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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스가] 주군이 태어난 날 나는 충(忠)을 버렸다

W. 비꽃비

문을 막고 싶다. 가는 당신의 다리를 끌어안고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다. 나는 언제든, 어디에서는 당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공간 안에 당신이 발을 들이미는 순간, 나는 세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저 공간에서만큼은 당신을 지킬 수 없다. 그럼에도 당신은 가야만 한다. 당신이 들어가면 당신은 다치겠지만 당신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당신을 해치는 일이다. 당신과 나는 저 문 앞에서 가장 무력하다.

 

승광承光 19년 6월 13일, 황태자의 호위무사가 되고 처음으로 황궁에 발을 들였다. 파란 하늘에 조금은 따가울 정도의 햇볕이 내리쬐는 날이었다. 태자궁으로 가는 길에 태자에 대한 소문을 머릿속으로 재차 떠올려보았다. 황제의 미움을 받는 불운의 황태자. 한미한 가문 출신인 내가 그분의 호위무사로 뽑힐 수 있었던 이유가 그 때문인 것도 알았다. 황제는 호시탐탐 태자를 폐위시키고 총애하는 황자를 차기 황제로 세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는 태자에게는 호위무사도 미루고 미루다 오늘에서야 드디어 나를 붙여주었다. 보는 눈이 있으니 태자에게도 호위무사를 붙이긴 해야겠지만 태자가 폐위될 때 같이 버릴 수 있는 패로 나를 정했겠지. 기분이 더러웠다. 황태자의 호위무사로 배정된 순간 이를 바득 갈고는 다짐했다. 두고 봐라. 내가 그분을 천하의 지존으로 세우리라.

호위무사로서 첫 궁의 인상은 의외로 괜찮았다. 화창한 날씨 덕인가. 작은 감상과 함께 궁인의 안내를 따라 태자의 방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인사를 올리고 고개 숙인 나의 머리 위로 미성美聲이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보거라.”

태자의 명령에 고개를 들고 해사한 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당신을 닮은 듯 청량한 이 날씨가 당신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틀린 생각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날은 그의 탄신일이었으니까. 하늘이 내려준 작은 축하이지 않을까.

이런 감상적인 기분은 오랜만이라 낯설었다. 출신을 극복하고 성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렇게 사느라 감상 따위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런 인생을 살아왔다. 그 결과가 폐위될 가능성이 높은 황태자의 호위무사였지만.

“그래. 잘 부탁하마. 오늘은 조금 바쁠 것이다.”

외모와는 다르게 말투는 조금 딱딱하네. 자라온 배경을 생각하면 당연한 건가? 답지 않게 섭섭한 기분으로 황태자의 뒤를 따랐다. 첫날이라 싱숭생숭한가, 아니 큰일을 시작하는 거라 마음이 복잡한가. 그런 고민과 함께.

마침 오늘이 황태자의 탄신일이었기 때문에 이른 시각부터 늦은 시각까지 빽빽한 일정이 주어졌다. 행사에 관해서는 미리 교육받았기 때문에 완벽했다. 태자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욱 완벽했다. 군더더기 없는 모습이었다. 자신을 위한 날이라고는 하나 크게 돋보이지 않았으며 수많은 일정을 실수 없이, 예와 법도에 어긋하지 않게 처리했다. 전형적인 황태자의 모습이었다.

모든 일정을 처리한 늦은 밤, 태자는 나지막이 모든 궁인에게 물러가라 명했다. 숨 돌릴 틈 없는 일정에 곤하실 텐데 궁인들의 시중을 받는 편이 낫지 않나? 그런데 일상적인 일인 듯 물러가는 궁인들의 얼굴은 너무도 담담했다. 흔히 있는 일인가? 그 순간이었다.

“오이카와 맞지? 너 정말 예쁘다! 맘에 들어! 사실 계속 네가 호위무사로 배정되기를 바랐어. 뒷조사를 좀 했거든. 아, 내 이런 모습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되는 건 말 안 해도 알겠지?”

태자가 저런 사람이었나? 이런 푼수 같은 모습은 미리 알아본 그의 성격과 하루 종일 본 그의 모습과 비교하면 전혀 딴판이었다.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지. 온 종일 붙어 다녔으니 다른 사람과 바꿔치기할 틈도 없었다. 애초에 그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이렇게 닮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놀랐지? 얼른 적응하는 게 좋을 거야. 아무도 없을 땐 이런 모습이거든. 대외적인 완벽주의자 모습은 너무 답답하잖아. 네가 두 번째야.”

“예?”

“내 본 모습을 본 사람 말이야. 네가 두 번째라고. 야쿠 모리스케 알지? 걔는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으니까 알고 있어.”

“…….”

그와 나는 초면이었다. 나의 무엇을 믿고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걸까. 이렇게 신중하지 못한 분을 내가 믿어도 될까.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걱정하지 마.”

“예?”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 것 같거든. 그럴 필요 없을 거야. 나중엔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거야.”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던 태자의 눈에 아주 짧은 순간 웃음기가 사라졌다. 압도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뼈저리게 알 것 같았다. 수많은 대련과 싸움 속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압도감이었다. 내가 이 분을 보필해야겠구나. 믿고 내 인생을 걸어 봐도 되겠구나. 내 뜻은 확고해졌다. 그리 결심하자마자 그는 다시 푼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 오늘은 내 인생 최고의 생일이 될 것 같아.”

“그러십니까.”

“응. 너를 만났잖아. 정말 기뻐.”

예쁘다. 태자가 알게 되면 불경하다고 화를 낼 지도 모르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순간 떠오른 생각을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런 푼수 같은 전하라면 오히려 기뻐할지도 모르겠다.

 

몇 달이 지나 무거운 듯 후덥지근한 바람이 선선한 바람으로 바뀌고, 새파란 나뭇잎이 빨갛게 혹은 노랗게 익어갈 즈음 태자 전하의 몸에도 조금씩 물이 들었다. 곱게 포장해서 말해봤지만 멍이 들었다는 의미이다. 황제는 급격히 변해갔다. 무덥던 여름날 배앓이를 크게 하신 이후였다. 눈에 띄게 몸은 쇠약해져 가는데 전하는 여전히 책잡힐 건수를 주지 않으니 조급한 모양이었다. 전하께서 문안인사를 드리고 나오면 옷 속에 멍이 들어 나오는 일이 한 두 건 늘어갔다.

지난 몇 달간 전하와 나는 꽤나 가까워졌다. 사람들 앞에선 칼같이 명령과 복종의 말만 이어졌지만 전하께서 궁인들을 모두 물리고 나면 우리는 벗이 되었다. 전하는 사적인 시간에 호위무사로서 전하를 대하면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며 장난스럽게 경을 쳤다. 나도 그런 전하가 편했기에 태자의 벗이 되는 것에 금세 적응했다. 하루는 새로 자리 잡은 멍 자국을 발견하고는 전하께 핀잔을 드렸다.

“일국의 태자전하의 몸이 그게 무엇입니까.”

“야, 호위무사인 너와 평범한 사람인 내 몸이 같을 리가 있냐.”

“그 말뜻이 아닌 걸 알고계시잖습니까.”

“오이카와 원래 이런 건 모르는 척 해주는 거라고. 태자에게 예의를 지키거라!”

“이럴 때만 태자십니까?”

“그럼!”

나는 뻔뻔한 전하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전하가 저렇게 우기기 시작하면 끝이 나지 않는다. 그간의 경험상 이럴 땐 한 발 물러나는 게 마음 편하다. 물론 나는 그걸 잘 못한다.

“아 그러십니까.”

“그 말투 뭐야? 무엄하도다! 예의를 갖추지 못할까!”

“예예. 하늘같이 높으신 태자전하께 무례를 범하여 송구하옵니, 윽!”

“매를 벌지. 매를 벌어.”

“아으, 아픕니다.”

“호위무사가 돼서 무어가 아프단 말이냐.”

“호위무사도 아픈 건 아픈 겁니다.”

“쯧, 하나뿐인 호위무사가 이리 약해서야.”

억지를 부리는 전하의 눈엔 장난기가 그득했다. 내가 어릴 적엔 딱 저랬었지. 장난치기 좋아하고. 문득 바쁘게 사느라 잊고 살았던 어렸던 오이카와 토오루가 떠올랐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장난에 왜 갑자기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오이카와 무슨 생각해?”

“전하가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린아이라니. 이래봬도 내가 어릴 적엔 얼마나 어른스러웠는데. 내 나이는 거꾸로 가는가봐.”

쓸쓸한 표정. 아주 가끔 전하는 내가 저런 얼굴을 보였다. 전하께서 뱉는 모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프게 다가왔지만 가장 나를 깊이 쑤신 것은 그의 미소였다. 왜 웃으시는 겁니까. 어째서 아프다는 말도 못 뱉으시는 건가요. 처연히 웃는 전하께 나는 쓴 표정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품에 가두었다.

“…뭐하는 거야?”

그는 당황한 듯 물었다. 그러나 벗어나려 하지는 않았다. 나는 조금 안심하며 등을 토닥이고 입을 열었다.

“위로입니다.”

“위로할 게 뭐 있어. 난 괜찮아.”

“어린 당신을 위로하는 겁니다. 어린 스가와라 코우시를요.”

감히 전하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누가 들었다면 역모의 죄를 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하는 죄를 묻기는커녕 더욱 세게 껴안았다. 그 상태로 무릎이 꺾이고 무너졌다. 이 순간에도 혹여 밖에 들릴까 소리죽여 울었다. 태자궁 밖으론 휭-하고 거센 바람소리가 났다. 나는 그 바람소리가 전하의 울음소리를 덮어주기를 바라며 오늘따라 유난히 작아 보이는 전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추억이 아픈 가을이었다.

 

전하는 계절을 닮았다. 가을엔 전하를 단풍에 비유했던가. 겨울이 된 지금, 전하는 잎이 떨어진 앙상한 가시나무였다. 황궁의 냉혹한 바람 앞에 전하의 가지마저 꺾일 것만 같았다. 위태로운 전하가 애처로웠다.

그 시작이 되던 날은 많은 눈이 쏟아지던 날이었다. 막 동이 트던 시각, 폐하께 문안인사를 올리러 가는 전하를 따르는데 하얀 눈이 전하의 솟은 머리에 안착했다. 순간 손을 들어 털어내려 하였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괜히 허리춤에 있는 칼의 존재만 확인했다. 그 눈송이를 시작으로 곧 많은 눈이 쏟아졌다. 그날도 폐하의 처소 안에서는 폐하의 역정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밖에서 기다리고 수많은 궁인들은 마치 눈이 쌓이는 소리 외에는 들리는 것이 없는 듯 보였다. 나는 그 경계에 존재했다. 전하가 있는 저 시끄러운 세계에 들어가서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저 궁인들처럼 들리는 게 없지는 않다. 그래서 괴로웠다. 폭언을 쏟아내는 폐하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것이 안 된다면 전하의 귀라도 막아드리고 싶었다. 허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은 전하가 맞지 않고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아프고 아팠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전하는 맞지 않고 무사히 나온 듯 했다. 대강 눈대중으로 전하의 상태를 파악한 나는 전하를 태자수업이 있는 곳까지 모시고 사가에 나가려했다. 항시 전하 곁에 머물면서 그를 지키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는 하나 불가능했다. 때문에 나는 전하가 업무를 보거나 태자 수업을 듣는 시간이면 사가에 들러 개인적인 일들을 처리하고 돌아오고는 했다. 그러나 갑자기 전하가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

“예.”

“눈이 많이 오는구나.”

“…….”

“오늘은 눈이 와서 위험하니 곁에 있거라.”

“예.”

곁에 있거라. 그 말이 왜 이리 크게 다가오는지 알 수 없었다. 궁인들의 눈을 의식해 전하는 딱 호위무사로서 나를 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채 한 줌도 되지 않을 애정에 나는 속으로 기뻐했다. 그러나 나 또한 전하를 주군으로 대해야 했다. 그 쉽던 일이 어려웠다. 두 글자 이상 뱉으면 내 마음이 새어나올 것 같았다. 나는 비집고 나오는 여러 말들을 애써 삼키고 ‘예’라는 단어만 겨우 뱉었다.

오랜만에 호위무사인 나를 대동하고 들어온 전하의 모습에 태자 전하의 스승들은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수업이 시작되었다. 나는 전하의 공부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졌다. 역시 집중하는 모습은 멋있단 말이야. 장난칠 때는 어린아이가 따로 없는데 이렇게 보면 일국의 태자가 맞긴 하네. 아, 나왔다. 전하가 집중할 때 나오는 버릇.

전하는 무언가에 몰두할 적이면 하얗고 가는 그 손으로 입술을 쓰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전하의 그 버릇이 좋았다. 불경한 생각이나 그 모습을 보면 속으로 그 감촉에 대해 상상해보고는 했다. 그리고는 괜히 내 입술에 손등을 가져다대었다. 지금 내 손등에 닿는 느낌보다 따뜻할지 궁금해하며.

수업이 끝나고 전하의 바로 뒤를 따라 태자궁으로 들어가는데 한기가 느껴졌다. 겨울바람이 가져다주는 한기는 아니었다. 화살이었다. 재빠르게 전하를 등 뒤에 숨기고 서서 화살을 쳐냈다. 머릿속에는 한 단어만 떠올랐다. 암살.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우선 전하의 상태를 파악했다. 어디 상한 곳은 없었다. 게다가 조금 놀란 것 같기는 해도 크게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이 사태에 이 정도의 냉정함이라니. 오히려 나를 놀라게 하는 침착함이었다.

“오이카와.”

“예.”

“내 너를 믿는다.”

“예!”

꼭 내 대답이 신호탄이 된 것 마냥 화살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 화살들을 쳐내며 전하를 구석으로 몰았다. 지금은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내가 그를 지켜야 한다. 그렇기에 등 뒤에 전하 외엔 누구도 있어선 안 되었다. 벽 한 구석에 전하를 가두고 그 앞에 섰다. 이제는 체력의 문제이다. 어차피 내가 다가갈 수는 없다. 지금은 날아오는 화살을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체력이 먼저 떨어지는 쪽이 지는 승부가 시작되었다.

한참을 화살을 쳐낸 결과, 아무리 나라지만 점점 숨이 거칠어졌다.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아 대충 5명 정도 숨어있는 건가. 그렇다면 이제 슬슬 화살이 떨어질 때가 되었을 텐데. 이대로 화살세례가 계속 이어지면 위험하다. 지금도 정신력을 끌어 모아 겨우 움직이고 있었다. 몸이 고장나 굳어버리기 전에 멈추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내 화살세례가 멎었다.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숨을 고르며 한참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지만 그 무엇도 나오지 않았다. 도망간 걸까. 느껴지는 기척도 없었다. 나는 조심스레 태자전하를 품에 안았다. 평소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위급상황이었다. 전하의 안전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전하를 품에 안고 주변을 살피며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한 시름 놓고 바로 전하부터 살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그래. 없어.”

이제야 이 일이 실감이 난 듯 했다.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허옇게 질려있었다. 눈은 초점도 잃었다.

“전하.”

“…….”

“코우시.”

그제야 전하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전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는 둘 밖에 없어요.”

그 말을 뱉자마자 전하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내 옷자락을 꽉 잡았다. 마치 아기가 엄마의 옷을 꽉 쥐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는 내 품으로 쓰러지듯 안겼다. 나는 그런 전하의 등을 토닥이며 떨림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생각보다 빨리 전하는 침착함을 찾았다. 떨림이 진정되자 전하를 홱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야, 너 아까 내 이름 막 불렀지.”

“그럴 리가요-.”

“거짓말 할래? 내가 아까 다 들었는데. 이게 전에도 봐주니까 황태자의 이름을 옆집 개 마냥 부르네.”

“제가 언제 옆집 개처럼 불렀습니까. 그리고 어쨌든 덕분에 진정이 됐지 않습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악!”

나는 결국 전하께 정강이를 걷어차이고 말았다. 그렇게 훈훈하게 마무리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뜩이나 마른 전하는 그날이후로 급격히 말라갔다. 밥에는 독이 있을까 무서워 먹는둥 마는둥 하고 밤에는 자객이 올까 두려워 선잠을 잤다. 이런 생활을 얼마나 더 지속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전하가 버텨낼 수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내 영양분을 드리고 내 잠도 드리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왔다. 가혹했던 동장군은 이미 떠나 하나 둘 꽃이 피어나고 있었지만 전하의 삶에는 아직 봄볕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겨울바람보다 더 매서운 꽃샘추위의 시작이었다. 운명은 그렇게 꽃이 될 전하를 시샘하여 전하를 괴롭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며 공기를 얼린 듯한 어느 날이었다. 멀리서 궁인 하나가 쿵쿵 뛰어들어오는 듯한 소리가 났다. 평소와 다름없이 또 실없는 장난을 치고 있던 나는 그 소리에 급하게 전하와 떨어져 어색하게 서있었다. 곧 궁인 하나가 다급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야쿠 모리스케님이 잡혀 들어갔다고 합니다!”

“……뭐?”

“야쿠 모리스케님이…….”

“대체 무슨 일로!”

그렇게 화를 내는 전하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나조차 놀랐는데 어린 궁인은 오죽하겠는가. 그녀는 뚝뚝 눈물을 떨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반역을… 도모하셨다는 죄목으로…….”

“반역이라니!”

전하는 흥분한 채로 처소 밖으로 뛰어나가려 했다. 머리는 복잡했지만 나는 우선 뛰어가서 전하를 막았다.

“기다리십시오.”

“비켜.”

“이렇게 가서는 안 됩니다.”

“야쿠가 잡혀있어.”

“그래도 안 됩니다.”

“야쿠가 잡혀있다니까!”

“전하도 위험해집니다!”

“…….”

“지금 찾아가는 것은 저들이 바라는 바일 겁니다. 그리고 그건 야쿠 모리스케님이 바라는 바가 아니겠지요. 지금은 다른 대책을 강구해야합니다. 제가 아는 전하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까.”

다행히도 전하는 다시 처소 안에 들어와 눈을 감고 생각에 골몰했다. 나는 이제 그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숨소리마저 전하께 닿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곧 뛰어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우카이 케이신. 조정의 요직에 앉아있는 자였다. 그가 전하의 사람이었던 것인가. 급히 들어온 그는 말할 시간도 아까운 듯 눈빛으로 나를 가리켰고 전하는 그 의미를 알아채고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들으신 것 같군요.”

“그래.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야쿠를 꺼내올 방법이 없는가?”

“애석하게도 없습니다. 저들이 아주 작정하고 함정을 팠어요. 지금 잘못 나섰다간 다들 개죽음입니다. 다들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봤지만 방법이 없어요. 그를 포기해야합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내 벗일세! 나더러 어찌 벗을 버리라고 할 수 있는가! 내 그래도 자네들을 믿었거늘…….”

“전하, 지금은 냉정해지셔야 합니다. 잘못하다간 다들 말려들어요. 지금 말려들면 전하까지 위험하다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저희가 약조한 게 있지 않습니까. 전하께 위협이 된다면 지체 말고 서로를 버리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제발 냉정해지십시오.”

벗의 목숨을 구할 수 없는 전하도 울고 벗을 버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우카이 케이신도 결국 눈물을 떨구었다. 지독히도 지독한 침묵 속에 벗과 동료를 잃게 된 자들의 울음소리만이 내려앉았다. 눈물로 가득찬 이 방 안에서 홀로 울 수 없는 나는 주먹만 꽉 쥐며 묘한 죄책감을 견뎌내었다.

야쿠 모리스케님의 처분은 놀라울 만큼 빠르게 이루어졌다.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른 처분이었다. 그만큼 미심쩍은 부분이 많고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처형의 집행 때까지 전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으나 결국 집행 당일 전하는 실신하고 말았다. 다행인지, 전하는 곧 깨어났다. 전하는 깨어나자마자 야쿠 모리스케님의 집행여부에 대해 물었고 나는 전하에게 그가 죽었다는 말을 고해야 했다. 어떻게 고해야 충격을 덜 받을까 고민했지만 전하는 그런 내 짧은 침묵에서 눈치를 채신 것 같았다. 입이 떨어지기도 전에 전하는 ‘그렇군.’하고 담담히 넘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울컥한 나는 차라리 우시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전하가 얼마나 애써 담담한 모습을 꾸미고 있는지 아는 나는 차마 말을 할 수 없어 전하와 같이 목울대를 채운 울음을 삼켰다.

그 후로 전하는 마치 밀랍인형과 같은 모습을 했다. 이건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이라 부르기도 어려워졌다. 그런 전하를 보며 울고 소리도 치고 달래보기도 하고 별 짓을 다 해도 별 반응이 없었다. 하루는 그날도 수라를 들지 않는 전하에게 밥을 먹이려하고 있었다. 입을 열지 않는 전하와 죽을 떠 내민 팔을 내리지 않는 나의 기싸움이 펼쳐졌다. 그렇게 대치한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전하는 한 술 받아먹고는 말을 꺼냈다.

“너는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나는 말없이 한 술 더 떠서 내밀었다. 전하는 이번엔 받아먹지 않고 재차 물어왔다.

“야쿠가 그리 가고 나서 더욱 밝은 미래를 기약하기가 힘들어졌어. 너도 알잖아. 나도 이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고. 또 무슨 사건에 휘말리느니 이렇게 나 혼자 죽는 편이 너의 안위를 위해서도 나을 거야. 너는 똑똑해서 알 텐데 어째서 나를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는 거야?”

“연모하니까! 전하를… 연모하니까…….”

아, 욱해서 결국 저질러 버렸다. 이제 전하의 곁에 남을 수 없겠지. 떠나야겠지. 내가 떠나면 이제 전하는 어떡하지. 전처럼 또 자객이라도 오면 어떡하지. 욱해도 참을걸. 내가 없으면 전하의 안위가 위험해질 텐데.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떠올라서 어지러울 정도였다. 전하의 표정이 보인 것은 그 다음이었다. 저렇게 놀란 표정이라니. 최근 들어 가장 살아있는 표정이었다. 그게 억울했다. 꼭 이렇게 되어야만 그런 모습을 보여주십니까. 원망의 말을 삼키며 전하의 처분을 기다렸다.

“말도 안 돼…….”

“…….”

“난 네가, 내가 태자니까 극진히 모시는 줄 알고……. 어, 그러니까.”

“…천천히 말씀하십시오.”

“미안해. 나는 태자야. 너랑 내가 함께 한다면 함께 파멸을 맞게 되겠지. 그것만은 막고 싶어. 내가 아끼는 사람을 잃는 건 야쿠면 충분하니까.”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태자전하의 호위무사로서 궁에 들어오며 받은 이 허리춤에 매단 칼을 만지작거렸다. 이젠 내놓아야겠지. 칼을 풀어 내려놓으려 하는데 전하의 말이 한 발 빨랐다.

“그래도 내 곁에는 있어줬으면 해. 이기적인 것 알아. 그런데 너마저 없으면 이제 나는 정말 혼자야.”

“…….”

“내 곁에 있으면 위험하니까, 보내줘야지 하고 계속 생각을 했는데 막상 그 말을 꺼낼 틈이 생기니까 엉뚱한 말만 나오네. 그래도 이게 내 진심이야.”

목이 메어왔다. 당연히 쫓겨날 줄 알았다. 경멸만 받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하는 남아달라는 말을 해주었다. 전하를 모시는 것은 내 사명이자 기쁨이었다. 그걸 이어갈 수 있다. 천천히 무릎을 꿇고 전하에게 진심으로 맹세했다.

“저, 오이카와 토오루는 전하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전하의 곁에서 전하를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는 평생을 약속할 수 없는 관계지만, 이로써 충성으로 평생을 함께할 수 있다. 그거면 충분하겠지.

 

그날 이후로 전하는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그 속은 다 알지 못했지만 그리 보였다. 전하가 원래의 모습을 찾고 나서 황제는 이제 대놓고 전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다시 문안인사 때마다 전하가 여기저기 다쳐서 돌아왔다. 맞는 빈도도, 강도도 예전에 비해 심해졌다. 전하가 들어간 폐하의 처소 안에서는 시끄러운 소리가 잔뜩 들렸다. 뺨맞는 소리는 기본으로 물건이 날아다니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당연하게도 여전히 나의 출입은 금지되었다. 두려운 표정의 전하와 함께 안부 인사를 드리러 나설 적이면 나의 무력함에 치가 떨렸다.

그날은 전하의 탄신일이었다. 일 년 전 전하의 탄신일에 전하의 호위무사가 되었으니 우리가 만난 지 일 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그런 감상에 젖을 틈은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제일 첫 일정은 아침문안인사였다. 전하에게도 나에게도 가장 힘든 일정이었다.

유난히 감이 안 좋은 날이었다. 폐하의 처소로 가는 내내 전하를 데리고 도망하고 싶었다. 가면 큰 일이 날 것 같았다. 아닐 거야. 괜한 걱정이야. 그리 위로하며 평소처럼 전하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폐하의 처소에 다가갈수록 느껴지는 이 불안감은 뭘까. 결국 도착하고야 말았다. 전하는 평소처럼 쓰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간다. 문을 막고 싶다. 멀어져가는 전하의 다리를 끌어안고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다. 이성이 그걸 막았다. 나는 결국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전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나에겐 힘이 없었다.

곧이어 언제나처럼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떠올리는 최악의 상황은 아닐 거야. 불안에 떨며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조용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이제 나오는 건가. 그러나 전하는 나오지 않았다. 아냐. 금방 나오겠지. 기다려보자. 하나 둘 머릿속으로 세던 수가 쉰이 되어도 전하는 나오지 않았다. 정적도 그대로였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기는 듯했다. 무언가에 씐 것처럼 나는 안으로 뛰어들었다. 제지하는 궁인들은 전부 베어버렸다. 이 행동으로 내가 어떻게 될 지는 이미 생각할 수 없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건 목이 졸린 전하였다. 끅끅 소리를 내는 전하는 이제 의식이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이미 눈에는 초점이 사라졌고 발버둥칠 힘조차 없는 듯 보였다. 황제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든 나의 등장에 놀란 듯 손에 힘을 풀었다. 전하는 이에 숨을 몰아쉬기 바빴다. 눈물 콧물 침 모두 흘리면서 컥컥거리는 전하를 보니 실낱같이 남은 이성도 끊어져버렸다. 들고 있는 칼로 높이 들어올렸다. 팔 사이로 황제의 겁먹은 표정이 보인 것도 같다. 그 상황에서도 전하의 표정은 차마 확인할 수 없었다. 무의식중에도 나는 전하가 실망할까 두려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직 깔려있는 이부자리에 붉은 얼룩이 생겨있었다. 다른 이들의 피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황제는 피마저 징그럽게 느껴졌다. 그제야 전하를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그렇게 쉬운 일이, 온종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어렵게 느껴졌다. 그러나 전하의 상태는 파악해야했다. 다행히 그 사이에 정신은 차린 것 같았다. 전하는 조금 놀란 듯 보였으나 의외로 나를 무서워하는 기색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리 믿고 싶은 것일지는 모르나 묘한 환희마저 느끼는 듯 보였다. 그러나 지금 그런 걸 따질 시간이 없었다. 전하를 여기서 안전하게 내보내야한다.

“어서 여기를 떠나십시오.”

“…오이카와.”

“이 일은 전하와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저 홀로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어서 도망가십시오.”

“그럴 순 없다.”

“전하!”

“도망가자꾸나. 함께 도망하자. 내 목숨이 다할 때까지 곁에 있어준다며. 둘 다 떠나자. 어차피 지긋지긋한 이 태자생활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부탁이야. 제발.”

그 순간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 병사를 부른 모양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선택지가 없었다. 전하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내달렸다. 다가오는 병사들은 전부 베었다. 아직 병사들이 모이기에 충분하지 않은 시간이라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한시가 급한 이 상황에 혼자 전부 처리하는 것은 버겁긴 했다. 보다 못한 전하는 내가 베어낸 시체에게로 뛰어가 칼을 한 자루 들었다.

“안됩니다!”

“지금 그런 거 따질 새가 어디 있어!”

“다칩니다!”

“어차피 잘못되면 죽음이거든! 이래봬도 검술 배운 몸이라고!”

잊고 있었다. 전하는 의외로 검술에서 발군의 실력을 뽐내었다. 검술 수업을 한 날이면 ‘이러다 내가 오이카와 이기게 되면 어떡하지?’하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게다가 약해진 몸으로 침착하게 평소의 실력을 발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새삼 그가 존경스러웠다. 확실히 전하가 가세하고 나서 훨씬 나아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도 더욱 힘을 내서 칼을 휘둘렀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궐을 벗어나 있었다. 이젠 뒤쫓아 오는 병사들만 따돌리면 된다. 그러나 전하는 지친 모습이었다. 잘 먹지도 못한 몸으로 여기까지 계속 달리며 칼도 휘둘렀으니 당연하겠지. 생각할 틈도 없었다. 나는 바로 전하를 들쳐 업고 달렸다. 전하가 무언가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도 않았다.

저잣거리를 벗어나고 나니 조금 한적한 길이 나왔다. 다행히 이 근처엔 나만 아는 공간이 있다. 어릴 적 홀로 놀다 발견한 곳인데 우거진 수풀이라 숨어 이동하기에 제격이었다. 다만 몸집이 자란 지금, 이곳을 지나려면 생채기를 각오해야했다. 전하가 걱정이 되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말없이 한참 걸어가다 보니 따라오는 이들이 없었다. 추격을 따돌리는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겨우 숨을 좀 돌리고 잠시 전하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디 상한 곳은 없습니까?”

전하는 대답 대신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둘이 있을 때 전하가 웃는 모습을 종종 보기는 하였으나 이렇게 큰 소리 내어 웃는 건 처음이었다. 그동안 못 웃은 걸 한꺼번에 다 웃으려는 듯 전하의 웃음은 끊이질 않았다. 마침 새 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원래 들리던 소리를 이제야 자각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치 전하의 웃음소리를 새들이 가려주려는 듯 보였다. 평소와 같았으면 괜히 핀잔 한 번 건네었을 텐데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마 처음 느껴 볼 자유를 마음껏 만끽하게 해주고 싶었다. 한참을 이어지던 전하의 호쾌한 웃음소리는 이내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전하……?”

“아흐, 이렇게 도망을 가는 것 말이야, 끅, 상상 속에서만 있는 일이었는데, 흐흑, 생각보다 더 기분 좋다. 그, 그래서 갑자기…….”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전하는 지금 어떤 심정일까. 평생을 옥죄어온 속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황제를 죽이고 전하를 모셔 탈출한 내 행동이 과연 맞는 거였는지 여전히 확신은 없다. 그래도 전하의 이 눈물로 의미가 생긴 것 같았다. 아직은 갈 길이 바빴지만 지금은 목청껏 우는 전하를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전하, 이제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우셔도 안 돌아가요.”

전하의 울음이 어느 정도 사그라들자 어색한 상황을 깨려 괜히 장난을 쳤다. 그리고 전하를 일으켜 다시 걸었다. 전하는 방금 울었던 사람 맞나 싶을 정도로 씩씩하게 걸으면서 화를 버럭버럭 내었다.

“또 주둥이 놀리지. 사람이 울면 위로는 못해줄망정 뭐?”

그리고 결국 맞았다.

“아! 전하는 무슨 맨날 때리십니까! 제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데! 그리고 태자 입에서 주둥이가 뭡니까 주둥이가!”

이쯤이면 바로 전하의 짜증이 날아들어야 하는데 짜증은커녕 침묵만 맴돌았다. 왜 짜증을 내지 않는 거지? 슬쩍 전하를 돌아보니 이미 표정에 장난기는 사라지고 진지한 표정만이 남아있었다.

“나 이제 태자 아니야. 나 조금 전에 황태자 때려쳤잖아. 이제 전하 아니지 뭐.”

“아……. 그럼 스가와라님?”

“아! 스가와라님이 뭐야! 낯간지러워!”

“그럼 코우시.”

“…넌 스가와라님 다음이 바로 코우시냐? 전에 이름 막 부를 때부터 알아봐야했는데.”

“그럼 그 사이에 뭐가 있는데?”

“얼씨구, 바로 반말까지?”

“이걸 원한 거 아니야?”

사람이 과감해질 수 있는 날이 따로 있는 걸까. 나 또한 오랜만에 느끼는 자유 때문에 자제력을 잃은 것일까. 투덜거리느라 튀어나온 코우시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짧게 입맞춤을 하고 떨어지자 코우시는 바로 세모눈을 하고 말을 했다.

“오늘 진도 다 나갈 기세다?”

“그럴까?”

모르겠다. 이제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그래서 아예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고백도 안하고?”

“좋아해.”

“토오루 너무 멋없네.”

이제 코우시가 더 이상 황태자가 아니듯 나도 더 이상 그의 호위무사가 아니다. 태자를 천하의 지존으로 세우고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못하게 하겠다던 내 결심은 내 손으로 부수어버렸다. 태자는 이제 이름 없는 누군가로 평생을 살아갈 것이다. 역사에도 도망친 태자 정도로만 기록되겠지. 나 또한 정치 실권은 고사하고 이전처럼 살아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스가와라 코우시와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달콤했다. 그 사실 외에 중요한 건 없었다. 아니, 하나 있었다. 생일 축하. 문득 오늘이 그의 생일이었다는 사실이 다시 떠올랐다.

“생일 축하해, 스가와라 코우시.”

코우시의 표정을 보니 정신없는 통에 본인 생일마저 잊어버린 것 같았다. 다시 차오르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는 것도 같았다. 나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그는 조금쯤 떨리는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해주었다.

“고마워. 그새 잊어버렸네. 내 이름이 담긴 생일 축하는 처음 들어봐. 이거 기분 묘하다. 오늘은 내 인생 최고의 생일이야. 오늘 내 인생이 완전 뒤바뀌었는데 이상하게 무섭거나 기분이 나쁘지 않아. 네가 있어서 그런가봐. 작년에 너를 만나서 작년이 최고의 생일인줄 알았는데, 살다보니까 그날보다도 더 좋은 날이 오네.”

“이번 생일 선물은 내 사랑인데 당연히 더 행복하지!”

역설적이게도 주군으로 모시던 그가 태어난 오늘 나는 충심(忠心)을 버렸다. 대신 연심(戀心)을 바쳤다.

* 2018 Sugawara Koshi's Birthday art collaboration home-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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