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게스가] Summer Love
W. Epsilon
아침부터 왠지 공기가 습하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오후 네 시쯤 되자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두어 시간 전만 해도 비가 온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사뿐히 내려앉는 물방울들이었기에, 우산을 준비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었는데. 그래도 과사 알바가 끝난 후에는 좀 낫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했건만, 나아지기는커녕 빗줄기는 더 굵어졌다. 이 시간에 학교에 있을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저장되어있는 연락처를 쭉 살펴보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그냥 우산 가져올걸. 평소에 우산을 가져올 땐 내리지도 않던 비가 이런 날에만 꼭 골라서 온다. 스가와라는 눈썹을 찡긋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곤 신발 끈을 고쳐 묶었다. 별 수 있나. 전력질주하면 딱 10분이다. 자취방에 들어설 때의 꼴이 어떨지 벌써 눈에 선하지만, 스가와라는 가방을 머리 위로 올리고선 속으로 침착하게 외쳤다.
하나, 둘, 세엣―!
힘차게 발끝으로 땅을 차며, 시작했다. 전력질주.
머릿속으로 그린 이상적인 모습은 전력질주하며 비를 덜 맞는 것이었지만, 겨우 교문을 나섰을 뿐인데 스가와라는 이미 흠뻑 젖은 상태였다. 물웅덩이를 피하려 빙 돌아가고, 학교 곳곳에 있는 계단들도 조심스럽게 내려오다 보니 마음처럼 빠른 이동이 될 리가 없었다. 이렇게 거센 비바람을 마주하며 집까지 가다가는 다음날 꼼짝없이 감기몸살을 앓을 판이었다.
‘예상치 못한 지출’란에 적힐 작지 않은 지출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지만, 몸이 아픈 것보단 나았다. 스가와라는 포기하고 가까운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온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니 큰 한숨이 나왔지만, 정수리가 젖지 않은 것은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가방 꼴은 말이 아니었지만.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알바생의 습관적인 인사에 습관적인 웃음과 하이톤으로 답하며 스가와라는 곧장 우산 코너를 찾아갔다. 비에 봉변을 당한 손님들이 여럿 다녀간 듯, 바닥에는 펼쳐진 박스들이 깔려있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온다. 아니나 다를까, 비가 내리기 시작한지가 한참이다 보니 이미 발 빠른 사람들이 저렴한 우산은 다 선점해갔다. 겨우 하나 남아있는 것은 꽤 가격이 있는 연분홍빛 우산. 마음에 드는 구석은 하나도 없지만 그 본래 용도만은 절실해서, 스가와라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계산대로 향했다. 습관적으로 레토르트 식품 몇 개도 함께 집어 들었다.
“혹시, 이거 말고 다른 우산은 없나요?”
“네, 저기 있던 상품이 마지막이에요.”
“아, 네에…. 계산해주세요.”
이제 우산 매일 가지고 다녀야지. 의미 없는 다짐 속에 돈과 물건과 영수증이 오갔다. 유리문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온통 회청색이 가득했다. 스가와라의 기분도 딱 그 모양이었다. 그냥 조용한 어딘가에 가만히 앉아있고 싶었다. 연분홍색 우산을 다잡으며 밖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때마침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 스가, 난데. 학교야?
“아, 다이치. 나 지금 학교 옆 편의점. 왜?”
- 미안한데, 혹시 우산 있어?
스가와라는 픽 웃었다. 그래도 좋은 일 한 번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도 되려나. 긍정적인 답변에 사와무라의 목소리는 금방 밝아졌다. 이 우산을 둘이 쓸 수 있기는 하려나. 상상해보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보다 큰 유쾌함이 더해진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귀찮은 포장 비닐은 미리 버리고 큰 숨과 함께 문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알바생의 인사말마저 유쾌하게 들렸다. 우산을 펼치기 전까지는. 초등학생 1인용 크기인 우산은 앙증맞은 토끼 캐릭터로 가득했다. 사와무라를 데리러가는 짧은 시간동안 상체의 절반 빼고는 비를 그대로 맞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우산에 대한 의아한 표정을 마주하는 문제도 작지는 않았다.
“스가, 못 보던 우산인데?”
“편의점에서 방금 샀어. 나도 우산을 안 가져와서…. 이것밖에 없더라고.”
“아, 응. 잘 어울리는데?”
“…일단 어울린다니까 고마워. 근데, 이거 엄청 작아서 둘이 쓰면 머리만 가릴 것 같아.”
“그거면 충분해.”
사와무라는 스가와라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어쨌거나 머리는 가려지니 다행이었다. 스가와라는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이젠 정말 보송보송한 옷이 그리워졌다.
“이렇게 소나기가 거칠게 올 줄은 몰랐어.”
“그러게. 나도 오늘 비가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네.”
“아까 편의점에서도 우산 재고가 없다더라고.”
이런 적은 또 처음이라니까. 스가와라의 말에 사와무라가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왜? 입모양으로 물으니 사와무라는 손가락으로 왼쪽방향을 콕콕 가리켰다.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니, 편의점 우산 코너에는 다양한 색과 형태의 우산이 한가득 있다. 분명히 아까 그 편의점이다. 눈썹이 절로 찡그려졌다.
“뭐야? 아까는 없다고 했는데.”
“그새 재고가 채워진 걸까? 아니면 착각했거나.”
우씨. 스가와라는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번은 쓰지 않을 것 같은 우산을 산 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개를 길게 빼서 살펴보니 편의점 안에는 아까와는 다른 사람이 있다. 까만색 삐쭉삐쭉이 아니네. 내일 편의점에 들러서 마주치면 본인 취향대로만 우산을 꺼내두던 거냐고 놀려줄 생각이었다.
* * *
스가와라는 꽤 유명인 이었다. 적어도 카게야마가 알고 있는 편의점 알바생들 사이에서는 그랬다. 다른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얼굴이 유명함의 베이스가 되었고, 늘 비슷한 시간에 나타나서 비슷한 물품을 사가는 패턴은 쉬운 기억을 도왔다. 정확한 이름까지는 알려지지 않고 ‘그 사람’이라거나 ‘눈물점’같은 특징들로 일컬어지곤 했지만, 카게야마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스가. 그가 언젠가 친구와 함께 왔을 때 불렸던 이름이었다.
카게야마가 일하는 시간에 스가는 늘 간단한 저녁거리를 사가곤 했다. 나타나는 때는 다른 대학생들이 덜 오는 약간 늦은 시간. 천천히 느릿하게 문을 열고 들어와 밝게 인사를 건네고, 나름 신중한 얼굴로 찬찬히 냉장식품들을 살펴보다가 먹을 것들을 선택해서 계산대까지 오는 걸음들은 늘 여유가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동안 스가와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눈이 마주칠 때도 종종 생겼다. 그럴 때마다 스가와라는 작게 웃으며 가벼운 화제를 꺼내어놓았다. 오늘은 디저트가 많네요, 같은 말들이었다. 능숙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의 반응만 하는 것이 카게야마로써는 스스로에게 불만이었다. 스가와라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인 레토르트 마파두부 재고가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쓰는 것이 카게야마 나름의 호감과 친절의 표시였다. 스가와라가 알고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자기주장이 강한 여름은 또 한 번 거센 소나기를 뿌린다. 온 동네가 천둥번개 소리로 시끄러웠다. 카운터에 앉아 멍하니 벽면을 타고 흐르는 비를 바라보던 카게야마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창고로 들어갔다. 이 정도로 되려나. 이번 주 내내 맑다는 일기예보가 빗나간 것 때문인지 우산 재고는 평소보다 훨씬 적었다. 지난번에 의도치 않게 넉넉한 재고를 만들어두었는데도 그랬다. 판매용 우산과 문 옆에 놓을 우산꽂이를 꺼내놓고, 다시 들어가 바닥청소용 걸레를 가져오는 짧은 사이에도 우산을 사려는 손님이 두엇 들어왔다.
소나기치고는 비가 오래도록 내렸다. 어쩌면 소나기가 아닐지도 몰랐다. 비가 내리는 기세로 보면 하루 이틀은 거뜬히 내릴법했다. 우산은 순식간에 다 팔렸다. 우산 재고가 없다고 알리기는 했지만, 당장 우산이 입고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시간을 보니 7시가 다 되어갔다. 평소 같으면 곧 스가와라가 올 시간이지만, 비가 오는 날이니까 들리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 사람은 우산을 가지고 나왔을까? 오늘은 저녁으로 뭘 먹을까? 이왕이면 제대로 된 밥을 먹으면 좋겠는데. 제대로 아는 것은 없지만 관심은 많았기에, 카게야마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무료함을 달랬다. 되짚어보니 오늘 아르바이트를 하는 내내 그 사람 생각뿐이다. 마지막 우산이 팔리는 순간, 혹시 모르니까 하나는 빼놓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으니까.
“으아, 차가워라. 안녕하세요!”
“아, 어서오세요―”
혹시 모르니까, 하나 빼놓을 걸. 빗물에 흠뻑 젖은 스가와라가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카게야마는 아까 했던 후회를 되풀이했다. 언제나처럼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는 목소리에 반응은 했지만, 카게야마의 표정은 후회 그 자체였다. 겨우 이런 일로 이렇게 후회하는 것도 조금 우습지만, 마음이 그러한 것을 어쩔 수는 없었다.
“어? 오늘도 우산 없어요?”
“네, 재고가 떨어졌어요.”
으헝, 어떡해. 스가와라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지며 시무룩해졌다. 그러다가 약간 찌릿찌릿한 눈빛을 보내며 카게야마에게 다시 물었다.
“지난번처럼 장난인건 아니죠?”
“아, 지난번. 그땐 구석에 몇 개 더 있었는데 발견을 못해서…. 죄송합니다.”
“바로 다음에 온 분이 다 채워놓은 거 다― 봤어요.”
“…들었어요. 보신 거.”
스가와라는 금방 장난기를 지우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어떻게요? 카게야마는 훅 찔러 들어온 질문에 뭐라고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당신이 유명인사라고 말하는 건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게, 어…. 스가와라는 당황해서 붉어지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편의점에 들어올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더니, 늘 느끼고는 있었지만 정말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는 사람이다. 괜히 놀리고 싶어지는 사람이기도 하고.
“알겠어요, 대충 알겠어. 너무 곤란해 하니까 미안해지잖아요?”
“그, 우산이 잘 어울리기는 하셨어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어울렸다면 기분은 좋네요.”
웃음의 여운이 남았는지 스가와라는 계속 킥킥거렸다. 카게야마는 목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건 그렇고. 우산 한 번만 더 확인해주실 수 있을까요?”
지난번에 한 실수가 있으니,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창고로 들어갔다. 구석구석 살펴봐도 없다. 전산 상으로도 우산은 없다. 이것저것 확인하고선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니, 스가와라는 다시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있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우산은 지금 없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챙겨 나왔어야 하는 건데요, 뭐.”
스가와라는 냉장식품 쪽에 잠시 시선을 두다가 고개를 돌렸다. 지금 상황에서 짐은 몸과 가방으로도 벅찼다. 내일부터는 매일 우산 들고 다녀야지, 진짜로. 의미 없는 다짐을 또 다시 반복하면서 스가와라는 바깥을 바라보고 심호흡했다.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면 좋겠지만, 오히려 더 나빠지면 안 되니까 서두를 생각이었다. 우산을 쓴 친구가 편의점 앞을 지나가주면 정말 좋을 텐데.
주섬주섬 밖으로 뛰어 나갈 준비를 하는 스가와라의 뒷모습을 보다가 카게야마는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그게 자신에게까지 좋은 생각은 아니었지만.
“저기, 손님.”
“네?”
“그…, 내일도 오실 거죠?”
“…네에?”
“매일 오시잖아요. 그러니까 내일도 오실…거죠?”
스가와라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 큰 호의의 기운이 느껴졌다. 거절할 수 없다. 거절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입 꼬리가 벌써 마중을 나가있었다.
“그럼 제 우산 쓰실래요? 두고 다니는 우산이 있어서요.”
“저는 좋지만…. 집에 가실 때 불편하시잖아요.”
“아침에 챙겨 와서 우산이 두 개에요.”
“와, 진짜죠? 그럼 감사히 쓸게요. 내일 꼭 가져다드릴게요.”
스가와라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보니, 카게야마의 속을 누르던 묵직하던 것이 스르륵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큰 미션을 달성해낸 듯 뿌듯한 기분도 들었다. 창고에 들어가 한 쪽 옆에 세워두었던 자신의 우산을 가지고 나오니, 스가와라는 캔 커피 하나와 맥주 한 캔을 계산대에 올려놓고 있었다. 계산을 하고 우산과 함께 음료들을 건네었지만 캔 하나는 카게야마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이거 드세요. 지금은 돈을 별로 안 가져와서. 내일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어,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제 성의니까요. 우산 잘 쓰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편의점을 나가는 스가와라의 발걸음이 가볍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모습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캔을 만지작거리며 문가를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것인 캔커피는 처음이다. 집에 놓고 매일 아침 쳐다봐야지.
몇 분 뒤, 카게야마는 아까의 스가와라가 준비하던 그 자리에서 심호흡을 하고 뛰어가기 시작했다. 흠뻑 젖어도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 * *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늘 이 시간에 반겨주던 그 목소리, 그 사람이 아니다. 스가와라는 인사를 하면서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 새벽부터 점점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오전에는 맑은 하늘이 얼굴을 내밀어서 스가와라는 학교에서 유일하게 우산을 가져온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 얼굴을 생각하며 꿋꿋하게 우산을 들고 다녔는데, 막상 만나려던 사람이 없으니 괜히 상실감이 크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일 보자고 인사 해놓고선 갑자기 출근하지 않으니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원래 있던 알바생은 왜 안 왔냐고 물을까, 하다가도 그만두었다. 그냥 오늘 안 온 거겠지. 개인적인 일 때문에 일하는 시간을 바꾸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서로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사이에 사생활까지 묻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했다. 저녁거리를 사서 들어오며, 스가와라는 하루 종일 들고 돌아다닌 우산을 잠시 바라보다가 현관 옆에 걸쳐놓았다. 내일은 있겠지.
이튿날은 한층 더 화창한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찾아보기 힘든, 바람도 잘 없고 햇빛은 쨍쨍한. 검정색 장우산을 들고 캠퍼스를 오가는 스가와라의 모습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우산은 너무 더우니까 햇빛이라도 막아달라며 달라붙는 동기들을 치워내는 무기가 되었다. 주인에게는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빌린 우산을 용도 외로 사용하는 것은 실례라고 느껴졌고 ―물론 우산의 용도가 무기인 것은 아니지만― 우산 아래에 남과 붙어있는 것도 싫었고, 다른 사람을 씌워주는 것은 더더욱 하고 싶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마음이라고 해도, 그랬다. 그 사람이 부탁했다면 고개를 끄덕였을까? 스가와라는 긍정적인 답변이 떠오르는 이유가, 우산의 주인이 그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생각해보니 자기를 닮은 우산을 쓰는 것 같다. 길고, 까맣고. 아주 흔하고 베이직한 디자인의 우산인데도, 그 알바생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희한한 일이었다. 우산을 감아서 고정시키는 끈 색이 파란색이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우산을 쓴 모습을 생각하니 어울리기는 했다. 자동적으로 토끼 우산이 어울린다던 말이 떠올랐다. 예의상 한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제와 같은 시간에는 어제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 스가와라는 사람을 확인하곤 가게 안을 한 바퀴 돌아보고선 그대로 나왔다. 마음을 쿡쿡 간질이는 듯, 긍정적인 듯 부정적인 이 느낌을 사그라트리고 싶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우산을 곱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곧장 옷을 갈아입으며 두 번째 외출을 준비했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도록 신나게 놀다가 올 생각이었다.
“카게야마, 고마워. 필요하면 연락해.”
“네, 들어가세요.”
일주일동안 새벽 타임으로 시간을 바꿨다. 지난번에 카게야마를 도와줬던 사람의 부탁이라 거절할 수 없었다. 빌려준 우산이 ―사실은 그 사람이― 마음에 걸렸지만, 대신 받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보게 될 사람이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 순간을 남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평소처럼 저녁 때 다녀갔을까. 연락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다른 알바생을 통하지 않으려니 쉽지 않았다.
한창 여름인데도 새벽은 서늘한 공기가 떠돌았다.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괜히 청소를 시작했다. 늦은 시간이다 보니 확실히 손님이 적었다. 지루함을 달랠 무언가가 필요했다. 진열을 정리하고 바닥을 닦고 있는 중에 맑은 종소리가 울린다. 습관적으로 내뱉은 인사가 먼저 손님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으레 그러하듯 아무 답이 없을 줄 알았는데, 잘 알고 있는 목소리가 답을 해온다.
“안녕하세요.”
평소보다 조금, 조금 분위기가 다르다. 약간은 풀어진 눈과 목소리의 스가와라가 천천히 들어왔다. 카게야마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망설임 없이 물건을 향해 걸어간다. 목적지는 카게야마가 늘 봐오던 냉장식품이나 레토르트 코너가 아니다.
스가와라가 내려놓은 물건의 바코드를 찍으며 말없이 계산을 마쳤다. 스가와라는 값을 지불하고 나서야 카게야마를 알아본 듯 손가락으로 허공을 콕 찍으며 놀란 소리를 냈다. 어?
“왜 새벽에 있어요―, 오늘 저녁에 왔었는데.”
“일주일동안 바꿨어요.”
“일주이일…. 얘기해주지. 그럼, 우리, 다음 주에 봐요? 다음 주에 봐요!”
아무래도 취한 것 같은데 괜찮은 건지. 카게야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스가와라는 신나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편의점을 나섰다. 생각해보면 카게야마가 있는 시간에만 올 리는 없었다. 다들 ‘비슷한 물건을 사 간다.’라고만 말했지, 그 물건이 식품이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괜히 놀랍고 기분이 이상했다. 누구와 함께하는 밤을 위한 준비인걸까. 아무도 상처주지 않았는데 상처를 받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 *
카게야마는 아주 약한 의도를 가지고 캠퍼스를 떠돌기 시작했다. 체대 건물을 벗어나는 것은 입학 후 처음인 것 같다. 새내기가 학교 구경 좀 하고 싶을 수 있지. 카게야마는 스스로 합리화하며 캠퍼스 안에 있는 온갖 잔디밭이며 학생회관, 강의용 건물 등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연하게라도 스가와라를 마주치면 깜짝 놀란 척 해보일 생각이었다. 어느 과인지, 어느 계열인지만 알아도 훨씬 수월할 텐데. 거기까지 알 도리는 없었다. 그냥 운에 맡길 수밖에.
그리고 카게야마는 운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스가, 어제 얼마나 마신거야?”
“몰라…. 기억 안 나.”
학교 탐방을 시작한지 30분쯤 지났을까. 카게야마는 벤치에 앉아있는 스가와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제 과음을 하기는 했는지, 평소보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가방에 있는 숙취해소 음료를 떠올렸지만 전달해주기는 포기했다. 스가와라는 이미 옆에 앉은 친구가 건네는 음료를 입에 털어 넣고 있었다.
“너 그러다가 큰일 나. 막 전화 오게 하지 말고.”
“알겠어―. 다이치, 오늘 하루 종일 잔소리 할 거야?”
“그렇게 해서 네가 술 마시는 게? 나아지면.”
“…그러려면 일 년은 해야 할걸?”
스가와라는 능청스럽게 답하며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스가와라! 사와무라가 크게 외치자 스가와라는 깔깔 웃기 시작했다. 알겠어, 알겠어. 다이치, 내가 잘못했어. 사와무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카게야마는 멀리에서 스가와라를 지켜보다가 뒤를 돌았다. 이름이 스가와라였구나. 사범대학을 다니는구나. 어울린다. 그리고 안 어울려. 정확히 무슨 과일까? 몇 학년일까?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게 있을까? 그리고…. 억지로 시작한 스가와라의 무언가에 대한 생각들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이내 머릿속은 하나의 궁금증으로 가득 찼다. 옆에 있던 사람은 누구일까?
카게야마는 운이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그리 좋은 편도 아니었다.
일주일동안 새벽 알바를 하면서 카게야마는 스가와라를 더 이상 보지 못했다.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론 지난번과 같은 모습을 보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보고 싶었다. 꽤 많이. 알바를 하는 시간이 아닌데도 저녁 시간대에 편의점에 올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서든 소문은 금방이다. 그렇게 알려지고 접근하고 싶지는 않았다.
“카게야마! 네 거 맞지? 그 손님이 주고 갔어.”
“아…. 네.”
오후 타임으로 돌아온 첫 날. 카게야마는 앞 타임 사람을 통해 우산을 돌려받았다. 우산을 빌려준 지 꼭 열흘 만이었다. 스가와라를 만나겠다고 기대하던 날이었는데, 하필 오늘 전달이라니.
“무슨 사이야? 좀 친해졌어? 우산도 빌려주고.”
“아뇨. 그냥… 전에 실수했던 게 있어서요.”
“혹시 친해지게 되면 좀 소개시켜줘. 알지? 우리 다 관심 많다.”
네. 내키지 않는 답이었지만 빗겨나갈 도리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편의점 안에는 조용한 음악소리만이 남았다. 카게야마는 두 손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누군가를 향하지 못하는 감정은 고스란히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다가가지도 못했는데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었다. 그 날 말을 걸어볼 것을. 지금껏 마주쳤는데도 가만히 있던 것을 후회했다.
카게야마는 문득 자신의 우산을 바라보았다. 벽에 기대어 세워진 검정색 장우산에는 작은 쪽지가 매달려있었다. 조금은 다급한 손끝으로 쪽지를 풀어보니 단정한 글씨체가 정갈한 문장으로 고마움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멘트인데도 카게야마는 그 종이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그 사람의 목소리로 상상해보기도 했다. 쪽지가 더 이상 구겨지는 것이 싫어서 곱게 접어 지갑 안에 넣었다. 쪽지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은 없었지만 부적과 같은 용기가 되었다.
“혹시, 스가와라 씨 아시나요?”
“네…. 알기는 하는데, 누구세요?”
“할 말이 있어서요. 지금 어디 계시는지 아세요?”
“아마 저기 건물에요. 곧 강의 끝날 시간이라, 1층에 계시면 아마 마주치실 수 있을 거예요.”
카게야마는 밤새 뒤척이며 스가와라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어렴풋이 동이 터오는 것을 느끼며 결단을 내렸다. 언제부터 이렇게 망설이고 살았다고. 일단 찾아가서 얘기해 볼 생각이었다. 뭐부터 시작해야할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최종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명확했다. 그 말을 할 수 있을만한 분위기까지 잘 가는 것이 목표였다.
감사합니다. 가타부타 물어보지 않고 질문에 답을 해준 사람에게 큰 감사를 느끼며 카게야마는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지목해준 건물로 향하는 걸음이 점점 빨라지다가 결국은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준비한 말들과 질문들을 차근차근 정리하며 기다릴 생각이었다.
“어?”
“….”
“안녕하세요. 편의점. 맞죠?”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러니까 타이밍이 잘 맞았으면 너무 좋았을 텐데. 카게야마는 건물 입구로 들어가려다가 딱 마주친 스가와라의 얼굴을 보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당황으로 물들어가는 얼굴과 열심히 달싹이기만 하는 입술을 빤히 바라보며 스가와라는 살짝 웃었다.
“우리 학교?”
“네.”
“그랬구나, 몰랐어요. 급한 일 있던 것 같은데, 어서 가세요.”
“아뇨, 그, 급한 일은 아니고. 스가와라 씨 보러 온 건데….”
에? 나? 자신을 콕 찍어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스가와라는 자신의 옆에 서있던 친구를 먼저 보내버렸다. 이렇게 급하게 달려오면서 찾아온 게 자신이라면 시간을 내주는 것이 맞았다. 조금은 원하던 부분이기도 했고.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요?”
“지난번에 들었어요.”
“아, 편의점에서 들었을 수 있겠구나. 사실 나도 이름 알아요. 카게야마, 맞죠?”
이번엔 카게야마가 입을 떡 벌렸다. 고장나버린 표정을 보며 푸하하 웃어버린 스가와라는 두 손으로 직사각형을 만들어보였다. 뭔지도 모르면서 손동작을 똑같이 따라하는 카게야마가 귀여웠지만 이번엔 웃음을 꾹 참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 할 때 명찰 달잖아요. 카게야마는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가, 조금 생각을 하더니 다시 여러 번 끄덕거렸다.
“그건 그렇고. 저한테 무슨 일이에요? 전공은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왔어요?”
“그….”
학교를 다 뒤졌어요― 라고 말할 수는 없고. 카게야마는 처음부터 난관을 마주했다. 조금 고민하던 카게야마는 우연히 봤다고 대답했다. 억지스럽고 우기는 것 같았지만 그보다 더 나은 답을 생각할 수 없었다. 우연히. 그럴 수 있으니까. 스가와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산! 우산은 받았어요? 저 그거 며칠을 들고 다니다가 포기하고 전해줘 버렸잖아요. 직접 주고 싶었는데.”
“아, 우산. 받았, 아니 못 받았어요!”
진심과 관심을 한 움큼 더해 주제를 던지자 카게야마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리고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받았다고 하면 끝이니까 못 받은 척 하는 것인지. 속내가 너무 드러나지만 스가와라는 모르는 척 해주기로 했다.
“그럼 우산 때문에 온 거에요? 우산 달라고?”
“아니요. 아니, 네! 아… 아니, 아니요!”
아니라고 하면 주제가 뭔가 엇나가지만, 겨우 우산을 받으려고 여기까지 온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카게야마의 혼란을 다 이해한다는 듯 스가와라는 눈을 반짝이며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느낌이 좋았다. 예상하고 있는 딱 그 느낌, 그 감정, 좋은 예감이 들었다. 자신이 끌어들이고 있는 대로 잘 움직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이렇게 당돌하게 쳐들어오는 용기가 마음에 꼭 들었다. 그 와중에 말을 못 꺼내는 건 조금 가여울 정도였지만.
그럼 여기까지 와줬으니까, 골인까지는 손을 잡고 이끌어줘 볼까.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오늘 알바는 몇 시에요? 늘 그렇듯 그 시간?”
“네? 아, 네.”
“알바 끝나면 뭐 해요?”
“그냥… 별 일 없어요. 집에 가요.”
그럼―. 스가와라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작게 손짓하니 카게야마가 조금 허리를 숙여 스가와라와 키를 맞추었다. 스가와라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가벼운 터치와 함께 카게야마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오늘 밤에 볼래요?”
귓가가 눈에 띄게 붉어진다. 카게야마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스가와라는 시간을 보고선 빠른 손놀림으로 카게야마의 핸드폰에 연락처를 남기고 자신도 받아냈다. 가장 정석적인 이름으로 연락처를 저장하는 모습을 보며 스가와라는 웃음을 삼켰다.
“다음 강의가 있어서 먼저 갈게요. 이따가 봐요.”
“네, 네!”
회색빛 머리를 흩날리며 걸음을 재촉하는 스가와라의 모습을 보다가 카게야마도 서둘러 그 곳을 벗어났다. 머리가 뜨거워진 이 느낌이 내리쬐는 햇빛 때문인지 그 사람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오늘 밤에 만나면 어떻게 하지? 고민되는 것은 산더미처럼 늘었지만 고민의 존재가 행복했다.
뜨겁고 사랑스러운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