀리 서쪽 나라의 사랑의 신이 사랑에 빠져 어른이 되었다던데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마귀의 저주에 걸려 제 본모습을 잃고 살다가 스가와라 덕분에 되찾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