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오이스가] 디기탈리스

W. 예그리나새론

“그래서?”

신경질적인 웃음소리만을 내던 오이카와가 처음 뱉은 말은 단지 그 한 마디였다. 속에서 차오르는 미칠 것 같은 감정에 오이카와는 한 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코우시가 사라졌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

칼날 같은 미소조차 거둬낸 오이카와가 재차 묻는다. 사라진 황후도 찾지 못하는 것들이, 감히 이 제국의 신하인가? 속에서 올라오는 파랗게 일렁이는 불꽃 같이 서늘하고 또 뜨거운 분노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도 못하고 흩어지는 수많은 단어들에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안에 찾아와.”

제국의 황제 오이카와 토오루의 기분이 유난히 좋지 않았던 그날은, 황후 스가와라 코우시의 생일이었다.

.

.

.

“맛있게 드세요!”

쾌활한 웃음과 함께 내민 과일 꼬치를 받아든 스가와라가 딸기를 앙 물었다. 딸기의 상큼함과 설탕 코팅의 달콤함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틀어 올린 머리칼을 가린 모자를 더 푹 눌러쓴 스가와라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왼쪽? 아님 오른쪽? 그것도 아니면 직진? 고민하던 스가와라가 이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간은 많고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도 없다. 별다른 고민 없이 발 닿는 곳으로 가보아도 괜찮으리라.

평소에 밟던 푹신한 양탄자가 아닌 딱딱한 석재벽돌의 느낌이 좋았다. 인위적일 정도로 화려하게 만개한 꽃이 아닌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들꽃의 향긋함이 좋았다. 질서 있게 움직이는 하인들도, 밤에도 밝게 타오르는 촛불들도 없는 곳. 잘 훈련된 궁인들에 비하면 아무런 질서도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자유로워 보였다.

슬쩍 돌아보면 황궁이 보인다. 수백 년을 전해져 내려온 제국의 심장이 수도의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바람결에 담을 넘고 전해져오는 진한 꽃향기와 햇살에 반짝이는 수없는 유리창들이 더없이 아름답다. 모두가 동경하는 곳. 위대하고 아름다운 황제가 사는 곳.

“...”

스가와라의 표정이 가차 없이 구겨졌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위대하고 아름다운은 개뿔. 그 녀석의 실체를 온 제국민들이 다 알아야 하는데. 툭하면 삐지고, 자기 봐달라고 찡찡대고. 그런 녀석이 어디가 멋있다는 건지.

한참을 이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어낸 황제이자 저의 반려인 오이카와 토오루를 까던 스가와라가 씩씩대며 꼬치에 꽂힌 마지막 과일을 삼켰다. 생각하면 할수록 열이 올랐다. 내가 왜 그런 녀석이랑 결혼한 건지. 나 좋다는 사람이 줄을 섰었는데.

그랬다. 스가와라 코우시가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오이카와에게 걸릴 위험을 감수해가며 황궁 밖으로 가출을 감행한 이유는 다름 아닌 오이카와 토오루와의 부부싸움 때문이었다. 지금껏 연애를 하고 또 결혼 생활을 하면서 자잘한 싸움이야 얼마든지 있었지만 이렇게 크게 싸워본 것은 처음이었다.

어찌나 크게 싸웠는지 궁 안에 그 소식이 퍼져 한동안 죽을 맛이었다. 자신을 가까이서 모시는, 자신과 친하고 또 자신이 쉽게 자신들을 벌하지 않을 것을 아는 시종들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황제 폐하와 화해하시라는 말을 하질 않나, 자신이 사는 황후궁과 가장 멀리 떨어진 궁에서 일하는 시종들도 오이카와와의 싸움에서 제가 뱉은 말들을 알고 있질 않나, 또 몇몇은 황제 폐하가 노하셔 황후 마마께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하는 얘기들을 하질 않나. 하여간 일주일 동안 내내 시달리다 지쳐 아예 가출을 감행한 것이었다.

물론 자신도 화해할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몇 번인가 사과편지를 쓰려 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첫 번째 문장을 쓴 순간 그 순간의 서러움과 분노가, 두 번째 문장을 쓰자 내가 사과할 필요 없다는 생각이, 세 번째 문장을 쓰자 누가 이기나 보자 하는 오기가 생겨 아까운 종이를 구기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게 오이카와 그 놈은 왜 일주일 동안 얼굴 한 번을 안 비추냐? 평소에는 좀 가라 그래도 계속 황후궁에 붙어 있더니. 가서 나랏일이나 하라고 내쫓으면 너무하다느니 코우시는 날 안 좋아한다느니 궁시렁 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것이 눈에 선한데 도통 발걸음도 하지 않고 공식 석상에서 만나도 자신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모습에 되려 서러워져 혼자 방구석에서 울기도 몇 차례였다.

“...짜증나니까, 마파두부나 먹을까.”

머리끝까지 차오른 화를 식히려면 아무래도 제일 좋은 방법 같았다. 황궁에서는 위 상한다고 간을 너무 약하게 해서 줬단 말이야. 그렇게 드시면 안 된다고 호들갑을 떨어 스트레스를 받아도 영 해소할 게 없었다. 궁정 요리사가 질 좋은 식재료로 시간을 들여가며 정성껏 요리해주는 마파두부도 물론 맛있었지만 맵질 않아서 아쉬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던 스가와라였다.

기억을 더듬으며 걸어가는 골목길은 황궁에 들어가기 전과 달라진 점이 없었다. 갑작스런 비가 쏟아지던 날 급하게 숨어들었던 낡은 차양, 아침저녁으로 따끈따끈하고 보도라운 빵을 구워내는 빵집, 달콤하게 잘 익은 과일들이 늘어선 가게 같은 수수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이 지금 스가와라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사실은, 많이 그리웠다. 주위에선 황제에게 간택된 주제에 복에 겨웠네, 이제 아무 걱정도 없이 아양만 떨면 되겠네 같은 말들을 수없이 들어왔고 황궁의 안온한 생활에도 감사하고 있었지만 가끔은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돌아다니며 길거리 음식을 사먹고 잘 다져진 길이 아닌 흙길을 밟고 싶었다. 그것이 스가와라 코우시의 솔직한 염원이었다.

담쟁이덩쿨로 덮인 낡고 좁은 길목을 쭉 걸으면 스가와라가 거의 매일 발걸음 하던 마파두부 집이 있다. 오랜 시간을 겪으며 잘게 금이 간 벽돌의 규칙도 없이 아름다운 문양을 하나하나 매만지며 스가와라는 좁은 길목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언제나 그랬듯 수수한 흰색 향기가 번져있던 길목의 빛깔 안으로 들어설수록 점점 붉은빛으로 변해갔다.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는 매운맛이 하얀 연기를 내며 안 그래도 흐린 가게의 간판을 더욱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아저씨 계세요?”

뜨거운 김에 물기가 맺힌 천을 거둬내자 눈에 익은 내부가 눈에 들어온다. 몇 번인가 촌스럽다 말했지만 내가 좋으면 그만이라며 고수하고 있는 튀는 색의 벽지, 몇 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계의 나뭇결, 날아가는 글씨로 일정이 휘갈겨진 벽걸이 달력. 언제와도 참 낡고 촌스러운, 그럼에도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장소에 스가와라의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스가와라?”

열기에 붉게 달아오른, 시시할 정도로 익숙한 얼굴. 그럼에도 시간이 더해지니 더없이 반가운 얼굴. 아저씨는 변한 게 없네. 언제나 그렇듯 달아오른 얼굴도, 짙은색 머리카락을 잘 정리해 뒤집어 쓴 반투명 위생캡도. 그 무엇도 달라진 것이 없어, 괜스레 눈물이 맺히려는 것을 참아낸 스가와라는 익숙하게 웃어보였다. 잘 지내셨어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던 거야? 꽃집도 정리하고 덜렁 인사 한 마디만 남겨놓고는.”

가벼운 타박이 담긴 그의 말에 스가와라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있잖아요, 꽃집에 찾아와서는 꽃은 안 보고 플러팅하던 놈팽이 자식이 사실 온 제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위대한 황제 폐하였거든요? 근데 그 자식이 저한테 홀라당 반해가지고 어쩌다 연애하다가 어쩌다 황궁으로 납치 됐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해봤자 믿어주실 리가 없겠지. 거리의 서점에서 비밀리에 팔리는 황제와의 로맨스 소설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었으니까. 소설에서나 읽었던 그런 일이 정말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었다.

“어쨌든, 오늘도 늘 먹던 걸로 준비하면 되는 거지?”

호탕하게 웃으며 묻는 그에게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늘 먹던 거라, 오랜만에 써보는 말이었다. 하나도 다를 것 없이 매일매일 똑같은 거리였고 장소였는데 몇 달 동안 발걸음을 끊었다고 이렇게 새로워 보이다니. 열어둔 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조차도, 들이마시는 공기조차도 마냥 새로워 절로 웃음이 나왔다. 때때로 무겁고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황궁의 금빛 공기가 아닌 가볍고 사사로운 푸른 공기가 온몸을 채우는 기분이었다.

하얀 접시에 붉게 차려진 따끈한 마파두부를 뜨기 전의 폭신한 감각. 잘 먹겠습니다! 평소보다 배는 더한 기대감에 크게 소리를 내어 인사한 스가와라가 마파두부를 크게 한술 떴다. 보들하게 씹히는 두부의 식감과 입안을 홧홧하게 채우는 매운 맛. 스가와라의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가 번져갔다. 역시 황궁 마파두부랑 여기랑은 비할 수 없단 말이야. 이런 맛도 모르고 토오루도 참 불쌍해. 다른 사람이라면 한 숟갈 먹는 것만으로 기절했을 매운 마파두부를 물마시듯 자연스레 해치우며 스가와라 코우시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

바쁘게 움직이던 숟가락이 멈췄다. 입안에 가득 담긴 두부를 삼키며 스가와라는 함께 오묘한 감정을 삼켜야 했다. 분명 꼴도 보기 싫었던 얼굴이, 얼굴만 뜯어먹고 살아도 될 만큼 잘난 그 얼굴이, 자신을 볼 때 항상 휘어지는 눈초리며 다정한 갈색 눈동자가 보고 싶었다. 그것을 깨달은 스가와라는 다시 손을 움직여 거칠게 마파두부를 떠 입에 넣었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그 녀석 생각을 해야 해? 진짜 미워. 보기도 싫단 말이야. 괜히 더 거친 말들로 오이카와를 욕해 보았지만 보고 싶다는 생각은 가실 기미가 없다. 왠지 울고 싶어져 묵묵히 먹는 것에만 집중하니 아까까지만 해도 천상의 맛이었던 마파두부도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알고 있었다. 자신은 오이카와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는 것을. 화가 났었더라도 지금은 아니라는 것을. 스가와라 코우시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다. 유능하고 아름다우며 위대한 황제 오이카와 토오루에 비해 너무도 보잘 것 없는 자신에게.

오이카와에게는 황비가 없었다. 황후 한 명을 두었을 뿐이었다. 근본도 알 수 없는, 이름 없는 가문의 성을 쓰는 평민. 우아하고 화려한 생활과는 동떨어져 길거리에 핀 소박한 꽃들을 팔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작은 꽃집의 주인.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사라질 듯 옅은 회색 머리의 스가와라 코우시. 얼마든지 세력 있는 귀족가의 자식이나 막대한 부를 쌓은 상인의 후계자, 백색의 영예를 온몸에 두른 자의 가문과 이어질 수 있었음에도 길거리의 평민에게 반한 오이카와는 그를 황비도 아닌 황후로 삼았다. 다른 황족들을 모두 재치고 수완과 재능으로 황위에 오른 오이카와에 대한 신하들의 두려움이 없었더라면 결코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오이카와의 지위 아래 제국은 전성기를 일궈내고 있었다. 선대 황제가 마련해둔 비옥한 토지 위에 푸른 잎이 돋은 것이다. 만개하는 꽃처럼 피어나는 제국민들의 미소와 함께 조금은 소란했던 황실도 이제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귀족들에겐 분쟁을 일으키기 딱 좋은 타이밍으로 비춰진 모양이다.

오이카와의 눈치를 보느라 한 번도 나오지 못했던 황후의 폐위 관련 청이 올라왔다. 본디 청을 담은 서류는 익명으로 올릴 수 없건만 그 청만큼은 익명이었다. 아마도 그들끼리 미리 짜둔 것이겠지. 그것을 읽어본 오이카와는 분개하며 한 번만 더 폐위 소리를 꺼낸다면 모두의 관직과 재산을 빼앗겠다고 선포했다고 한다. 자신의 곁에 머무르며 자신을 섬기는 것이 일이지만 그날 우연찮게 그 청이 올라왔던 회의에 있었던 시종이 며칠 동안 오이카와의 눈을 피하는 것을 스가와라는 느꼈었다. 그때는 왜 그러나 했는데 아무래도 처음 보는 황제의 모습에 겁을 먹었던 모양이이다.

그 사실은 원래 스가와라의 귀에 들어와서는 안 되었다. 철저한 교육을 받은 입이 무거운 시종들만이 그곳에 함께 할 수 있었고 그들은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았다. 신하들 또한 그곳에서 이루어졌던 이야기들을 입 밖으로 내면 엄벌에 처해졌다. 사랑하는 제 반려에게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게 하고 싶어 하는 오이카와가 스가와라가 마음 아파할 소식을 스가와라에게 말할 리도 만무했다. 그런 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스가와라가 상처 입을 것이라는 것을 오이카와가 예상하지 못할 리가 없다.

스가와라에게 그 사실을 알린 것은 편지 한통이었다. 그날의 기록이 그대로 적힌 둘둘 말린 양피지가 스가와라의 앞으로 전해져 왔던 것이다. 아마 각종 비리로 포장되어 그곳까지 들어왔던 것이겠지. 특징 없이 밋밋한 서체로 밑에 간결하게 더해져 있던 스가와라가 황후가 될 수 없는 이유들과 네 까짓 게 차지할 자리가 아니라는 저주는 스가와라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충분했다.

하필 그것을 읽고 기분이 다운 됐을 때 오이카와가 촐랑이며 찾아온 것이다. 그 자식도 참, 타이밍도 못 맞췄지. 스가와라는 화들짝 놀라 오이카와의 눈을 피했다. 그에 오이카와가 울상이 되어 스가와라를 달랜답시고 이런저런 말들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 스가와라의 억눌린 울음과 감정이 폭발한 것이었다.

알고 있다. 오이카와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저가 오이카와에게 화풀이한 것이다. 일방적으로 잔뜩 화내고 오이카와를 쫓아낸 스가와라는 한참을 울었다. 가져본 적 없는 자괴감이 밀려와 간신히 버티던 제방을 무너뜨려 버렸다. 전부, 나 때문이야. 밤 내내 그 말을 되풀이 하다 잠든 스가와라는 검게 물드는 세상 위로 오이카와를 그렸다. 화해하지 못하고 홀로 잠들던 매일 밤 검은 사위가 오이카와로 채워졌다.

낡은 식탁에 깔린 하얀 천이 스가와라의 눈물로 얼룩졌다. 행복에 잠겨있던 고운 얼굴 위로 투명한 빗물이 내렸다.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에서 오이카와를 찾으며 스가와라는 고개를 떨구고 울고만 있었다.

.

.

.

당황한 아저씨께 다 먹지도 못한 마파두부의 값을 치르고 도망치듯 나와 스가와라가 향한 곳은 자신의 꽃집이 있던 곳이었다. 오이카와를 만나기 전, 평생을 가꿀 곳이라 생각했던 곳. 꽃집을 열기까지의 고생, 하루하루 쌓여 어느새 거대해진 추억, 손님께 실수를 저지르고 몰래 흘렸던 눈물, 그럼에도 매일매일이 즐거워 짓던 미소까지. 그곳에서 비롯된 스가와라의 부분들은 아직도 스가와라에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스가와라에게서 비롯된 그곳의 부분들도 아직도 남아있었다. 옅고 또 짙게. 스가와라를 아는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길을 걷다 한 번쯤 돌아보며 그 아이가 있던 곳이지, 라며 웃을 수 있을 정도의 흔적으로 영영 사라진 줄 알았던 꽃집의 스가와라 코우시는 그곳에 남아있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저가 황후가 됨으로서 아주 작은 꽃집을 운영했던 별 볼일 없지만 그것대로 행복했던 스가와라 코우시는 아예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많이도 달라졌다.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던 백회색의 머리카락은 정성껏 손질되어 물결치듯 허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고 잔잔한 꽃향기가 스며들어 있던 손가락 끝에선 이제 조금 짙은 듯한 향수의 흔적이 느껴진다. 툭 건드리면 쓰러질 것처럼 말랐던 몸에 보기 좋을 정도의 살이 올랐다. 하얀 손에 펜으로 그려놓은 듯한 붉게 긁힌 자국도 더 이상은 생길 일이 없다. 새삼 스스로가 낯설어질 정도로 저는 달라졌다. 전부, 전부 오이카와 때문이었다. 오이카와를 만나고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꽃집은 그들의 아슬아슬했던 연애를 따스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던 증인이다. 오이카와에게 조곤조곤 이름을 읊어주었던 화분들도, 그의 얼굴에 푸르른 그늘을 드리워주었던 덩굴도 더는 그곳에 없었지만 이 다정한 건물은 알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지금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그가 고백하며 저에게 내밀었던 디기탈리스 꽃다발의 싱그러움이 눈에 선했다. 어울리지 않게 잔뜩 붉힌 얼굴이며, 자신이 그에게 알려주었던 꽃말을 되뇌며 했던 말들이며 어디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구석이 없다. 디기탈리스의 꽃말은 분명-

“살려주세요!”

보랏빛으로 기억되는 추억에 조용히 웃고 있던 스가와라의 평온을 찢은 것은 어느 비명이었다. 해가 서서히 땅 밑으로 가라앉는 시간. 온통 보랏빛과 분홍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울려 퍼진 새된 목소리는 바쁘게 움직이던 모두의 걸음을 멈추게 하기 충분했다.

뒤돌아본 그곳엔, 검은 모자를 눌러쓴 남자와 그의 칼에 목을 겨눠진 인영이 있었다.

인질극인가. 알아들을 수 없게 엉켜버린 남자의 고함 속엔 황제를 저주하는 말과 함께 황제를 데려오라는 요구가 담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다. 얼마 전 오이카와의 명령에 의해 섬멸된 범죄조직의 잔당이라 했던가.

경찰들이 주위를 눈에 띠지 않게 포위해가는 것을 보니, 남자를 자극하지만 않으면 잘 끝날 것 같다며 생각했을 때였다.

둔탁한 금속성의 소리가 울렸다. 맨들맨들 딱딱한 석재 바닥에 부딪힌 검은 물체는, 총이다. 경찰이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인지 남자가 잠시 주춤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인질이 달려 나왔다. 그리고, 휘청거리며 끌려가는 어깨.

“...”

찬란한 은빛 머리칼을 가리고 있던 모자가 바람에 실려 어딘가로 사라진다. 곱게 빗질된 은실 같은 머리카락이 노을빛 아래 그대로 휘날렸다. 너무나 이질적이라 배척당했지만 다정한 손길이 닿아 더욱 아름다워진 별빛 같은 장발은 일촉즉발, 당장이라도 붉은 피가 터져나올 것만 같은 이 상황에서도 눈이 부셨다.

스가와라는 낮게 욕설을 짓씹었다. 주위를 포위해오는 경찰의 등장에 이어 들어난 은빛 머리칼에 다시 당황한 남자의 팔을 쳐내 칼을 떨어뜨리곤 팔에 힘을 실었다.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쉬며, 남자를 딱딱하기 짝이 없는 석재바닥에 엎어버린다. 순식간에 튀어나와 칼을 수거하고 남자의 팔을 붙드는 경찰들을 보며, 스가와라는 아주 깊은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찾고 계십니다.”

아. 큰일 났다.

.

.

.

황궁의 분위기는 나쁘다 못해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스가와라와 오이카와가 그렇게 크게 부부싸움을 하고 냉담하게 굴었던 일주일보다도 못하다. 사용인들에겐 대체로 너그러운 스가와라 밑에서 일하며 꽤나 편안한 모습으로 근무하던 사용인들이 오늘은 군기가 바짝 들어있다. 곧잘 웃던 아이들의 얼굴이 겁에 질려 있는 것이 마냥 안쓰러웠다.

화가 난 것처럼 닫혀있던 묵직한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언제나 그랬듯이 공허할 정도로 넓은 공간이다. 다만 거의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던 것이 텅 비어 공허함에 고요함을 더하고 있을 뿐. 가운데 깔린 푹신한 융단 끝, 섬세한 조각이 새겨진 우아한 옥좌 위로 그가 앉아 있었다. 이 나라의 누구보다도 그 자리에 잘 어울리는 사람. 위대하고 아름다운 황제. 스가와라 코우시의 남편인 오이카와 토오루.

스가와라 앞에선 늘 유하게 웃고 있어 그렇지 본래는 서늘한 인상의 얼굴이다.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갈색 눈동자로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낯설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났나보지. 스스로 생각해봐도 어이없는 상황이긴 했다. 제국의 황후가, 하나 밖에 없는 황제의 반려가 제 발로 황궁을 나가 경찰에게 붙들려 왔으니.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걸 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려다보는 시선을 견디지 못해 뭐라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코우시.”

오이카와가 저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러온다. 목을 쥐어짜 겨우 뱉었을 것이 다름없는, 잔뜩 갈라져 거친 목소리. 그와 함께 쓸어 넘긴 얼굴에선 퍼런 날과 함께 끝도 없는 갈증이 담겨 있다. 얼마나 물어뜯은 건지 어제만 해도 멀쩡하던 붉은 입술이 모조리 뜯겨 있었다. 상처 입은 갈색 눈동자가 스가와라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의 받는 젊은 성군, 수많은 피를 흘리고 황좌에 오른 황제. 반역으로 황실을 뒤집고는 황제가 되어 제국을 전성기로 이끈 그였다. 그 누구보다도 왕관이 잘 어울리는 그는 기품과 위엄을 망토처럼 두르고 군림하는 것에 천부적이었다. 누구든 우러러 보게 되는 오이카와가 고개 숙이는 자가 이 제국에 딱 한명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코우시.”

스가와라 코우시다.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황좌에서 일어나 스가와라의 앞에 선 오이카와가 쓰러지듯 스가와라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것이 마치 영영 놓쳐버릴 뻔한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같이 느껴져 스가와라는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그의 짙은 불안함과 안도감이 스가와라에게 전이된다. 스가와라의 마음이 점점 오이카와의 감정으로 물들어 갔다.

투둑, 어깨를 적시는 것은 아직 뜨뜻한 눈물. 갈구하며 끌어안는 뜨겁고 크고 섬세한 손. 내 것이라고 주장하듯 조여 오는 단단한 팔. 목에서 어깨로 떨어지는 선에 파고드는 눈물 젖은 눈물과 뜨거운 입술에 눈물이 차오른다. 오이카와의 감정에 동화되어서, 자신이 오이카와의 모든 것이란 것을 새삼 느껴버려서, 제멋대로 사라져 버린 자신이 미안해서.

“토오루. 토오루...”

자신을 꼭 끌어안은 오이카와의 단단한 팔을 비집고 오이카와의 몸을 감싸 안았다. 오늘 따라 유약하게만 느껴지는 강인한 몸체가 마냥 안쓰러웠다. 홀로 외로웠을 유년기를 보낸 오이카와가 인생을 걸 정도로 사랑하는 건 자신뿐이란 건 스가와라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다시금 말하지만, 알고 있었다. 자신은 오이카와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는 것을. 화가 났었더라도 지금은 아니라는 것을. 스가와라 코우시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다. 유능하고 아름다우며 위대한 황제 오이카와 토오루에 비해 너무도 보잘 것 없는 자신에게.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자신이 초라하고 보잘 것 없으면 어떠한가. 이 화려한 제국의 맨 꼭대기에 군림하는 황제가 저를 사랑하는데. 그가 저를 소중하다고, 아름답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누군가가 인생을 걸 정도로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준다는 건 자신이 보잘 것 없지도 초라하지도 않다는 반증이라고, 지나가듯 누군가 해주었던 말이 지금껏 스가와라의 인생을 지탱하고 있었던 것을.

“어디 가지 마. 내 옆에 있어줘. 나 버리지 말아줘...”

오이카와의 울음이 깊어졌다. 상처 입은 눈망울을 했을 것이 뻔한 목소리로 애원하는 오이카와의 등을 스가와라가 천천히 쓸었다. 내가 미안해. 난 언제나 네 옆에 있을 거야. 널 결코 버리지 않아. 결코 어렵지 않은 세 마디를 한없이 반복하며 스가와라는 오이카와를 아주 천천히, 아주 다정히, 아주 부드럽게 달랬다. 오이카와가 울음을 그쳐 벌게진 눈동자로 스가와라를 바라봤을 때는 이미 새까만 밤이 된 후였다.

댕, 댕, 댕. 자정을 울리는 종이 울렸다. 다사다난한 하루가 마무리되었음에 한숨을 쉰 스가와라가 오이카와를 이끌었다. 오늘은 이만 자자. 그렇게 새로운 하루를 기약하려던 스가와라의 걸음이 오이카와에 의해 멈춰졌다.

“코우시, 오늘 무슨 날인지 몰라?”

맹맹한 목소리로 묻는 오이카와에 스가와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이 무슨 날이지? 오이카와의 생일은 아니다. 꽃집에서 처음 만났던 날도, 오이카와가 저에게 고백한 날도, 오이카와가 저에게 청혼한 날도 아니었다. 황궁에서 결혼식을 올렸던 날은 더더욱 아니고. 오이카와 혼자 만들어내 혼자 챙기는 기념일들의 날짜를 생각해봐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오늘이 며칠이지...?

고민하는 스가와라의 앞으로 한 뭉치의 싱그러움이 내밀어졌다. 늘 따스하게 유지되는 황실의 온실에서 만개한 다발의 디기탈리스. 꽃잎에 맺힌 물방울이 갓 딴 듯 아직 차갑다. 소담하고 화려하게 핀 나팔 같은 꽃다발을 얼결에 받아든 스가와라의 고개가 다시 기울어졌다. 그가 고백할 때 제게 내밀었던 꽃. 이걸 왜...?

“코우시, 진짜 모르겠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오이카와가 재차 묻는다. 디기탈리스. 피는 시기는 보통 여름. 탄생화 중 하나. 디기탈리스가 탄생화인 날짜는...

“오늘 내 생일이야?”

6월 13일. 다름 아닌 저의 생일이다. 그것을 깨달으니 생각났다. 코우시의 생일을 제일로 챙겨야 한다며 이주 전부터 호들갑을 떨던 오이카와의 모습이. 싸운 뒤로 화가 머리끝까지 나 제 생일까지 잊고 있었단 걸 깨달은 스가와라가 헛웃음을 흘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그럼 황궁 내에서 하얀 천에 감싸져 조심스레 옮겨지던 화분들이 다 디기탈리스였나? 갖가지 꽃이 피어있지만 어디에서도 디기탈리스의 빛깔을 찾아볼 수 없던 온실이 머리에 스쳤다.

“코우시, 생일 축하해.”

빙글빙글 돌아가는 스가와라의 호박빛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던 오이카와가 고운 뺨을 감싸며 말한다. 홧홧한 온기가 전해져 온다. 스가와라의 품에 안긴 꽃다발을 비집고 그 사이로 파고든 오이카와가 빙긋 웃었다. 몇 번 쓰다듬은 뺨 위로 입술이 겹쳐왔다. 사랑해. 재차 중얼거린 말은 여름날의 디기탈리스보다도 싱그러웠다.

“사랑해. 사랑해, 코우시. 네가 내 모든 것이야.”

그러니까, 절대 말없이 사라지지 말아줘. 그것만큼은 바라도 되는 거지? 그 와중에도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눈동자가 처연하고 또 사랑스러워 스가와라는 대답 대신 그에게 입 맞췄다. 다시는 말없이 가지 않을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며 그를 마주 안았다. 디기탈리스의 꽃잎이 둘 사이에서 넘실거렸다.

“사랑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처연하고 애절하고 아름다운, 어느 생일날이었다.

* 2018 Sugawara Koshi's Birthday art collaboration home-page.

Proudly created with Wix.com

  • 트위터 사회 아이콘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