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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스가] 6월 13일 23시 59분

W. 리린

 좋아하는 상대가 있다. 우정이 아닌 애정을 품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오래 전부터 짝사랑을 해 왔다. 그 마음을 혼자서만 끌어안고 그 속에 타인을 들이고 싶지 않았기에, 어느 누구와도 연애 한 번 하지 않고 오이카와는 스물한 살을 맞이했다. 이런 말을 꺼낸다면 분명 비웃음을 살 게 뻔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랜 짝사랑의 상대를 잊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누군가와 연애를 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상처만 될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로 일 년 중 딱 하루 있는 특별한 날이 돌아올 때마다 꽃을 한 송이씩 샀다. 흔하디 흔한 붉은 장미와 함께 작은 선물도 준비했다. 함께 길을 걸어갈 때, 아마 본인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스쳐지나가며 갖고 싶다고 말했던 무언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오이카와가 특별한 날을 위해 준비한 꽃 한 송이와 선물, 두 가지 중 끝내 손을 뻗어 건네는 것은 선물 하나 뿐이었다. 애정이 담긴 장미는 뒤로하고 우정만이 담긴 선물을 건네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생일 축하해, 스가. 환하게 웃으며 받는 모습을 바라보며 쓰라린 가슴을 외면했다. 이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아. 16살의 오이카와 토오루가 결심했던 마음이었다.

 

 스가와라 코우시의 생일마다 샀던 장미 한 송이는 주인을 찾아가지 못한 채로 오이카와의 침대 옆 탁상에서 시들어만 갔다. 한 송이였던 붉은 장미들은 어느새 쌓여 여섯 송이가 되었고, 가장 처음에 샀던 장미는 이미 형태를 알아 보기 힘들 정도로 말라 비틀어져 바스라진 지 오래였다. 색도, 향도, 모양도 잃은 그것들을 보며 오이카와는 침대에 다이빙하듯 몸을 던졌다. 폭신한 감촉이 온몸을 얽어온다. 누운 채로 탁상 위에 놓인 꽃들을 바라보며 얇은 자켓 주머니 속에 든 것을 매만진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그런가…."

 

 한 손에 들어오는 사각형 케이스의 모서리를 꾹꾹 누르며 몸을 뒤집는다. 불이 켜지지 않은 등을 보며 두 눈을 끔뻑거렸다.

 

 스가와라의 손가락은 희고 얇다. 고등학교 시절 배구를 했던 탓에 굳은살도 군데군데 박혀 있고, 보드랍다기 보다는 거칠고 단단하긴 했으나 그 뼈대 자체는 가느다랬다. 오이카와는 그런 스가와라의 손을 좋아한다. 그렇기에 일부러 손 크기를 자주 대어 본다거나, 툭 튀어나온 뼈 마디가 신기하다는 핑계로 자주 만지고는 했다. 얼마나 만져댔는지, 굳이 측정하지 않아도 그에 맞는 반지 호수를 알 정도라고 하면 말은 다 한 것이다. 자켓 주머니에서 케이스를 꺼낸 오이카와가 조심스레 뚜껑을 열었다. 두께가 얇고 별 다른 장식이 박히지 않은 심플한 링이 모습을 드러낸다. 올해에는 무엇이 갖고 싶다고 들은 기억이 없었기에 마음대로 결정해서 사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사심이 잔뜩 들어간 선물이다. 아마도 반 마디 작은 그 손 약지에 딱 맞을 둘레의 반지. 창가에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반지를 훑던 오이카와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온다. 꽃과 함께 주기에는 의도가 너무 투명하게 보이겠지. 결국 케이스를 굳게 닫고 다시 주머니 속에 꽂아 넣는다.

 

 약속 시간까지는 한 시간 정도가 남았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가까웠으니 아직은 여유로웠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오이카와는 버릇처럼 꽃 가게로 향했다. 매해 같은 날에만 찾아오는 오이카와를, 점원은 익숙하게 웃으며 맞이한다. 문을 열고 들어와 인사만 한 뒤 멀뚱멀뚱 서 있는 그에게 익숙하게 꽃 한 송이를 건넨다. 마치 방문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 일련의 행동들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애인 분이 장미를 좋아하시나 봐요."

 

 오이카와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지갑에서 현금을 꺼낸 뒤 점원에게 건넨다.

 

 "나중에 한 번 같이 들러 주실 수 있으신가요?"

 

 출입문을 열고 나가려던 오이카와가 몸을 반쯤 돌린다. 점원은 웃는 낯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듯 서 있었다. 장미를 좋아하는 상대는 애인이 아니었고, 그 상대인 스가와라 코우시와 이 가게에 함께 들릴 일이 과연 있을까 싶었으나 오이카와는 예의상 고개를 끄덕인다. 올 수 있으면 올게요. 그의 대답에 점원의 입에서는 내년을 기다리겠다는 말이 흘러 나왔다. 별다른 대답 없이 짧게 웃어 준 뒤 가게를 나선다. 또 다시 가슴이 욱씬거린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오이카와는 몇 번의 고민 끝에 결국 탁상 위에 장미 한 송이를 두고 나왔다. 말라 비틀어진 꽃 사이로 유일하게 생생한 붉은 빛을 내뿜는 장미는 머지않아 쌓여버린 다른 것들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겠지. 그 자리에 서서 망설이던 탓에 약속 시간은 맞추지 못할 것 같았다. 뛰기엔 너무 더웠고,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무거웠기에 천천히 걸었다. 그동안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으니까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애써 합리화를 하며 약속 장소로 향한다.

 

 아니나 다를까 스가와라는 먼저 도착해 오이카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해 오늘마다 비슷한 시간에 보았던 공원의 시계탑 아래. 그늘진 곳에서 멍하니 서 있던 스가와라는 공원 입구를 지나쳐 걸어오는 오이카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손을 크게 흔들었다. 곧바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진다.

 

 "늦어서 미안."

 

 "겨우 오 분인데 뭐. 난 작년에 삼십 분이나 늦었었잖아, 이 정도는 껌이지!"

 

 잔뜩 여름 햇살을 머금은 미소를 짓는다. 늘 그렇듯 카디건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고 왼쪽에 서서 발을 맞추어 걷는다. 시시콜콜한 일상 얘기가 전부였으나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모든 말은 어느 것보다도 흥미로웠고, 더욱 더 듣고 싶은 것들 뿐이었다. 6년을 이랬는데 질리지도 않나. 자문자답해 보아도 햇살을 닮은 얼굴을 보고 있자면 당연한 결론이 나온다. 질릴 리가 없지.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둔 케이스가 걸을 때마다 허리에 부딪혀 존재감을 상기시킨다. 지금은 일단 외면하며 번화가로 향했다. 일전에 스가와라가 가고 싶다고 했던 레스토랑에 갈 것이고, 공부로 인해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싶다고 했으니 가라오케도 갈 것이다. 스가와라의 생일이니, 스가와라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계획이었다.

 

 번화가를 걷는 도중에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가라오케에 들어가기 직전에도 오이카와의 눈에 밟힌 것이 있었으니, 바로 붉은 장미 꽃들이었다. 원래 이렇게 장미를 장식 용도로 많이 쓰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유난히 많이 보였다. 그렇기에 자신이 탁상 위에 두고 온 한 송이가 생각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느새 하늘은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고, 여전히도 오이카와의 머릿속에는 시든 꽃들 사이에서 생기를 띠고 있을 장미 한 송이가 맴돌았다.

 

 "토오루."

 

 "아, 응? 왜?"

 

 "무슨 일 있어? 오늘은 평소보다 더 멍한 거 같네."

 

 "평소보다, 라니. 평소에도 그런단 말이야? 날 그렇게 보고 있었다니 너무하네~"

 

 "뭐, 전혀 아니라고는 말 못하지!"

 걷다 보니 어느새 스가와라가 자취하고 있는 오피스텔 근처까지 왔다. 몇 걸음만 더 걸어가면 특별한 오늘 하루는 끝이다. 주머니 속 케이스는 여전히도 걸을 때마다 오이카와를 재촉하듯이 안에서 뒹군다. 빠른 걸음걸이에 맞춰 걷던 오이카와는 서서히 걸음을 늦추었고, 이내 가로등 밑에서 우뚝 섰다. 갑작스레 멈춘 탓에 앞서 걷던 스가와라가 고개를 돌린다.

 

 "왜 그래?"

 

 "…스가, 이리 와 봐."

 

 그 자리에 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어두운 골목에서 가로등 빛 하나에 의지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다. 

 

 "답지않게 진지한 얼굴이네,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무슨 일이 있기는 있어, 내가 널 좋아하는 거.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이었으나 이성의 끈을 붙잡고 간신히 삼켜냈다. 그리고는 평소처럼 능청스레 웃어 보인다.

 

 "아니라니까. 그냥, 까먹은 게 있어서."

 

 "뭔데?"

 

 오이카와가 자켓 주머니에 손을 넣어 케이스를 잡아 꺼낸다. 짙은 남색의 그것은 누가 보아도 반지 케이스였고, 스가와라는 그가 건네는 것을 아무런 말 없이 받았다. 하얀 손바닥 위에 얹어진 케이스는 곧 입을 벌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뽐낸다. 가로등 빛을 받아 더욱 더 반짝이는, 얇은 실버 링이 그토록 좋아하는 얇은 손가락 끝에 들린다.

 

 "스물두 번째 생일 축하해."

 

 "와 예쁘다…. 고마워, 토오루."

 

 검지와 엄지 손끝에 집힌 반지를 보며 스가와라는 환하게 웃었다. 공중에 들고 손을 이리저리 돌리며 감탄사를 내뱉은 뒤 곧바로 손가락에 가져다 끼운다. 왼손 약지 둘레에 맞춘 거긴 했지만, 솔직히 오이카와는 그 반지가 검지나 중지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래 알고 지낸 가장 친한 친구가 선물하는 반지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왼손 약지에 끼울 리 없다고 내심 단언했다. 검지나 중지에 넣은 뒤 맞지 않으면 그 다음이 약지겠지 싶었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그런 오이카와의 예상을 깨고 보란듯이 바로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껴 보니까 더 예쁘네. 어때, 잘 어울려?"

 

 손가락을 활짝 피고는 자신의 얼굴 옆에 갖다 대며 묻는다. 기대는 했으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행동에 오이카와는 당황한 듯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크기도 딱 맞네, 그렇게 내 손가락 좋아하더니 호수까지 맞출 수 있을 정도가 된 거야?"

 

 "…아니거든."

 

 "아니긴."

 

 이게 뭐야. 마치 프로포즈를 한 것마냥 부끄러웠다. 얼굴이 달아오른 듯 열이 나는 것 같다. 지금 당장이라도 손부채질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싶었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그럴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더욱 더 예상치 못한 말을 꺼낸다.

 

 "다른 건 또 없어?"

 

 "다른 거라니, 어떤 거? 뭐 갖고 싶었던 거라도 있어?"

 

 "아니~ 올해는 받을 수 있으려나 했는데."

 

 "뭐를?"

 

 "장미꽃. 네 침대 옆에 잔뜩 쌓인 거."

 

 오이카와는 순간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하는 듯했다. 꽃을 준비했으나 결국 건네지 못하고 쌓여만 간 것이 육 년이다. 그동안 한 번도 관련된 이야기는 꺼낸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알아 챈 것인지, 묻고 싶었으나 머릿속이 잔뜩 실타래처럼 엉켜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꽃이라니."

 

 목소리가 떨렸고 더듬기까지 했다. 긴장을 감출 도리가 없었다.

 

 "그거 나한테 주려던 거 아니었어? 전에 너 술에 잔뜩 취해서 정신 놨을 때, 내가 집에 데려다 준 적 있잖아."

 

 "그…랬나?"

 

 오이카와는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주량이 센 것도 있었으나 스가와라와 술을 마실 땐 결코 정신을 놓을 때까지 마시지 않았다. 혹시라도 술김에 고백하게 될까 봐. 분명 조심한다고 했는데 언제 그랬던 거지. 눈만 끔뻑이던 오이카와가 이내 짧은 탄성을 내뱉으며 눈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다. 기억이 났다. 작년 오늘, 그 날도 스가와라의 생일이었다. 눈을 떠 보니 집이었기에 술에 취했어도 알아서 잘 돌아 왔구나 싶었는데, 스가와라가 데려다 준 거였다니. 그렇다고 쳐도 장미 꽃만 보고 자신의 것이라고 단언하다니, 혹시 던져 보는 말인가 싶어 오이카와는 어색하게 부정을 해 본다.

 

 "네 거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치만, 맨 밑에 깔린 꽃에 붙어 있던 편지에는 내 이름 써 있던데?"

 

 망했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곳이 없는 말이었다. 육 년 전 가장 처음으로 준비했던 장미꽃 한 송이에 오이카와는 작은 편지를 붙였던 적이 있다. 스가와라 코우시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아주 정직하고도 올바르게 쓴 그 짧은 문장이 적힌 편지였는데 설마 그것까지 보았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끝까지 부정해 보려던 생각은 물거품이 되었다. 바로 눈 앞에서 장난스럽게 미소를 띠고 있는 스가와라 코우시 덕분에.

 

 "토오루는 그렇게 안 봤는데 많이 소심하구나? 줄 거면 꽃이랑 같이 주지 반지만 주고…, 로맨틱을 모르는 남자였네."

 

 눈을 가린 손을 뗄 수가 없다. 아마도 집에 두고 온 새빨간 장미와도 같은 색으로 달아올랐을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내 생일은 이제 오 분 남았는데, 올해도 못 받았으니까 내가 먼저 선수 칠 수도 있다?"

 

 "…선수를 치다니 무슨 소리야?"

 

 "토오루가 나한테 하려던 말 내가 먼저 할 수도 있다는 소리야. 이제 곧 토오루 생일이잖아?"

 

 스가와라의 생일과 한 달 정도 텀이 있는 자신의 생일을 떠올린다. 내가 하려던 말이라니 그게 뭔데? 하려던 말은 고백밖에 없는데, 그걸 스가와라 코우시가 왜? 온갖 의문만이 머릿속에 떠돈다. 그와 동시에 어딘가에서 스믈스믈 기대감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기대하면 안 되는데. 생각과는 다르게도 입꼬리는 올라갈 듯 말 듯 떨려온다.

 

 "이 반지 나 혼자만 끼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아? 이왕이면 같이 끼는 게 더 예쁘고 보기도 좋을 텐데."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다가와 눈을 덮은 손을 떼어낸다. 그러고는 잔뜩 붉어져 있을 얼굴을 마주하며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다.

 

 "토오루."

 

 "…응."

 

 "전철 끊겼을 텐데. 자고 갈래?"

 

 살며시 손가락만 얽었던 손은 곧 손바닥끼리 마주하고 뜨겁게 교차한다. 손가락 사이로 아직은 온기가 전이되지 않은 시원한 반지의 감촉이 닿았다. 오이카와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이 가기 전에 한 번 더 말해 줘."

 

 마주잡은 손을 들어 살짝 흔든 스가와라가 오이카와의 손등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댄 뒤 말했다. 여름에 태어난 햇살을 머금은 따뜻한 피부로 다정한 온기가 스친다.

 

 "…생일 축하해, 스가."

 

 "고마워, 토오루."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가로등 밑에 선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때, 6월 13일 23시 59분.

* 2018 Sugawara Koshi's Birthday art collaboration home-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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