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카스가] 테루테루보즈
W. 스페라
‘내일모레부터 때 이른 장마가 시작될 것으로 보-’
조용한 집을 유일하게 채우는 소리가 누군가에 의해 아무 저항 없이 꺼졌다. 툭-하고 리모컨을 소파 위에 던지면서 스가와라는 방에 들어가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그의 표정에서는 평소에 볼 수 없는 짜증이 묻어나 있었다. 내일모레, 스가와라의 생일에 찾아와서는 안 되는 불청객을 마주하는 것처럼 하늘은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짙은 회색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스가와라는 잠에 빠져들었다.
「케이지」
부재중 전화 - 8통
미확인 메시지 - 15개
-스가사ㅇ
-스가상
-집이세요??
-밖이셔서 전화 못 받으시나요?
.
.
.
.
.
-보시면 바로 전화 주세요
번뜩 잠에서 깬 스가와라는 비몽사몽 핸드폰을 확인하다 아카아시가 보낸 전화와 메시지를 보고 놀랐다. 시계를 보니 거의 7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회색 빛깔의 하늘이 모두 검은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5시간 정도 잔건가......”
여보세요
[스가상]
미안 케이지 걱정했지 너무 푹 자 버려서......
[괜찮아요 그나저나 날씨 보셨어요?]
응
아카아시와 이런저런 이야기가 담긴 전화를 마치고 스가와라는 저녁 준비에 나섰다. 오늘은 야근이라는 아카아시의 말을 듣고 오랜만에 아주 매운 마파두부를 먹기로 한 스가와라는 선반이랑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냈다. 재료라 해봤자 인스턴트 마파두부에 몇 가지를 더 추가하는 것 뿐 이지만. 평소엔 매운 걸 잘 못 먹는 아카아시를 위해 항상 덜 맵게 했지만, 오늘만큼은 스트레스라도 해소하려 듯이 스가와라는 캡사이신을 듬뿍 넣었다. 일반 사람들이 보면 경악할 수도 있는 수준이었지만 매운 걸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매운맛이란 고로 맛있는 맛에 불과할 뿐이었다.
“아카아시가 해주는 마파두부 덮밥이 최고인데......”
11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야근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카아시는 소파 위에서 곤히 자고 있는 스가와라를 보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 자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천사 같던지. 깨우지 않으려 조심조심 들어와 깨끗이 씻고 부엌에 가자마자 식탁 위에 휘갈겨 쓰여 있는 메모지를 보고 다시 한 번 싱긋 미소를 지었다.
<케이지한테 생일 선물로 바라는 것>
나 저녁으로 마파두부 해 줄 수 있-
쓰다만 메모지를 보고 아카아시는 그 밑에 천천히 연필로 한 마디를 썼다. 그리고는 스가와라한테 다가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스가상 일어나세요”
“우음...... 케이지?”
“그럼 저 아니면 누구겠어요? 편하게 침대에서 자요”
자연스럽게 공주님 안기로 스가와라를 안은 아카아시는 자기 품 안에서 얼굴이 빨개진 채 바동바동 거리는 스가와라를 보고 내려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쳤다.
“앗..!! 잠...잠시만!! 나 옷!! 옷만 갈아입고!!”
“졸리시면 제가 갈아입혀 줄까요?”
“아니 괜찮아”
“농담 이예요”
짧은 대화를 마치고 재빠르게 잠옷으로 갈아입은 스가와라와 아카아시는 동시에 침대에 누웠다. 아카아시 잘 자-, 스가상도 빨리 자세요 라는 대화가 오가며 둘은 서서히 잠에 들었다.
*****
스가와라 코우시는, 어렸을 때부터 비가 오는 날을 싫어했다. 정확히는 싫어한 다기보단 무서워한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수도. 자기의 머리 색깔보다 더 어두운 회색 빛깔의 하늘과 투둑투둑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를 무서워했다. 때문에 비가 오는 날마다 한 개, 두 개씩 테루테루보즈, 흔히 테루테루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었다. 하얀색 천과 속에 넣을 동그란 모양의 물건만 있으면 쉽게 만들 수 있다는 점과 웃는 표정을 만들기 위해 눈, 코, 입을 넣어 완성시킨 테루테루를 보고 있자면 스가와라는 마음 한 구석이 편안해지곤 했다. 어렸을 때 어른들은 그것을 ‘아직 어리니까’, ‘다 크지 않아서 그래. 빗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데’라고 말했지만, 그 무서움은 어릴 때보단 덜 해졌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쉽게 물러나지 않은 무서움, 공포였다.
*****
금방 하루가 지나가고 마침내 스가와라의 생일 당일이 됐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빗소리가 들렸다. 가끔가다 틀리는 일기예보가 왜 오늘은 틀리지 않는지. 일기예보 그대로 어김없이 하늘에 구멍이라도 뜷린 것처럼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고 더군다나 천둥과 번개까지 같이 오기 시작했다. 한숨을 푹 쉬며 누워있는 채로 뒤를 도는 순간 스가와라는 자신을 꼭 껴안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생일 축하해요 라고 말하는 아카아시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방금 전까지 속으로 꿍얼꿍얼 거리며 기분이 안 좋긴 했지만 안 좋은 기분이 모두 사르르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충전기에 꽂혀 있던 핸드폰을 확인하니 평소와는 달리 메시지가 많이 와 있었다. 역시나 거의 대부분이 생일 축하 문자였다.
발신인-「다이치」
스가!! 오늘 생일 축하해!!! 비만 안 왔어도 완벽한 생일이겠다. 축 쳐져있지 말고 밖에 나가서 뭐라도 사먹어 마음 같아서는 모여서 점심 아니면 저녁이라도 같이 먹었으면 좋을 텐데 아쉽네- 그래도 오늘 생일 즐겁게 보내고 다음에 꼭 한번 만나자 생일 정말로 축하한다
다이치가 보낸 문자부터 카라스노 멤버들이 보낸 문자, 부모님이 보낸 문자 그 외에도 다른 지인들이 보낸 문자까지. 적어도 10통이 넘는 문자가 와 있었다. 하나하나씩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문자에 정성스레 답하고 있는 도중에 아카아시가 스가와라를 불렀다.
“스가상”
“응? 왜?”
“지금 많이 바쁘세요??”
“음....많이 바쁜 건 아닌데 지금 밀린 메시지에 답해주느라”
“그럼 그거 다하시고 이쪽 방으로 넘어오세요. 제가 뭐 하나 보여드릴게요.”
아카아시의 마지막 말에 거의 다 끝나가던 문자 보내기를 마치고 바로 옆방으로 옮겨 갔다. 현재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중인 스가와라의 작업실 한바닥에 흰색 천들과 마카 펜들이 쌓여있었다. 그 옆에 한쪽에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듯 한 형태의 무언가가 2개쯤 놓여있었다.
“아카아시....이거 뭐야??”
“뭐일 거 같아요?”
이미 마음속에서는 정확히 답을 외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단어가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테...테루테루보즈잖아”
“맞아요”
“근데 이걸 갑자기 왜...??”
“비도 오는데 오늘 하루 종일 만들어보죠. 혹시 알아요? 정말로 중간에 비가 멈출 수 있잖아요.”
진심으로 결의에 가득 찬 목소리로 아카아시가 말하자 스가와라는 살짝 당황하는 기색이 보였지만 이내 자리를 잡고 하나, 둘씩 테루테루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카아시...도대체 이런 걸 다 어디서 준비해온거야”
“회사 후배가 부업으로 옷을 만든다고 하던데 이번에 하얀색 천 수량을 잘못 체크했는지 원했던 거보다 더 많이 왔다고 하더라고요. 어차피 안 쓰면 다른 사람한테라도 팔아야 된다고 하기에 좀 얻어왔어요”
“에엑?? 갑자기?”
“어차피 비도 오고 스가상이랑 밖에도 못나가니 집안에서도 할 것도 별로 없는데 시간 때우기에 딱 좋죠”
“아니 그건 그런데......”
테루테루가 거의 15개 쯤 만들어졌을 때 스가와라는 어렸을 때 자기가 만들던 테루테루를 생각했다. 방 안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 귀여우면서도 마음이 편안해 지곤 했다. 그러고 보니 문득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만드는 것을 서서히 잊어갔고 어느 순간부터 아예 존재를 까마득하게 잊고 말았다. 비 오는 날마다 테루테루를 만들면서 마음은 무섭지만 좋아했던 어린 날의 기억.
“아카아시 뜬금없는데 고마워”
“에? 갑자기 뭐가요?”
“그냥... 지금까지의 내 기억 속에서는 비 오는 날은 항상 어둡고 무서운 날이었거든. 근데 그 기억이 오늘, 너와 같이 있음으로써 점차 좋은 날로 기억될 수 있을 거 같아서.”
“...그 말을 들으니 기쁘네요.”
이 말을 마지막으로 한동안의 정적 끝에 먼저 말을 꺼낸 건 아카아시였다. 덥다는 듯이 옷을 걷고 밝은 목소리로 스가와라한테 말을 걸었다.
“자! 그럼 저녁을 만들러 가볼까요 코우시? 생일 선물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마파두부덮밥을 만들어줄께요”
“엇 설마...메모지를 본거야?”
“제가 그걸 못 볼거라 생각했어요? 밑에 답장도 써 놓았는데”
부엌 식탁위에 놓여있는, 자기가 아카아시한테 원하는 생일선물이라 써 놓은 메모지 아래에 짤막한 편지가 써져있었다.
‘스가상 오늘 하루 완벽한 생일이 되길 바라요. 눈치 없이 빨리 온 장마 때문에 기분 좋게 밖에 나갈 순 없겠지만 저랑 같이 집에 있으면서 노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예요. 내년에는 더 많이 챙겨줄께요. -아카아시 케이지가-
“코우시 진심으로 생일 축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