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이스가] 스물다섯째 저주
W. 칸나
上 백과 흑 그리고 적
白
사와무라 다이치는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한다. 지하철에는 종종 낯익은 얼굴이 있다. 비슷한 시간대에 비슷한 곳을 오가는 사람들이 마주칠 확률은 그리 적지 않다. 그 중 유독 눈에 띄는 이도 있다. 말간 얼굴로 핸드폰과 발끝과 사람들을 마주하는 남자. 사와무라는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입은 티셔츠가 언제 어디서 산 것인지, 그의 손목시계는 얼마나 오래 착용한 것인지도, 정수리의 가마는 어느 방향으로 돌아나가는지,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사와무라는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간다. 인기척에 남자는 고개를 들지만 전화가 울려 금방 사와무라에게서 시선을 뗀다.
“나쁘지 않아요. 작년보다 나은 것 같아요.”
사와무라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다. 어떤 노래도 듣지 않고 누가 들을까 속삭이는 목소리를 훔쳐듣고 있다.
“근데 혹시 다이치라고 아세요?”
그는 의지 없는 시선을 사와무라의 발등에 올려놓고 말한다.
“아니요. 전구회사 이름 말고요. 사와무라 다이치.”
사와무라는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본다. 그는 역에서 내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사와무라의 시간은 멈춘다. 남자는 뒤돌아보지 않고 열리는 문틈으로 사라졌다. 사와무라는 그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감은 눈 위를 꾹 눌렀다. 스가와라 코우시. 오늘도 그 이름을 잊을 수 없다.
사와무라는 자신의 집 앞에 푸릇한 잎으로 울창한 나무를 본다. 나무는 매년 새로운 벚꽃을 피운다. 한창이던 벚꽃은 언제인지 모르게 후드득 져버리고 집 앞 아스팔트 바닥은 버찌 열매로 난장이 되었다. 사와무라는 떨어진 이파리를 신발코로 짓이긴다. 짓이겨지는 것은 꽃잎뿐 아니다.
“내가 살았던 동네엔 복사꽃 나무가 많았대.”
“복숭아?”
“응. 복숭아 꽃가지가 잡귀를 쫓아주거든.”
스가와라가 살았던 동네는 미야기 현을 가르는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여섯 살부터 열다섯 살. 아홉 해를 보내고 시내로 내려 온 스가와라는 그다지 높지 않은 건물들을 보고서도 고개를 빼들며 혼을 빼놓고 서있기 일쑤였다. 사와무라가 사는 빌라 앞에서도, 이 집에 드나드는 오 년 남짓 내내 그랬다.
가끔 스가와라는 서랍 속에도 있고, 가구 아래에도 있고, 식탁 위 유리 틈에도 있었다. 하잘 것 없는 양말, 명함, 사진이었지만 사와무라는 그 모든 것들에 스가와라의 영혼이 실려 있다고 믿었다.
“다이치는 귀신의 존재를 믿어?”
“어렸을 때 한 번 본 적 있어.”
스가와라는 의외의 대답이라는 듯 고개를 모로 틀고 눈을 빛냈다.
“기억은 안 나. 어렸을 때 어머니랑 신사에 갔다가 근처에서 할아버지를 뵀어. 나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는데.”
“다이치를 참 많이 좋아하셨나보다.”
사와무라는 후일에 그 말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죽은 자가 산 자를 찾아오는 이유를 어느 누가 그리 쉽게 단정할 수 있을까. 스가와라의 비밀을 알고서 모든 것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 걸까. 그러나 그 대화는 이미 스가와라의 기억엔 존재하지 않을 터라 어디에도 답을 구할 수 없었다.
명확한 것은 미야기보다 낙후된 시골에서 온 소년을 사와무라는 사랑했다.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아이의 머리칼이 유독 바람에 잘게 흔들렸고, 그 아이 앞에만 서면 숨을 더 오래토록 길게 내뱉도록 의식해야 했다. 그 아이와 함께하면 하굣길은 터무니없이 짧아졌고, 새벽은 오래토록 환해 꿈자리가 사나웠다.
“좋아해. 정말 많이.”
“…….”
“그러니까 내말은, 사귀고 싶어.”
사와무라는 스가와라의 멀건 표정에 그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스가와라는 제 손가락을 만지작대며 하늘을 올려다봤다가 운동장 흙을 한번 걷어찼다가, 웃었다가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사와무라는 지금도 그 순간만 회상하면 속이 조여 왔다.
“만나지 말자.”
스가와라는 울고 있었다.
“내 생일 때까지.”
“어째서?”
“그 때도 네가 나한테 같은 마음이면…, 그 때 얘기해 줘.”
스가와라는 얼굴이 푹 젖을 때까지 울면서도 눈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사와무라는 눈물을 흘릴 때마다 그와 비슷한 표정을 지어보려 애썼지만 번번이 손바닥에 얼굴을 묻어야 했다. 그의 생일까지는 열흘이 남아 있었다.
黑
스가와라는 메모에 적힌 주소를 보고 고개를 쳐들어 높다란 건물을 올려다본다. 그 아래 휘갈기듯 쓴 ‘오이카와 토오루’ 이름을 입 속으로 중얼거려보고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에 안도한다.
태어날 당시의 순간을 기억한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스가와라는 찰나의 빛이 지나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지던 어둠을 기억했다. 뭉근하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온몸을 휘감았다. 갓 태어난 아기가 의식을 말로 표현할 수 있었다면 스가와라는 ‘혹시 내가 잘못 태어났느냐’고 물었을 것이다.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겠지만.
스가와라의 엄마는 스가와라를 낳고 사흘이 지나 죽었다. 그녀는 스가와라가 볼 수도 없는 신에게 치성을 드리느라 그를 품에 안아보지도 않았다. 스가와라의 머리맡에 ‘오이카와 토오루’라고 쓰인 부적만을 새로 갈아 붙일 뿐이었다.
“언제는 명까지 갈아 파내고 내 얼굴은 보지도 않을 거라더니.”
“제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귀신이나, 사람이나.”
“그 쪽도 귀신이잖아요.”
“나는 신이고, 걘 잡귀신이고.”
오이카와는 사무실 구석에서 난초를 가꾸고 있다. 옹송그렸던 몸을 일으키자 생각보다 몸집이 크다. 스가와라는 허접한 사무실 모양새에 감추고 있는 비밀을 안다. 흥신소 사무실 구석에 놓인 액자들에 봉해진 귀신의 수가 어림잡아도 몇 십은 될 테다. 오이카와는 한참 혼잣말하더니 소파에 앉은 스가와라 앞에 스물다섯 번째 명함을 놓는다. 스가와라는 별 반응 없이 그의 명함을 지갑 안에 넣는다.
“제가 말했던 이름은 아는 사람이에요?”
“사와무라 다이치? 전구회사 이름이라니까.”
“알려주면 안 되는 거군요.”
“네 어머니가 널 어떻게 살렸는지 생각해보면 나는 막 손이 저려. 내가 말했지? 아니, 기억 못하겠구나. 그 무녀, 뱃속에 애가 생기는 족족 죽임을 당했거든. 누구한테? 귀신한테.”
“그래서요?”
“네가 다섯 번째였어. 나는 그 신당 막내 동자였는데 그 무녀가 드린 치성으로 수호신이 되었단 말씀이야. 너를 위한 수호신.”
오이카와는 은색 철제 핀케이스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스가와라가 손에 쥔 지갑을 펼쳐 다른 명함을 꺼낸다. 주머니에서 지포라이터를 꺼내 명함 끄트머리에 불을 붙이고 담배 끝에 갖다 댄다. 실내는 순식간에 희뿌연 연기로 그득해진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푹 숙인다.
“기억도 못 지키면서 수호신 자격이 있냐고? 내가 이 얘기는 정말 입 아프게 많이 얘기했는데…”
“아뇨. 그게 아니라요.”
스가와라는 어느새 자신의 주위에만 몰려든 연기를 손으로 헤집었다.
“굳이 내가 그렇게 수호신까지 두고 살아야 할 존재인가 싶어서요.”
오이카와는 담배를 깊게 들이쉬다 꺽꺽 웃었다.
“스물세 번째 명함을 받으러 왔을 때는 너,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랬어.”
“왜 그랬을까요, 제가.”
“전구가 왜 이래. 자꾸 깜박이네.”
스가와라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전구 아래에 적힌 ‘다이치’ 세 글자를 보고 오이카와를 마주본다. 깜박이던 전구는 완전히 꺼져버린다.
“아무리 뒤져도 그 사람에 관한 메모는 없었는데.”
“…….”
“찾으면 안 되는 거라서 제가 다 지워버린 걸까요?”
오이카와는 끝내 대답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초에 불을 켠다. 뭉근한 액체가 스가와라의 머리칼을 저민다. 스가와라의 정신이 점점 아득해진다.
白
‘오늘 새벽 1시에 마을 입구에서 만나. 기다리진 않을 거야.’
사와무라는 책상 위에 놓인 쪽지를 펴 보고 스가와라 쪽으로 돌아보았다. 스가와라는 사와무라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를 보지 않았다. 사와무라는 손목시계 알람을 맞췄다.
사와무라는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하고 싶은 말이 정돈되지 않았다. 열흘의 공백이 마음을 더욱 달싹이게 만들었다. 스가와라는 그동안 흔한 눈맞춤조차도 허락해주지 않았으니까. 말은 정돈되지 않은 채로 입 안을 두드렸다.
삐삑, 삐삑, 새벽을 가르는 알람 소리를 듣고 사와무라는 번뜩 눈을 떴다. 열두 시 오십 분. 잠이 들 줄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집에서 마을 입구까지는 곧장 뛰어나가도 십오 분은 족히 걸렸다. 게다가 사와무라의 부모가 안방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허락을 받지 않고 나가도 좋을까. 조심스럽게 안방 문을 열었다. 나직이 목소리를 내어 그들을 깨우려고 했지만 두 사람 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시 나갔다 올게요. 사와무라는 작게 읊조리고 무릎을 세워 일어났다. 사와무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새벽에 몰래 집을 나섰다.
전속력으로 뛰어 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입구 어디에도 스가와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 시 칠 분. 정말 기다리지 않은 걸까. 아님 애초부터 이곳에 오지 않았던 걸까. 사와무라는 헉헉 대는 숨을 몰아쉬며 사방을 살폈다. 가로등도 점멸하는 시간이었다. 사와무라는 털썩 시멘트 길 위에 주저앉았다. 이마에 난 땀을 닦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생일 축하해. 제일 먼저 말해주고 싶었는데. 서투른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올해 가장 처음으로 생일을 축하해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는데. 다 글렀다고 생각했다.
사와무라는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손을 탈탈 털려고 보니 손끝에 가느다란 실이 딸려 올라와 있었다. 언뜻 보면 붉은 색 같기도 하고 눈살을 찌푸려 집중하고 보면 초록색 같기도 했다. 실은 저 멀리 산 쪽으로 쭉 뻗어있었다. 사와무라는 실을 잡아 당겼다. 끝도 없이 딸려 나오는 실이 어느새 팔에 감겼다. 천천히 실을 잡아당기며 산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평소와 같았으면 어림없을 일이었다. 이 새벽 산중에 혼자 그 흔한 손전등도 없이 줄 하나에 의지해 산행이라니. 사와무라는 이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자각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걸었다. 손에 잡고 있는 줄 끝에 스가와라가 있을 것 같았다. 운명의 실. 그런 시답잖은 것을 믿어보려고 애썼던가.
얼마나 걸었을까. 미야기에 이렇게 험한 산길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불빛 하나 없는 나무 사이를 헤치고 걸었다. 다행히도 실은 끊어지지 않고 사와무라를 인도해주었다. 한참 외로운 걸음이 계속 됐다. 사와무라에게서 얼마간 떨어진 곳에 불빛이 보였다. 거리는 가늠이 되지 않았고, 사와무라는 빛을 향해 침착하게 발을 뻗었다.
“아, 차가워!”
사와무라는 자신이 작은 도랑 안으로 들어왔음을 느꼈다.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는 바람에 놀라 잡고 있던 실을 놓쳤다. 한참 걸어오는 동안 품에 차고 남을 만큼 큼직한 실타래는 금세 사라지고 없었다. 사와무라는 쪼그려 앉아 도랑을 헤집으며 실을 찾으려고 해봤지만 손 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순간 사와무라의 발밑이 푹 꺼졌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자신의 코와 입을 막는 것이 물인지 진흙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 사와무라는 알 수 없었다. 죽어가고 있다. 분명한 건 그뿐이었다.
물소리가 났다.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 웃음소리 같기도 하고, 촤르륵 세차게 물살을 가르는 소리. 표면 위를 도르륵 흐르는 소리. 물 듣는 소리. 그리고 깊은 숨. 스가와라의 향기. 사와무라는 눈을 떴다. 말갛게 젖은 얼굴이 물빛에 파리하게 빛났다. 거친 호흡이 사와무라의 콧잔등을 간질였다.
“새벽에 함부로 물가에 다니면 안 돼. 특히나 너 같이 양기가 센 남자는 물귀신이 좋아죽는다고.”
사와무라는 목소리를 내려하다 옆으로 몸을 돌려 물을 토해냈다.
“어쩌다 이 새벽에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실.”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 기침만 하던 사와무라는 숨을 깊이 몰아쉬며 허리를 세워 앉았다.
“실이라면…….”
스가와라는 자신의 옷소매를 들어보였다. 작은 실오라기가 풀려있었다. 붉은 빛 같기도 하고 초록빛 같기도 한 그 실.
“늦어서 미안해. 코우시.”
스가와라는 사와무라를 보고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잔뜩 물을 먹은 속눈썹이 더욱 느리게 움직였다.
“대답을 들으러 왔어.”
스가와라는 손을 뻗어 사와무라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스가와라는 먼저 성큼성큼 다시 산길로 발을 들였다.
“……늦었어. 데려다 줄게.”
“코우시.”
“네가 듣고 싶은 대답은 이제 내가 해줄 수가 없어. 그러니까……,”
사와무라는 찰박찰박 물소리를 내며 다가가 스가와라를 돌려세웠다.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근데 그렇게 등 돌리고 서서 내가 모르는 얼굴로 얘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스가와라는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고 아무 말도 없었다. 스가와라는 마을로 돌아오는 길 끝에서도 사와무라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았다. 사와무라는 그것이 못내 견디기 힘들었다. 바람에 스가와라의 옷소매만 잘게 흔들릴 뿐이었다.
黑
집은 아주 잘 정돈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일 년 마다 한 번씩 물건들을 모조리 잘 보이는 곳에 한 눈에 들어오도록 재배열해두어야 한다. 있던 것을 새로 사지 않고, 없는 것을 있었다고 착각하지 않기 위해서다. 내년 생일 전에는 그냥 전부 버려버릴까 생각하다 관둔다. 매년 버리는 물건을 처리하는 비용만 어마어마할 테다. 인간에게 없는 추억이 사물에게라도 깃들 수 있도록 남겨두자. 예전의 스가와라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 이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이 의식의 흐름 모두 언젠가 한번은 거쳐 온 과정이겠지. 스가와라는 안도하면서 슬프다. 슬프다는 감정은 오늘이 처음이다. 기억하는 선에서는.
집 구경을 하는 데만 일주일이 지나간다. 주변 환경은 몸이 기억하고 있고, 주변 인물들에 대해서는 손수 써놓은 메모들을 모아 분류해둔 것을 찬찬히 읽어본다. 구체적인 묘사가 없는 메모를 읽기만 해도 그들에 대한 정보는 체화된다. 내 영혼은 기억하지 못해도 이 육신에 아로새겨져 있으니까. ‘사와무라 다이치’ 메모들 사이에 그 이름은 없다.
스가와라는 커피를 내리며 다시 그 이름에 대해서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은 없다. 그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스가와라는 옷소매를 걷는다. 검은 피딱지가 손목 아래에서 팔꿈치까지 이어진다. 스물넷의 스가와라는 얼마나 미친놈이어서 제 팔뚝에 사람 이름을 칼로 아로새겨놓는 것인가. 잘못 읽은 것일까? 사(さ)가 아니라 키(き)였다든가 뭐 그런 거. 얇은 커터칼로 새긴 글씨라 오해는 턱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잘못 읽고 싶다. 사와무라, 그는 어떤 사람이기에 스가와라의 피부 아래에 새겨진 걸까. 말라붙은 피딱지가 섬뜩하다. 스가와라는 팔에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을 쓸어내린다.
- 토비오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 방문하려고요.
그리고 곧장 벨이 울린다.
- 오 초 전에 벨을 눌렀어요.
스가와라는 메모에서 토비오라는 이름을 꺼내든다. 덜컥 모르는 이를 집안에 들이니 자연스럽게 오이카와의 얼굴이 떠오른다. 수호신이라고 했으니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구제가 되려나. 꽤 몇 년 간은 이런 안일한 생각으로 살아온 것 같기도 하다.
“제가 지금 집이 아니라서.”
기억귀가 남기고 간 것은 잔머리였을까. 스가와라는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카게야마 토비오. 스가와라의 문하생이다. 책장을 보고 스가와라는 자신이 작가임을 짐작하긴 했지만 문하생까지 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 수호신이 태운 명함에 쓰인 이름들을 조금 더 자세히 보았어야 했다. 그 사이에 생전 유명세를 떨친 문인들의 이름이 올라 있을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작년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스가와라가 스물다섯의 나이에 장편만 네 권을 냈을 리가 없다. 스가와라 머릿속엔 그 책들의 내용 한 자도 들어있지 않다.
- 기억귀는 같은 맛을 제일 싫어해. 책을 읽어야 매년 맛이 다른 기억을 가져가지.
“아니. 그렇다고 무슨 작가를 시켜. 그냥 많이 읽으라고 하면 되잖아요.”
- 내가 시켰어? 네가 시켜서 할 애야?
“정 그러면 그럼 좀 짧게 쓰라고 하든가.”
- 난 뭐 안 그런 줄 알아? 네가 짧게 쓴다고 하다가 늘 장편만 내놓는 바람에…….
“기억 안 나요.”
- 유월이 지옥이야. 그 놈의 기억 안 나요. 이 달 내내 그런다고.
“끊습니다.”
스가와라는 전화를 끊자마자 울리는 전화를 실수로 이어 받는다.
- 선생님.
“당장 급한 일 없으면 나중에……”
- 사와무라 씨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다음에요.”
- 저를 찾아오셔서 지금껏 드렸던 책을 다 돌려주고 가셨어요.
“그 얘길 왜 저한테 하죠?”
- 선생님은 아니라고 하셨지만 저는 다 알고 있었어요. 사와무라 씨가 선생님…
스가와라는 전화를 끊고, 터덜터덜 걸어 침대 위에 눕는다. 팔을 눈으로 가리고 입술을 살짝 깨문다.
스가와라는 알고 있다. 사와무라가 자신의 연인이었다는 것을. 다만 타인에 의해 알아차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사랑했을 그 이의 얼굴을 기억해낼 자신이 없다. 그가 어떤 말과 표정을 가진 사람인지 스가와라 속에서 끄집어 낼 게 없다. 오이카와도, 사라진 메모들도, 팔뚝에 새겨진 생채기도 단 하나의 뜻을 경고하고 있다. 그를 찾아선 안 된다. 이것은 필시 사와무라 다이치가 스가와라를 떠났다는 뜻이니까. 그것도 아주 아프게. 버려진 스가와라는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영영 그를 모르고 이별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만난 적이 없으니 헤어질 수도 없다고. 그렇게 다짐하는 동안 입술을 깨문 자리에는 피가 들어찼다.
白
그 날 이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스가와라는 여전히 사와무라의 시선을 피했다. 스가와라의 생일 이후로 쭉 비가 내렸다. 조금 이른 장마였다. 스가와라가 교정에서 잘 펴지지 않는 우산을 들고 낑낑거리고 서 있을 때 기다렸단 듯 사와무라가 우산을 쓰고 다가서도, 스가와라는 사와무라를 보지도 않고 빗속으로 사라졌다. 사와무라는 그 이상 그에게 다가서지 않았다. 조금만 더 다가서면 영영 사라져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 무렵 학교에서도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스가와라가 매일 아침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산에서 내려온다느니, 무당의 자식이라니, 귀신이 들렸다느니……. 스가와라가 지나가면 쑥덕대는 아이들이 늘었지만 그 누구도 직접 스가와라에게 소문의 진상을 물어보는 이는 없었다. 특이한 회색빛 머리칼과 맑은 눈동자, 희디 흰 피부. 그를 마주보고 있으면 소문보다 더한 것이 기정사실화되었다. 사와무라 학급의 모든 이들은 스가와라를 두려워했다. 정확히는 스가와라의 설명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이 두려웠다. 사와무라마저도.
뜬구름처럼 떠도는 소문이 맥을 잃을 즈음 사건이 터졌다. 야마모토가 실수로 스가와라의 사물함을 열었다. 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함들을 헛갈린 것이었다. 문제는 거기서 부터였다. 야마모토는 스가와라 사물함 안에 놓인 붉은 종이에 시선을 뺏겼다.
“오이카와 토오루?”
야마모토는 이내 그것을 집어 들고 검게 적힌 글씨를 읽었다.
“안 돼!”
야마모토 앞으로 스가와라가 갑자기 끼어들었고, 사물함 안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한적한 오후 정말이지 난데없는 일이었다. 교실 안 모두들 눈을 의심할 새 없이 교실은 금방 물바다가 되었다. 아이들은 경악하며 복도로 몰려나갔다.
“너네 다 선생님을 놀리는 거니? 반장, 네가 말해봐.”
사태파악을 하려는 선생 앞에서 사와무라라고 달리 진술할 도리는 없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푹 숙이고 선생이 묻는 말에도 제대로 답하지 않았다. 사와무라는 축축하게 젖은 스가와라의 운동화를 보았다.
“이거 신어.”
사와무라는 자신이 신던 검은색 슬리퍼를 스가와라 앞에 나란히 놓았다. 스가와라는 아이들이 모두 하교한 후에도 자리에 남아 양말을 손으로 꾹꾹 짜내고 있었다.
“괜찮아.”
“……물귀신 짓인 거지?”
스가와라는 손에 들고 있던 양말을 떨어뜨렸다. 사와무라는 떨어진 양말을 주워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 때도 얘기했잖아. 나 같은 남자를 물귀신이 좋아한다고. 이런 말 우습지만 야마모토도 같은 과니까.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했어.”
사와무라는 저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스가와라가 가버릴 것 같았다. 사와무라는 용기를 내 스가와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가와라는 사와무라가 놓아둔 슬리퍼에 발을 끼웠다.
스가와라는 사와무라의 슬리퍼를 질질 끌고 교문을 나섰다. 사와무라는 그 걸음에 뒤처지지도 앞서지도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학교 뒤편 호수에서 빠져죽은 귀신이야.”
“호수? 우리 학교에 호수가 있어?”
“물론 지금은 시멘트로 메워버렸지만. 대입시험 치르고 자살했는데 호수가 사라지니까 학교를 떠돌기 시작했나봐. 아는 분이 그걸 내 사물함에 잡아둔 거야.”
“왜 굳이?”
“대학 못 가고 죽은 게 억울해서 누구라도 데려가려고 하니까. 가만 두면 매년 하나씩 죽어나갈 걸.”
“왜 그걸 네 사물함에…….”
“…….”
스가와라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슬리퍼를 벗어 사와무라 앞에 놓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고마웠어. 내가 한 말은 잊어버려. 그 편이 좋을 거야.”
스가와라는 맨발로 아스팔트 위를 걸어갔다. 사와무라는 맹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다 슬리퍼를 주워 그의 뒤를 따랐다.
“발 다쳐.”
“괜찮아. 안 다쳐. 다쳐도 아물겠지.”
“이거 신어.”
“신경 쓰지 말고 가라니까.”
그 때 스가와라의 발이 붕 떴다. 사와무라가 스가와라를 그대로 안아들고 바닥에 놓은 슬리퍼에 스가와라의 발을 맞춰 끼워 넣으려 시도했다. 스가와라는 놀라 발버둥 쳤고, 사와무라는 엉덩방아를 찧고 나동그라졌다.
“너 뭐야?”
“아니, 너 발 다치니까… 미안해.”
사와무라는 땅에 찧은 부위가 아픈지 연신 엉덩이를 손으로 문질렀다. 슬리퍼는 스가와라의 발에 채여 담벼락 앞까지 밀려 떨어졌고, 스가와라는 사와무라의 무르팍에 앉은 채로 바닥에 누운 사와무라를 내려다보았다. 푸흐. 스가와라가 웃었다. 한번 터진 웃음은 꽤 오래 멈추지 않았다.
사와무라는 깔깔 웃는 스가와라가 야속했다. 대답을 해주겠다던 스가와라는, 열흘을 기다리라던 스가와라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듯 사와무라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오늘은 조금 마음을 열어주나 싶더니 맨발로 성큼성큼 멀어졌다. 붙들겠다고 그를 잡아채 들었다가 엉덩방아 신세로 비웃음을 당했다. 일련의 행동들이 머릿속에서 무한히 되감기되어 수치스러웠다. 웃음이 멎은 스가와라는 사와무라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물었다.
“너 이름이 뭐였지?”
스가와라는 사와무라의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했다. 스가와라의 질문은 사와무라에게 다른 겉모습을 하고 다가왔다.
‘너는 어째서 이토록 나를 사랑하는 거야?’
스가와라 코우시이기 때문에. 사와무라 다이치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었다. 무한한 질문을 연속해도 할 수 있는 답은 그뿐이었다.
“사와무라 다이치. 다이치라고 불러.”
사와무라는 스가와라가 잡은 손을 꼭 그러쥐었다.
黑
으레 매년 칠월이 그러했듯 스가와라는 집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글은 한 자도 쓰지 못했다. 그 동안 쓴 책을 독파하고, 인간관계에 대한 메모를 숙지해야 했다. 오이카와는 그동안 하나의 몸에 들어 있는 게 질린다고 산 사람의 몸을 여덟 번이나 옮겨 다녔고, 결국 다시 난초 그득한 사무실에서 만났던 그 남자의 몸으로 되돌아왔다.
“그 사람 배구선수라고 했죠?”
“응. 촉망받는 배구선수지. 나이도 너랑 비슷하고.”
“그럼 얼른 보내줘요. 선수 생명 아깝게.”
“그러려고 했지. 근데 얘 같은 애가 없어. 좀만 더 이따가 제대로 된 놈 찾으면 내가 얘 인생 죽을 때까지 탄탄대로로 이어주고 가면 되지.”
“벌 받아요. 진짜.”
“난 수호신이라서 그런 거 안 받아요.”
좋겠다. 스가와라는 영혼 없이 읊조린다. 아니, 그런 표현은 무의미하다. 스가와라는 스스로 영혼이 없다고 믿었다. 무수한 과거의 메모들을 읽어도 그 어떤 동요도 없다. 유년시절의 사진은 낯선 이로 가득하다. 그것도 스스로의 얼굴이 제일 낯설다는 게 좀처럼 견디기 힘들다. 낯설다는 감각도 적응이 되는 날이 오나. 그건 그것대로 슬플 것 같다. 스가와라는 영혼 없이 365일을 꾸역꾸역 채워가기만 하는 기계가 된 기분이다. 숨이 턱턱 막힌다. 막고 싶다.
“네가 자살을 하면 너는 영원히 이승을 떠돌게 돼. 그 말은 뭐다? 기억귀가 영원히 너를 쫓아다니면서 네 기억을 쪽쪽 빨아먹겠지. 그 때는 죽지도 못하는데.”
“잘 알겠으니까 그만 좀 해요. 자살 안 할 테니까.”
“코우시. 기억은 지워져도 지워지지 않는 게 있어.”
“그게 뭔데요?”
“이건 내가 요긴하게 써먹을 데가 있어서 말 안 해줄래.”
“진짜 한 대 때릴까보다.”
“이 친구가 너한테 맞아줄 것 같아? 이 덩치로?”
오이카와는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스가와라도 허탈함을 어쩌지 못하고 따라 웃었다. 스가와라는 책상 위에 잔뜩 쌓아둔 자신의 책들로 시선을 옮겼다.
“제가 왜 소설을 썼는지 알겠어요.”
“왜 썼는데?”
“작년의 제가 똑같이 대답했을 걸요.”
“올해의 스가와라가 말해봐.”
“추억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요. 그런 척이라도 할 수 있어서.”
스가와라는 영영 그런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네 권의 책들을 쓴 스가와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추억이 없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고독한지 알았고, 그래서 썼을 것이다. 긴요한 상관관계는 알지 못한다. 문창귀인의 탓도 있겠지. 어찌 됐든 글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 조금은 과거를 살고 있는 기분이 나니까.
오이카와가 사무실을 가장한 신당으로 돌아가고 밤이 되면 온 집안에 고요함이 찾아온다. 가끔은 모르는 이의 속삭임이 들려오지만 흘려듣는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에게 기억이 없어도 올해로 나이가 스물다섯이나 된 어른임을 강조했다. 자기가 학교는 안 된다고 그렇게 말렸건만 생떼를 써서 가더니 온갖 귀신 푸닥거리에 관여했다나. 자기를 굉장히 곤란하게 만들었다며 과거의 스가와라를 험담했다. 스가와라는 기분이 나쁘면서도 미안했고, 미안하면서도 의아한,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어찌됐든 학교를 물바다로 만들었다는 일화를 듣고 귀신 얘기를 들어주는 짓은 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면 긴 하루를 마감했음에 안도한다. 오늘도 채워냈구나, 하면서.
스가와라가 잠들면 오이카와는 다시 나타난다. 그는 작년부터 스가와라의 꿈에 과거의 기억을 훔쳐다 심었다. 기억이 사라져도 육신은 남아있다. 이번에 여덟 명의 몸을 오가면서 오이카와는 더욱 확신했다. 그들은 오이카와가 자신의 몸을 들락거렸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오이카와가 갔던 장소, 먹었던 음식에 대한 기시감을 느꼈다. 모르긴 몰라도 기억귀가 훔쳐가지 못하는 생애의 흔적들이 있다는 얘기였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가 고질적으로 느끼는 무력감을 해소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미안해. 스가와라.”
이 모든 것은 죄책감에서 기인했다. 사와무라에게 스가와라와 헤어질 것을 당부했던 과거. 오이카와는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하고 죄스러워할 것이다. 오이카와는 곤히 잠든 스가와라의 눈 위로 그가 가장 안온했던 시절을 흘려보낸다. 꿈을 꾸는 스가와라는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깊은 잠을 잔다. 눈을 뜨면 이유모를 눈물에 갑갑함을 느낄 테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일 테다. 오이카와는 그를 돌보는 순간순간이 죄와 벌임을 안다.
赤
스가와라는 자신이 태어난 동네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할 수 없도록 이름을 없앴기 때문이었다. 반역으로 원래 살던 주민들이 전멸당하고 폐허가 된 후, 당시 다른 곳에서 죄를 짓고 도망 다니던 사람들이 이 마을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무슨 변고인지 이주민들 대부분은 비명횡사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녀들뿐이었다. 계속 되는 비극에도 갈 곳 없는 그들은 마을 입구에 돌을 쌓는 것을 시작으로 신당을 차려 원혼들을 위로했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스가와라의 어미 나츠모토 유키나는 열여덟이 되던 해에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과 결혼했다. 그를 만나 결혼한 것은 나츠가 누릴 최대의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 이후 나츠의 인생에는 이렇다 할 행운은 없고 불행만이 그득했으니.
나츠는 삼년 동안 자그마치 네 번을 유산했다. 아이에 대해 체념할 즈음 그녀의 남편이 실종되었다. 남편은 마을 안과 밖을 오가며 새로 살 곳을 마련하고 있었고, 나츠는 그것이 자신이 모시는 신을 노하게 만들었음을 짐작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비극의 연속에 감정을 오롯이 느낄 새란 없었으므로.
“나츠, 어디 아파?”
그 즈음 나츠를 챙기는 이는 나츠의 바로 윗대부터 모셨던 동자신인 오이카와뿐이었다. 스가와라 코우시가 태어날 것을 제일 먼저 알려준 것도 오이카와였다. 나츠는 아이가 이 지긋지긋한 마을에서 죽은 자만을 위로하며 살길 바라지 않았다. 벼려진 칼날 위에 발바닥을 대고, 잘라야만 풀 수 있을 것 같은 타래들을 꾸역꾸역 풀어내는 일. 사랑하는 이들은 떠나가고 영혼을 잃어버린 이들만이 모여드는 이 곳. 그 어떤 것도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오이카와, 수호신이 되고 싶다고 했지.”
“난 아직 두 명이 남았어.”
“내가 줄게.”
“무슨 소리야. 누구를?”
나츠는 자신의 부풀어 오른 배를 쓸어내리며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오이카와는 나츠가 모시는 신을 이어 그녀가 천도하는 이들의 목숨(命)을 제물로 삼아 자라고 있었다. 아이를 제물로 바치려는 속셈인가. 오이카와는 겁에 질려 고개를 내저었지만 나츠의 확고한 마음을 돌릴 수는 없어보였다.
며칠 후 나츠의 남편은 하천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나츠는 죽은 남편의 유골에 자신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봉하여 함께 제를 지냈다. 자신의 제를 미리 지내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나츠가 말한 두 사람의 명은 아이의 것이 아닌 부부 두 사람의 몫이었다.
나츠가 제일 먼저 보자기에 싼 것은 자신이 손수 지은 적색 유카타였다. 오이카와는 겁에 질려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으면서도 나츠의 모습을 차근히 눈에 새겼다. 나츠는 적색 종이들과 먹을 챙겨 넣고, 오이카와가 좋아하는 사탕도 한 줌 챙겨 넣었다. 보자기 끈이 풀리지 않도록 묶고 또 묶었다.
“내가 말한 산 중턱까지 가기 전에 끈이 풀리면 절대 안 돼. 알겠지?”
나츠의 목소리가 오이카와의 귀를 울렸다. 오이카와는 먹으로 적셔진 아기를 품에 안고 보자기를 등에 단단히 맸다. 나츠는 몇 번이고 오이카와에게 당부를 받아냈다. 오이카와는 울음 범벅된 얼굴로 마을을 나섰다. 신들의 노여움을 살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나츠의 죽음에 목이 탔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죽기 살기로 나츠의 뜻을 지키리라 걸음을 재촉했다.
마을에서 나츠가 삼일장을 마칠 즈음 오이카와는 완연한 어른의 영을 가지게 됐다. 그것은 곧 신들이 추격해올 것임을 의미했다. 나츠가 신을 모시는 무녀의 명을 가장 막내격인 오이카와에게 먹였으니 나츠가 원래 모시던 신들이 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오이카와는 아기를 품에 안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멀리 민가의 불빛이 보이자 오이카와는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 순간 누군가 뒤에서 보자기를 잡아당겼다. 오이카와는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달렸다. 보자기 끈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그 틈새로 적색 종이 한 장이 나풀거리며 날아갔다. 뒤늦게 손으로 틈을 여몄지만 이미 잃어버린 종이는 따로 방도가 없었다.
미야기 산 중턱에 도착해서야 그를 쫓는 이들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얼른 보자기를 풀어 사라진 종이의 정체를 확인했다. 나츠가 넣어둔 종이들은 귀신을 막는 부적이었고, 오이카와가 잃어버린 것은 연, 월 혹은 일 단위로 기억을 먹는 귀신을 막는 부적이었다. 오이카와는 서둘러 아이의 강보를 벗겼다. 자신의 손끝을 깨물어 피를 내 아이의 등에 연(年)이라 새겼다. 저주의 시작이었다.
‘下 여름의 눈’은 포스타입에서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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