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이스가] 돌아오는 여름, 소년에게
W. 유월
스가와라는 여름을 싫어했다.
찢어지듯이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라던가, 목께로 불어오는 미적지근한 바람이라던가, 약간 후끈하게 온도가 오른 살이 부딪힐 때 느껴지는 미온감이라던가, 살과 살이 만나 땀이 고이는 곳의 끈적함과 체취라던가, 숨을 들이킬 때 산소보다 더 많이 느껴지는 습기라던가, 에어컨의 바람에서 느껴지는 냄새마저도 싫었다.
그래서 그는 그 날이 정말 싫다고, 줄곧 다짐하듯 생각해왔다.
“스가.”
부르는 목소리가 제법 단호하다. 뒤돌아보기 전에 부러 입가에 미소를 올렸다. 티를 내는 건 유치하다. 들키는 것도 제법 수치스럽다.
“왜, 다이치?”
그는 언제나처럼 좋은 아침이라며 어깨에 손을 가볍게 올렸다. 서문이다. 스가와라는 그의 부름이 앞으로 나올 긴 이야기들의 시작을 알리는 말임을 바로 알았다. 어깨를 누르고 지나간 온기는 조금 뜨거울 정도의 온도. 의식하는 순간 그리 나쁘진 않다며 오히려 벌게지려는 귀를 한번 쓱 문지른다.
어젯밤엔 그 애가 스가와라한테 잘자라며 이상스레 메일을 했다. 평소 자주 메일을 주고받는 사이이긴 해도 그다지 용건도 없이, 별 목적도 없이 그렇게 툭, 잘자라는 말만 건넬 그런 애던가. 별 싱거운 말을 다 한다며 그래 너도, 라고 짤막하게 보내고는 누워서야 알았다. 내일이 저의 생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스가와라는 지금 이 사와무라 다이치가 길게 늘어놓을 말들이 대충 어떤 말들일지 눈치 채고 있다. 뭐 듣지 않아도 뻔하지. 생일 축하한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따위의 시시하고 별 영양가 없는 말들. 그러나 진심일 말들.
그럼에도 자신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축하 인사다. 이유가 있던가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다.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이 말하는 생일 축하의 말들이 싫어졌다. 어차피 피차 반쯤은 의무감에 주고받는 말들 아닌가. 축하해, 고마워. 생각만으로 속이 조금 뒤틀려버리고 마는 그 형식적인 안녕과 안녕의 변주. 진심 없이 껍데기뿐인 언어의 나열.
차라리 그런 말들이라면 듣지 않는 편이 낫다고,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서 부러 생일을 말하고 다니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입부서에 적어 낸 정보들에서 사람들은 쉽게 스가와라의 생일을 알아버렸고, 의무가 섞인 형식적 인사치레들은 매년 치러내야 할 열병 같았다.
사와무라 다이치가 말하는 것들은 허투루 들을 것이 없다고, 그는 늘 진심을 담아 말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어쩌면 그걸 가장 잘 믿고 있으면서도 이미 스가와라에게는 생일축하 인사 받기란, 펼치는 것조차 고역인 숙제 같은 거였다. 그러니 속으로는 아냐,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그렇게 빌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말로는 못하겠지만. 그걸 줄줄이 설명하고 있는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 보일지는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굳이 구분하자면 스가와라에게 사와무라 다이치란 조금 특별한 존재였으므로, 아니 사실은 일기장에 몰래 적은 존재였으므로, 사와무라가 말하는 생일축하는 너그럽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줘야지 하는 당찬 계획도 슬그머니 들었다.
그래, 그러니 차라리 말할 거라면 얼른 말해. 얼른 말하고 답하고 해치워버리자. 그런 생각을 몰래 속으로 하면서 스가와라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기다렸다.
“우리 이번 훈련 일정 말이야. 아무래도 아사히랑 노야의…….”
생각보다 서론이 기네. 음, 언제 말할 건데. 사와무라가 말하는 내내 속으로 떠올린 생각이라곤 그것뿐. 그러나 사와무라는 말을 마칠 때까지 스가와라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 끝이야? 이게 전부? 이상한데? 분명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했는데.
사와무라가 스가와라의 생일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분명 작년의 이 날 아침에 자신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넸으니까. 그런데 왜 오늘은 안했지? 지금이 아닌가? 지금이 아니면 아침 훈련이 끝나고려나? 그래 뭐, 그때가 더 나으려나?
사실은 당황했으면서, 당황한 티를 능숙하게 숨기며, 말을 마치고 먼저 앞서 체육관에 들어서는 사와무라의 등을 보았다. 말을 하는 사와무라도 도중 머뭇거리며 말을 애매하게 이었다. 분명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신발을 갈아 신고 올라서던 사와무라가 멈칫하곤 뒤를 보려다 말았다. 그래, 너도 할 말이 있는 거지? 대충 알겠으니까 지금하면 될 텐데. 뭐 얼마나 대단한 축하를 해주려고 뜸을 들이나 싶었다. 그러나 사와무라는 끝내 말없이 체육관으로 들어섰다.
김이 샜다. 작년에는 만나자마자 바로 대뜸 격하게 축하해줬으면서 올해는 잊은 걸까? 낌새를 보자면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괜히 머리가 복잡했다. 흘낏 연습하면서 훔쳐본 사와무라도 웬일인지 아침 연습부터 과격하고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침에는 천천히 움직이면서 근육을 충분히 풀어줘야 한다고 말해오던 애가 오늘따라 왜 그래. 그러다 근육 경련 일어날라.”
등을 툭 치자 놀라는 정도가 다른 날과 다르다. 평소보다 더 화들짝 놀라며 어, 어 얼버무리듯 대답하는 모양새가 영 수상했다. 뭘까. 기대하는 건 싫은데. 뭔가를 준비한 걸까.
상상하며 기대하는 일은 끔찍하다. 거의 대부분 높은 확률로 그 기대는 좌절될 테니까. 구태여 상처받을 거리를 만들지 않는 편이 좋다.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기만 하고 정작 더 이상 입을 열지는 않는 사와무라의 등에 괜히 주먹을 꽂아 넣고는 그를 뒤로하고 먼저 체육관을 나갔다.
교실, 사와무라가 앞, 스가와라가 뒤로 앉은 자리는 자신을 실컷 의식하는 사와무라를 관찰하기 용이했다. 쉬는 시간마다 묘하게 계속 뒷자리를 흘끔거리는 모양새가 영 신경 쓰였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않고 있는 그에게 저가 먼저, 됐으니까 빨리 축하한다고 하고 끝낼래, 하기에도 민망한 일이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뜸들이며 미루고 있는 것엔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무슨 일일까. 정말 뭔가 준비하기라도 한 걸까.
생일이라는 건 다들 이런 건가. 축하하고 축하받으면 기쁜 일인 건가. 그러니까 대충 넘기면 서운한 일이 되는 건가. 그래서 좀 더 특별함을 담아 거창한 무언가를 해서까지 기념해야 하는 일인 건가. 그래서 스가와라는 그가 쉬는 시간마다 창밖을 보는 척 하며 자신 쪽을 들여다보는 것을 알았고, 알지만 모른 척 했다. 그러다가도 그가 스가, 하고 말이라도 걸면 되려 저가 훔쳐보다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놀랐다.
“으응, 왜?”
“아, 어, 그러니까…”
지금이려나. 말한다면 이렇게 갑작스럽게,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듯이, 뜬금없이, 지금이려나.
그런데 그래도 되는 거려나.
너와 나 사이는, 그 정도로 되는 거려나.
아, 위험했다. 방금 기대할 뻔 했어. 이미 반쯤은 기다리고 있다하더라도 이건 그러니까……. 그러니까, 빨리 매를 맞고 끝내려는 사람의 심정이지, 사탕을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은 아니었단 말이야.
“스가, 듣고 있어?”
“어, 어? 뭐라고 했지?”
“오늘 아침부터 묘하게 멍한 것 같아.”
그러는 너야말로 아침부터 수상하다고.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입술을 꾹 눌러 참았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타이밍을 재는 이 순간이 조금은 우스웠고 약간은 지겨웠다. 그냥 먼저 말할까. 굳이 기다렸다 엄청난 뭔가로 축하를 해줄 필요는 없다고. 근데, 그런 걸 준비한 게 아니면 어쩌지. 뭐가 준비한 게 있어서 타이밍을 살피는 게 아니면 어쩌지.
피곤하다. 벌써 기진맥진이다. 아침부터 히나타나, 타나카의 난리를 한번 거치고 났더니 더 그렇다. 대충 마치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설마 방과 후 부활 시간에도 또 난리법석이 나는 건 아니겠지. 그것만은 사양이다. 아침엔 그나마 웃으며 고맙다고 받았지만 조금 지쳐버린 방과 후엔 웃는 얼굴에도 티가 날지 모르는 일이다.
점심을 먹으러 올라간 옥상에서는 유월의 중순답게 미풍이 불었다. 부러 그늘을 찾아 앉은 보람이 있게도 등 뒤가 서늘하게 식었다. 목에 닭살이 돋아 오른 것을 손으로 문지르며 샌드위치 포장을 이로 물어뜯었다.
“이리 줘, 내가 해줄게.”
물고 있던 포장지를 놓자 자연히 넘겨진 샌드위치는 사와무라의 손에서 곱게 벗겨졌다. 사와무라는 묵묵히 우유팩에 빨대를 꽂아주며 스가와라의 앞에 내려놓았다.
“든든히 좀 챙겨먹으래도.”
“이거면 돼.”
“내가 너 그렇게 먹을 줄 알고 매번 도시락 2인분으로 싸오지.”
“그 중 1.5인분은 혼자 다 먹으면서.”
뭐라고? 신경 써서 챙겨준 사람한테 스가 이러기야? 장난기 섞인 말들이 청량한 하늘 위로 번져간다. 음성을 따라 올려다본 하늘에 새삼 여름이구나 싶다. 쨍하니 맑게 울리는 소리가 여름답다. 나란히 앉아 붙은 무릎이 따뜻하다 못해 살짝 뜨겁다. 사와무라는 체온이 높은 편. 슬슬 더워지는 때가 올 텐데, 그 땐 너와의 거리도 더 멀어지는 걸까. 붙어 앉은 무릎의 온기가 서럽다.
“오늘따라 더 못 먹는 것 같아.”
“기분 탓이겠지.”
“아냐 평소보다 우메보시가 많이 남았는걸.”
“그럼 다이치가 더 많이 먹으면 되겠네. 다이치도 밥 남은 거 알아? 나 밥 남기는 다이치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냥, 오늘따라 왠지 잘 안 들어가서.”
“그럼 그만 내려갈까?”
“아, 저, 조금만 더 있다가.”
일어서려던 스가와라가 도로 앉았다. 지금 말하려는 건가, 싶어서 자신이 보일 반응에 대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뭐 응, 고마워, 정도면 되지 않으려나. 한가하게 생각하고 있던 머리가 사와무라 쪽을 바라보는 순간 새하얗게 표백된다. 사와무라는 마치 곧 할복이라도 앞둔 사람마냥 세상 심각한 얼굴로, 또 동시에 긴장한 얼굴로 도시락 뚜껑만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일 축하가 저런 표정을 할 정도의 일이야? 싶으면서도 뭐, 얼마나 대단한 말을 해주려고 그러나 싶었다. 3년 동안 고마웠어? 넌 제일 소중한…, 아 아냐 이런 말은 기대하지 말자고 아까 다짐해놓고는. 그냥 그다운 적당히 진지하고 적당히 낯간지러운 그런 말들일 것이다. 정작 하려니 부끄러운 모양인. 그냥 그런 말들.
“저기……, 있잖아 스가.”
저까지 덩달아 긴장되게 만드는 말투다. 뭐야, 진짜 오늘따라 아니, 이번 해는 왜 저렇게 진지한 건데. 속으로 궁시렁거려봐도 묘하게 들뜨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뭔데, 다이치.”
괜히 어색하게 굳은 분위기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보겠다는 편안한 어투. 어떤 말이든 받아줄 요량인 사람처럼, 아주 여유가 넘치고, 한없이 너그러워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여유와 푸근함이 담긴 목소리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그 짧은 음성에 담긴 마음은 정작 그러하질 못했으나, 태연을 가장하는 것은 스가와라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것이었다. 무엇이냐 물어보는 음성마저 온화했다.
“아, 그러니까…….”
그의 짧은 침묵도 기다려 주었다. 도르륵 구르는 눈동자도 모르는 척 해줬다. 그런데,
“우리 이번 여름방학 훈련 말이야….”
하?
그가 재빠르게 하려던 말을 바꿨다는 것은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그가 고작 그런 말이나 하려고-물론 여름방학 훈련이 고작은 아니지만- 그렇게 질질 끌었을 리가 없다는 것은 미야기에서, 아니 일본에서 자기 자신이 제일 잘 안다.
사와무라 다이치, 고작 생일 축하한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
속으로 실컷 비웃고 욕해도 부풀다 터진 마음을 수습하기엔 조금 버거웠다. 그라면 얼마든지 기쁘게 받아줄 수 있다. 무슨 말로 축하한들 사실 스가와라에게는 더할 나위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기껏 마음먹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외면을 하는 사와무라가 못내 밉다 못해 슬슬 화가 났다.
아니다. 결국 이건 기대하는 저의 마음의 문제다. 번번이 실망하고야 마는 것은 그에게 나올 평범한 축하 인사도 저에겐 특별하고 달콤할 것임을 이미 아는 저의 문제다. 그래서 그것을 기다리게 되어버린 제 마음의, 감정의 문제다.
그러니까 스가와라는,
생일이 지긋지긋하다.
기어코 하루 일과가 끝났다. 부활동마저 마친 해가 지는 무렵의 학교는 텅 비어 허전하다. 연습이 끝나 체육관을 정리하고 나서는 발걸음이 땅에 질질 끌린다. 지금 스스로가 가장 초라하고 우습다.
제일 먼저 옷을 갈아입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 마지막까지 니시노야와 타나카의 축하한다는 말에 고맙다 맞받아치며, 차마 사와무라 쪽은 쳐다도 보지 못한 채, 더욱 비참해진 기분으로 도망치듯 부실을 빠져나갔다. 뛰다시피 걷는 걸음은 아까와는 영 반대다.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애의 시야 밖으로, 그 애가 자신의 눈을 보지 못하는 곳으로, 그 애의 목소리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오늘이 아닌 곳으로, 오늘이 그저 지나가는 유월 중의 하루일뿐인 곳으로, 엄한 마음으로 괜히 기대하고 있던 자신에게서, 멍청하게 그 애 입에서 나올 말을 상상하던 순진해 빠진 스스로에게서, 기다리고 애태웠던 시간들에게서, 그렇게나 열심히 숨기고 외면해온 시간이 헛되게도 쏟아져버린 본심 앞에서.
“…가! 스가! 잠깐만 기다려!”
숨이 턱 끝에 걸렸다. 어느새 저도 모르게 뛰고 있었던 모양이다. 붙잡힌 어깨가 뜨겁다. 저도 모르게 쳐냈다. 어쩌면 조금 비어져 나온 서운함이 불씨처럼 튄 걸지도 모르겠다.
날이 선 듯한 태도에 한걸음 물러선 그림자는 사와무라 다이치의 것.
스스로 놀라 움츠러든 그림자는 스가와라 코시의 것.
“뭐야.”
아, 이게 아닌데. 이미 뱉은 말엔 서운함이 덕지덕지 묻어 꼴불견이다. 티내는 것은 너무 유치하다. 들키는 것도 수치다. 그런데도 넘쳐 새어나오기 시작하는 마음을 도저히 추스를 수가 없다.
가로등을 등진 사와무라의 얼굴은 어둡다.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선 그 애는 다시 입을 떼었다 붙였다 하며 말을 망설인다.
하루 종일 그것에 질린 스가와라에게, 다시 그의 앞에서.
“스가……. 할 말이 있어.”
“그래.”
그러시겠지. 뒷말은 꾹 눌러 삼켰다. 이제는 그저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다. 얼른 이 상황이 종료되고, 오늘이 지나, 적어도 364일은 오늘 같이 미련스럽고 한심한 자신을 보지 않아도 되길 바랐다.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지 몰라서 하루 종일 고민했어. 말을 고르고 골랐는데, 아무리 찾아도 이거 말고는 적절한 말이 없더라.”
그래, 더 무슨 말이 남았겠니. 얼른 하고 끝내버리자. 오늘도 영영 묻어버리자. 그래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혼자만의 해프닝으로 묻어버리자. 내 마음도 같이 그 안에 묻어서 다시는 이런 하루 없도록 끝내버리자. 너는 축하해, 뻔하고 흔한 말로 진심을 말하고 나는 고마워, 정해진 대사로 거짓을 말하자. 그렇게 무엇도 아닌 평범한 날로 끝내버리자.
“좋아해.”
“고마워.”
.
.
.
“뭐?”
“뭐?”
뭐라고? 뭐라고 하는 거야? 쟤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스가 그 말은 무슨, 아니 그보다 놀라지 않았어? 내가 고백할 거라고 알고 있었어? 곧장……, 어떻게 그렇게…….”
“아니, 나는, 나는….”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워 무슨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온종일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갈 곳 잃은 아이처럼 끙끙거리던 사와무라의 입에서 드디어 나온 말이 이런 말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런 건 기대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다시. 다시 해.”
“뭐? 아니, 그건 너무 부끄러운데….”
“나 제대로 못 들었단 말이야! 나는, 나는 당연히 생일 축하한다는 말 일줄 알았다고!”
“아, 나는 스가가 그런 거 싫어한다고 생각해서 아무 말 안했는데…. 미안, 혹시 기다렸어? 아침에 미리 해둘걸 그랬나.”
“아니! 싫어하는 거 맞고! 기다린 것도 맞는데! 암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다시 말해 달라고!”
제대로 엉켜버린 사고회로를 모조리 끊어내고 남은 것은 생각지도 못한 그 애의 고백과 그것을 흘려듣고 말았다는 아까움이었다. 스가와라는 바짝 다가서서 고개를 쳐들고 사와무라의 눈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말해. 다시 말해줘. 내가 오늘이 아닌 이미 아주 예전부터 지난한 시간을 보내며 기다려온 말을 해줘. 어쩌면 수많은 오늘들의 장사를 지내며 바라온 그 말을 내게 해줘. 이토록 어리석은 나를 구해줄 말을 해줘.
“좋아해, 스가와라 코시.”
아. 아아.
그대로 주저앉으려는 스가와라를 황급히 붙잡아 부드럽게 보도에 앉힌 사와무라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스가와라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제서야 어둠에 눈이 익어 사와무라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온통 발갛게 물든 그의 얼굴을 스가와라는 그제야 보았다.
“넌, 진짜 바보야. 다이치.”
“뭐?”
그리고 나도. 피식피식 헛웃음을 짓다가 웃어버리는 스가와라에 사와무라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도 이내 따라 웃는다. 스가와라의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여전히 긴장된 얼굴을 하고 묻는다.
스가, 대답 듣고 싶은데.
내 답은 이미 들었잖아.
스가도 다시 말해줘.
품을 파고든다. 한껏 어리광을 부릴 테다. 오늘 당한만큼 돌려줄 테다. 조금 경직된 사와무라가 망설이다 스가와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켰지만 사와무라의 살내는 불쾌하지 않았다.
좋아. 너무 좋아. 좋아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그 정도로 좋아. 좋아서 너무 미워. 아냐 그래도 좋아. 그보다 더 좋아.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사와무라의 가슴팍이 잔잔하게 울렸다. 온종일 마음 졸이게 만들어 놓고는 태평하게 웃기냐. 밀려오는 얄미움에 스가와라는 괜히 목에 코를 부비며 오늘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잔잔하게 울리던 가슴팍이 좀 더 크게 들썩였다. 어깨도 함께 흔들렸다. 미안해, 생일 축하해. 진심으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퍽 다정하다.
“그래서 속상한 얼굴이었구나.”
“내가? 속상한 얼굴이었다고?”
“응. 오늘 하루 종일”
“거짓말! 나 티 안내려고 엄청 노력했단 말이야!”
“난 스가의 기분에 대한 거라면 뭐든 알아.”
“그럼 이것도 알아?”
“뭐?”
“내가 지금 너에게 키스할거라는 거.”
가로등 빛이 차마 닿지 않는 어둠 아래서 숨을 잔뜩 죽인 두 사람은 마치 한 덩어리다. 건네주고 건네받는 호흡 사이로 후덥지근한 여름공기가 스민다. 이상스레 이 열기가 반갑다. 아득해지는 여름밤 풀벌레 우는 소리, 척추로 흐르는 땀, 숨 속에 섞인 그 애의 다정하고 달큰한 혀 끝, 가장 깊숙이 파고들어오는 그의 존재.
스가와라는 여름을 싫어했다.
찢어지듯이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라던가, 목께로 불어오는 미적지근한 바람이라던가, 약간 후끈하게 온도가 오른 살이 부딪힐 때 느껴지는 미온감이라던가, 살과 살이 만나 땀이 고이는 곳의 끈적함과 체취라던가, 숨을 들이킬 때 산소보다 더 많이 느껴지는 습기라던가, 에어컨의 바람에서 느껴지는 냄새마저도 싫었다.
그랬던 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