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이스가] BALLOON
W. 다루다루이
깜깜한 교정을 거닐었다. 발디딤이 묘하게 가볍다.
칠흑같이 내려앉은 공기가 익숙하게 달라붙었다. 욕심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어 양껏 들이켜보았다. 역시 익숙한 냄새가 난다.
그저 특징을 잡자면 바닥에 깔린 대리석의 차가운 향이 전부겠지만 왜인지 그것보다 더한, 무수히 많은 자극들이 온몸을 덮친다.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의 싱그러움. 책걸상이 이리저리 끌리며 만들어낸 먼지의 부유. 사각거리며 넘어가는 책장과 통통 튀며 칠판을 두드리는 몽땅 분필. 그 잔잔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잠에 빠질 때면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머리칼을 쓸어주던 다이치의 단단한 손가락.
시고, 쓰고, 짜고, 달다.
아아, 이건 추억의 향수구나.
BALLOON
화려했던 봄고도, 영원할 것 같았던 고교생활도 막을 내렸다.
퇴장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까마득한 옛이야기처럼 아득한 울림이 강하게 전신을 강타했다.
그나마 지킬 수 있었던 옛 추억의 단면은 함께 영원을 약속한 다이치가 전부였다.
스가. 같은 학교는 무리더라도 꼭 같은 지역으로 진학하자.
고3 막바지, 마지막 진로 상담을 마치고 지망 학교들을 점검해 볼 때였다. 덤덤한 척 굴어보았다. 역시 제 속마음을 귀신같이 알아맞히는 다이치에게 숨기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떨어질까 봐 불안해?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건 다이치를 향한 질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하는 반문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사와무라 다이치는 '대지(大地)' 다.
모두를 지탱하는 지지기반. 그가 흔들리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것 없지만 쉽사리 초조해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제 사람이라 참 다행이었다.
그래, 우리 꼭 함께하자.
배구부 활동을 하면서도 성적 관리에 힘써두었던 게 다행이다. 무난히 도쿄권 내의 대학으로 진학을 결정했다. 서로 다른 학교였지만 버스를 타면 그럭저럭 걸리는 거리였고, 우리는 그 중간 지점에 얻은 1 LDK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싱글 대신 더블베드. 사이좋게 나란히 놓은 배게 한 쌍.
그릇도, 컵도, 수저도 모두 두 개씩. 모든 것이 새로웠다.
새로움은 설렘의 유의어이기도 하지만 다름의 의미를 지니기도 했다. 이질적임이 사라지지 않았다. 다이치와 함께 만들어 갈 길의 시작점에 섰는데 호기심보다는 초조함이, 두려움이 앞섰다.
그런 자신을 다이치도 모르지 않았다. 그는 가끔 나이에 맞지 않게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초월적인 눈빛을 했다.
다이치는 여전히 따스했고 풍요로웠다. 그의 품에 안기면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어느덧 익숙하게 서로에게 맞춰가는 박동을 느끼며 안심 속에서 잠들었다. 그러나 깨고 나면 다시 모든 것이 엉망이 된 채 하루를 살아냈다.
텅 빈 감각이 속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이번 주 주말에 같이 미야기로 내려갔다 오지 않을래?’
처음 맞는 방학이었다.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이기도 했다.
봄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지 이제 겨우 여름의 초입에 들어선 도쿄는 뭉근한 더위로 물들어있었다. 때아닌 장마 전선에 물 맞은 생쥐꼴로 추위에 골골 거리기도 했다.
곧 있으면 스가 생일이니까 같이 내려가자.
다이치는 자신과는 달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몇 번 미야기를 찾았었다.
썩 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내년에도 돌아오는 날이고, 이번에 꼭 가야 할까?
사실 무서웠을 뿐이다.
과거와 미래, 그 사이를 이어주는 현실 속에서 진퇴양난이 돼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화가 치밀었다. 그렇지만 실상이 그랬다.
다이치의 곁에 있어도,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어도 허기진 속이 자꾸 무언가를 갈구했다. 괜찮은 척 거짓된 가면을 써보았지만 그 너머의 속살이 너무도 아려왔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원인은 한 가지뿐이다.
시간을 되돌려서라도 돌아가고 싶은 가장 뜨거웠고, 강렬했던 그 순간이 애타도록 그리워서. 후회가 남도록 행동했나, 생각해보았다. 아니다. 뼈가 부스러지도록, 속의 것이 튀어나오리만치 열심히 배구를 했다. 함께 헤쳐나가는 시간들이 영광스러웠다. 그런데도 차마 다 타지 못했던 잔여물들이 화상을 입혔다. 되돌아가지 못할 거란 사실이 그토록 쓰린 생채기를 만들어 냈다.
다이치는 대학교 동아리에서 배구를 계속했다.
나는 배구공을 놓쳐버렸다. 더는 배구를 하지 못했다. 공을 만지는 손가락이 베이는 환상통에 시달렸다. 서포터로 감싼 무릎이 터질 듯 조여왔다. 코트 위로 마찰하는 배구화의 소음이 귀를 찢어버렸다.
소년에서 어른이 되는 시기. 주위의 모두가 적어도 겉보기에는 잘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과거를 곱씹으며 멈춰있는 건 자신뿐이라는 외로움과 자괴감에 사로잡혔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우카이 코치의 말이 이해됐다.
‘예전 기억을 망치기 싫으니까 안 돌아갈 거야.’
자신의 두려움은 조금 달랐다. 차마 그곳에서 발견할 허무하게 비어버린 자신이 싫었다. 모두의 땀방울이 스며든 그곳이 조금이라도 변해버렸다면, 예전과 달리 나를 채워주지 못한다면.
내가 설 자리가 사라져 버렸다면.
마지막 보루에서의 거부와 단절을 경험하면 정말 무너질 것 같아 결국 겁쟁이처럼 도망치는 걸 선택했다.
“스가.”
“…”
“스가와라 코우시.”
“… 응?”
이따금 장난 삼아 사와무라 다이치. 하고 불렀다. 농담으로라도 그는 성명 전체를 읊는 것을 질색했다. 우리 사이에 있지도 않은 거리감을 벌리는 것 같아서 싫어. 그 후로는 서로의 그렇게 부르지 않게 되었다.
한동안 들어보지 못한 단호한 음성에 눈이 번쩍 뜨였다.
“나 여기 있어.”
그 짧은 한 마디는 많은 것을 내포한다.
너의 균열을 혼자 감내하지 말라는 듯이, 덤덤하지만 상냥한 음성이 다정하게 꾸짖었다.
너는 강하고, 너의 곁에는 내가 있어.
내가 모든 걸 받치느라 힘에 부치면, 그런 나를 옆에서 지탱해주는 게 너니까.
그러니까 너는 결코 나약하지 않아.
너는 너야, 스가와라 코우시.
온전한 너.
나의 자랑스러운 스가.
아아. 그러네. 네 말이 맞네, 다이치.
살포시 어리는 미소 위로 뜨끈한 무언가를 토해냈다. 그 시절, 차마 다 타버리지 못했던 앙금을 버리고 떠날 수 없어 가시 품은 고통 속에서도 미련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그것들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화상을 입을 정도로 높은 온도에도 다이치는 겁먹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따스한 품을 빌려주었다.
셔츠 자락을 꼭 움켜잡았다. 처절하게 무너져 내렸다. 규칙적이게 토닥이는 손길에 너절해졌던 빈속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예쁘장하다는 소리를 달고 살았다.
그저 털털하고 장난기 많은 소년일 뿐인데, 섬세하고 유약할 거라며 멋대로 단정 지었다.
스가와라 상이 그런 성격일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만… 어여쁜 후배들이 졸업식 때 들려준 롤링페이퍼 위에는 선 곧은 무명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이거 백 퍼센트 츠키시마일 거야! 3학년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얼마나 깔깔댔는지.
어쨌든 그런 오해가 싫어 점점 그런 성격과는 동떨어지게 행동했다.
으레 기념일에 무심한 남자애들처럼 생일도 요란스럽게 축하하지 않았다. 조용하게, 무덤덤하게 넘겨버렸다. 그게 차차 버릇이 돼버렸는지 자신에게 생일이란 건 정말 별거 없는 평범한 날이 됐다.
아침 훈련에 가는 아들을 위해 꼭두새벽부터 고생했을 엄마의 생일상을 꼭꼭 씹어 삼켰다. 슬슬 몰려오는 더위의 잔향과 함께 감촉 좋은 공을 통통 튕겼다. 이따금 등을 툭 치며 축하하는 친구 녀석들과 모여 앉아 몇 개 선물로 들어온 주전부리들을 까먹었다. 가끔 가방을 뒤지다 보면 전날 늦게 들어온 아빠가 몰래 찔러 넣어준 용돈이 있었다. 아싸, 땡잡았다! 털레털레 들고 가라오케나 피씨방을 전전하며 남은 하루를 보냈다.
그 나름의 특별함은 있었지만 대게 그저 그런 하루의 연속이었을 뿐이다.
그런 자신의 생일에 특별함을 부여해준 건 다이치다.
“오늘 너 태어난 날이잖아.”
아직 사귀기 한참 전의 일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서로 알게 된 지 고작 한두 달 밖에 되지 않았다. 근데 제 생일을 어떻게 안 건지 그날 아침 체육관 문을 열자마자 커다란 생크림 케이크와 엉성한 장식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배구부 부원들이 자신을 맞이했다.
스가와라, 생일 축하한다!
하나씩 들려주던 선물 가운데 제일 웃겼던 건 역시 매운 후추 센베이.
너 매운 거 좋아하잖아. 언제 식성까지 꿰뚫고 있었는지. 차마 학교에 마파두부는 못 가져왔다고 멋쩍게 뒷머리를 긁는 다이치가 귀여웠다. 단정하게 포장된 박스 안에는 뻘건 가루 범벅인 센베이와 다른 과자들이 가지런히 들어있었다. 그중 제일 빨간 걸 입에 쏙 넣어줬더니 어찌나 역정을 내던지.
전심전력 화내는 다이치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하하! 사와무라, 너 얼굴이 왜 그러냐?’
‘크큭, 다이치 식은땀 좀 봐. 너 입에서 불 나오는 용가리 같아, 푸하하하!’
‘다이치! 우와아, 다이치?!! 너 눈에 핏줄 터졌…!’
‘시끄러워, 아사히!’
그날 밤, 학교서부터 복통에 시달려 데굴데굴 굴러다녔다는 투정 어린 문자와 함께 다시 건네진 진심 어린 생일 축하 메세지.
온종일 미소가 떠나가지 않았다.
아침 훈련에 부원들과 함께한 생일 파티부터, 정성 들여 써준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보낸 오전.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자꾸 우그러뜨리려는 반 친구 녀석들로부터 선물을 사수하느라 난리판을 벌인 오후.
그리고 생일이 끝나기 전인 지금까지도.
그래, 그날은 내가 태어난 날이기도 했지만, 너를 좋아하게 된 날이기도 했어.
그로부터 정확히 1년 후.
집 방향이 다른데도 굳이 데려다주겠다며 우기는 다이치에게 타박을 놓았다. 축하는 이미 많이 해줬으면서, 얼마나 더 멋있어지려고. 사실은 너무 기뻤는데, 또 좋아하는 사람 고생시키기는 싫어 투정 부린 거였다.
스가, 넌 나랑 같이 가는 게 싫어?
갑자기 진지해진 다이치에 당황해서 더듬더듬 진심을 털어놓았다. 어, 어? 아니… 기쁜데, 너 고생하잖아. 그 수줍은 대답에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다이치의 얼굴이 마냥 붉었다. 때마침 어여쁘게 지고 있는 노을의 색이 옮았나.
‘스가… 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 좋아해.’
그날 최고의 선물은 다이치의 고백이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 박제되어 있었다. 서로의 시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건 내가 바보같이 울어버린 후였다.
나도, 나도 좋아해 다이치.
그렇게 내가 태어난 날이자, 짝사랑을 시작한 그 날은 우리 둘의 결실이 개화한, 우리 두 사람의 날이 되었다.
“스가. 난 오늘 애들 주말 연습 보고 올 건데, 너도 같이 갈래?”
“아니. 난 괜찮아. 잘 다녀와서 애들 어땠는지나 말해줘.”
이곳까지 와서 한발 물러서는 못난 애인을 다이치는 굳이 타박하지 않았다. 역시 상냥하네.
다녀올게.
다이치를 배웅했다. 멀어져 가는 그의 옆으로 기다랗게 나있는 담벼락이 보였다. 그곳에서 마주보는 사랑을 시작했다. 시간이 돌고 돌아 이제 그도 자신도 교복 차림이 아니게 되었다. 어찌나 이상하던지.
비워진 채 걸어가는 네 옆자리가 얼마나 후회가 되던지.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 다이치가 다시 제안해왔다.
이제 적당히 어둡기도 하고, 학교에 아무도 없을 텐데. 우리 한 번 가보지 않을래? 머뭇거렸지만 그래. 함께 집을 나섰다.
깍지를 끼고 거니는 길에는 예전의 내가 동행했다.
등교하는 나. 집으로 돌아오는 나.
대회에서 이기고 설레 하던 나. 패배의 씁쓸함을 감추며 주먹을 꾹 쥐어보는 나.
다이치와의 데이트를 위해 몇 번이고 길에 멈춰서 어색하게 머리를 매만지던 나까지.
하나하나 더듬다 보니 다이치가 일부로 손을 놓아준지도 모른 채 계속 앞으로 걸었다.
졸업한 반으로 몰래 스며들었다.
이제는 다른 누군가의 것일 흠집난 목재 책상을 사뿐히 쓸다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고작 일 년 남짓한 새에도 달라진 점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곳에서 만들었던 시간은 사라질 리가 없는데. 이미 단단하게 쓰인 추억은 결코 변색될 리가 없는데 말이다.
다른 곳에서 배구를 하면 과거가 어그러질까 봐 놓아버린 자신과는 다르게 아마 다이치는 알았으리라. 그래서, 다른 곳에서도 그렇게 열심히 일 수 있었겠지.
나, 참 바보 같네.
어쩐지 스스로를 좀 먹어가던 벌레가 사라진 것 같았다. 후련했다. 이제야 출발선 앞에 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늦깎이 스타터지만 두렵지 않았다.
잘게 웃음을 털어내며 이 모든 걸 깨닫게 해 준 연인을 찾아 나섰다.
지금 그 무엇보다, 다이치를 끌어안고 싶다.
끼익 소음을 내며 열리는 철문은 기름칠이 벗겨져 뻑뻑했다. 아사히랑 타나카 부려먹어서 기름칠 다시 해놨었는데. 또 얼마나 험하게 여닫은 건지, 원. 남은 후배들은 죄다 말괄량이들이니 문이 혹사당했을 게 뻔했다.
아직도 눈에 선한 그 애들이 보고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다이치 따라가는 건데. 또 어설픈 후회나 해본다.
체육관 내부는 작고 높게 난 창으로 쏟아지는 달줄기가 빛의 전부였다. 바깥 어느 곳보다 어두워 사물 분간이 힘들었다.
차라리 그게 편했다.
옛 감각을 되짚어보았다.
짭짤하게 퍼지는 땀 냄새. 이곳저곳 쏟아버려 끈적하게 눌어붙은 드링크의 인공적인 단맛. 단 한 번도 허투루 친 적 없던 공이 바닥과 닿으며 만들어내는 마찰음.
소심하게 벌벌 떨다가도 살벌하게 스파이크와 서브를 떼려 넣던 아사히와 차분하게 머리를 넘기며 모두를 관찰하는 시미즈.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타오르는 불꽃같은 후배들과 그런 그들을 말리며 골머리를 썩는 새로운 기둥 엔노시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 속에 사뭇 뿌듯함이 서려있는 코치님과 부모처럼 따스하게 바라봐주던 감독님까지.
모두. 모두 그리웠다.
근데 우습게도 그 와중에 제일 보고 싶은 사람은 다이치다.
3년이란 시간은 짧지 않다. 이곳에서 그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만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부원의 생일을 정성껏 챙기던 다정한 사람.
고백할지 말지 한참을 고민하다 뜨겁게 달아오른 채로 좋아한다 소리치던 어리숙한 소년.
입김을 휘날리며, 땀을 뻘뻘 흘리며 계절의 색을 짙게 머금은 채 자물쇠를 허겁지겁 풀어내던 우리의 주장.
내 기억 속 변함없이 사랑스러운 내 연인.
사와무라 다이치.
순간 팟! 하고 불이 켜졌다.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고 깜빡깜빡 점멸하는 시야 대신 익숙한 음성들이 귓가를 간질였다.
“스가와라 상!”
“스가와라 군!”
“스가와라!”
“스가!”
뭐야, 이거…
이게 대체…
“생일 축하해요!”
“생일 축하해!”
이제야 선명해진 눈에는 요상한 고깔모자와 봄고를 마지막으로 물려줬던 옛 유니폼을 입은 녀석들이 서있었다.
힘차게 터뜨린 폭죽의 잔해들이 레드카펫처럼 바닥에 흩뿌려진다. 매캐한 화약 연기 사이로 보이는 알록달록 꾸며진 파티 용품들과 크림이 조금 녹아 엉성하게 변해버린 생크림 케이크. 저에게로 뛰어들어오는 형형색색의 머리통.
조금 더 자라난 히나타와 니시노야가 격렬하게 달려들어 셋이서 함께 엉덩방아를 찧었다. 봐주는 것 없이 타나카가 제일 화려해서 되려 유쾌한 고깔모자를 잽싸게 씌웠다. 자석처럼 들러붙는 녀석들을 떼어내느라 고생하는 엔노시타와 나리타, 키노시타. 호통치는 다이치와 괜찮냐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아사히. 부드럽게 웃음 짓는 시미즈와 예쁘게 손 흔드는 야치. 그 옆에서 반갑다는 듯 고개를 푹 숙여 보이는 야마구치까지.
눈에 밟히곤 했던 카게야마와 츠키시마도 이제는 겉돌지 않았다. 따뜻한 물을 만나 사르륵 퍼지는 설탕처럼, 제대로 무리에 녹아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선배가 반가워서인지, 아수라장이 된 꼴이 부끄러워서인지 벌겋게 달아오른 볼이 딱 제 나이 또래처럼 어리숙해 보였다. 다행이네. 더는 어른인 체하지 않아서.
새로 들어온 일학년들은 어색하게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저렇게 기가 약해서 어째. 벌써부터 고개 드는 걱정은 아사히를 닮아버렸나. 고민을 물린 채 안녕! 최대한 크게 반겨주었다.
수줍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퍽 귀여웠다.
모든 게 바뀌었지만, 여전하네.
그대로야. 내가 그리워했던 그 날들처럼.
“스가 상…?”
팡파르처럼 뻥하고 터진 폭소 위로 후두둑 물줄기가 떨어졌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계속 웃었다.
정 많은 히나타가 엉엉 울면서 숨 막힐 정도로 껴안아왔다. 그런 저들을 보는 타케다 선생님이 코를 훌쩍였다. 아아, 정말 다들. 산발적으로 들려오는 코 먹는 소리가 화음을 이루는 여러 개의 웃음소리 위에 살포시 얹어졌다. 중구난방 제멋대로.
카라스노답다.
내가 첫 발을 내딛고, 이만큼 자라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떠났던 소중한 까마귀 둥지.
엷게 뜨인 눈꺼풀 사이로 비치는 다이치도 코가 잘 여문 딸기 같다. 코 밑을 연신 비벼댔다. 부끄럽거나 울음이 날 때면 나오는 그만의 버릇이다.
너는 얼마나 날 더 감동시킬 셈이야. 얼마나 특별하게 만들어서, 일 년 내내 산타를 기다리는 아이 마냥 발을 동동 구르게 할 셈인 거야.
다이치는 자꾸 텅 비어있는 자신에게 뜨끈한 숨을 불어넣어준다. 하나도 기대하지 않았던, 별날 것 없던 나날들을 채워주며 서서히 그 크기를 키워나간다. 쭈글쭈글 매가리 없던 고무가 공기와 함께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는 속이 꽉 찬 풍선처럼.
네 사랑의 방식은 항상 그렇다.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야금야금, 그렇지만 시간의 흔적을 밟다 보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하게 자라나 버리는 사람. 그런 사랑을 주는 사람.
다이치. 너는 나에게 그런 연인이야.
“스가와라 상. 이거 안 불면 못 먹는다고요.”
불퉁한 표정의 츠키시마가 착실하게 들고 있던 케이크를 쑥 앞으로 들이민다. 벌써 반쯤 녹아버린 촛농이 점점이 하얀 도화지 위로 그림을 그려버렸다. 에이, 그래도 소원은 빌어야지! 옆에서 터져 나온 채근에 뭘 바라지, 잠시 고민해본다.
하지만 생각은 찰나였다. 후우. 재빠르게 촛불을 불어 껐다.
에엑?! 스가 상, 소원 안 비셨죠!
타박하는 타나카의 옆구리에 스가와라 표 손날 비껴 치기를 한 대 먹여버렸다. 아악, 아파요! 무너지는 선배의 몸을 받아낸 카게야마의 동글동글한 머리통을 부드럽게 쓸어줬다. 그랬더니 그 위로 날아다니는 물음표들이 역시 그답다.
끔찍한 표정을 지으며 배를 쥐어잡는 아사히는 덤이다. 여전히 엄살쟁이, 네거티브 수염 자식.
“그치만 그깟 소원 다 필요 없는걸!”
“여기 다 있잖아!”
네? 되묻는 애들 틈에서 유일하게 다이치만 화통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쉽사리 멈추지 않은 너털웃음이 전염된 건지 다들 체육관이 떠나갈 만큼 커다랗게 터져버렸다.
여기 다 있잖아.
그토록 내가 찾아 헤매던 것. 미칠 듯이 보고 싶어서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 바보 같은 짓만 하게 만들었던 것.
그만큼 소중한 보물.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나무 둥지 위에 가족처럼 사이좋게 모여 앉은 어여쁜 새끼 까마귀들.
그중 대장 까마귀, 사와무라 다이치.
그 옆을 지키는 나.
마주친 그를 향해 함박웃음을 선물했다. 물기에 절어 엉망진창인 얼굴에도 뭐가 그렇게 예쁜지 아까보다 한층 달아오른 두 볼이 귀여워 킥킥대버렸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녀석들 위로 벼락처럼 내려앉았다. 품 속으로 꽈악 끌어당겼다.
쏙 안겨버린 히나타와 다이치가 카게야마와 야마구치, 엔노시타를 함께 끌고 왔다. 그 주위로 니시노야와 타나카가 나머지 3학년들과 서성대는 1학년들에게 손짓했다. 뒷정리를 하고 있던 츠키시마도 원 주위로 다가왔다.
뒤에서 저를 끌어안으려던 아사히가 ‘저리 가, 수염!’이라는 다이치의 공격을 직격으로 맞고 녹다운됐다. 그런 그에게 카메라 삼각대를 쥐어준 감독님이 코치님, 매니저들과 함께 서면서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냈다.
“아사히, 얼른 누르고 와!”
“어어! 됐다, 됐어!”
자, 하나. 둘. 셋. 찰칵!
“오늘 진짜 행복하네!”
한바탕 신나게 놀아재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자정에 가까워진 늦은 시간이라 거리는 한산했다.
도쿄보다 좀 더 습한 날씨에 저절로 땀이 배어 나왔지만, 선물이라며 와장창 들려준 쇼핑백과 선물 꾸러미들을 떠안은 팔이 저릿저릿 아파왔지만.
나도, 다이치도 함께 맞잡은 손을 절대 놓지 않는다.
“다이치.”
“응?”
“자꾸 이렇게 스케일이 커지면, 내년 생일에는 어쩌려고 그래?”
“글쎄. 내년에는 빌딩을 통째로 빌려야 하나.”
“우리 다이치, 돈 많이 벌어야겠다.”
농담 섞인 대화를 하며 걷아보니 집 근처 공원이 보였다. 스가, 우리 잠깐 저기서 쉬었다 갈까?
벤치 뒤에 세워진 시계탑이 11시 58분을 가리킨다.
짐을 내려놓고 부어오른 손을 탈탈 털어내는 동안 1분이 금세 지나갔다.
11시 59분.
여태껏 누려본 날들 중 가장 행복하다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오늘이 거의 끝나간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스가.”
“응, 다이치.”
“… 코우시. 생일 축하해.”
어색하지만 진심 어리게 이름을 불러준 사랑스러운 입술이 다가온다. 달콤하다. 서서히 좁혀지던 간격이 마침내 하나의 어긋남도 없이 맞물린다.
댕. 댕. 댕.
다사다난했던 생일의 종말.
그런데도 슬프지가 않아.
그건…
“사랑해, 코우시.”
평생의 행운을 다 써버려도 갖지 못할 네가 내 곁에 있으니까.
내 하루를 항상 생일처럼 만들어줄 너라는 감사한 선물과 함께니까.
“사랑해, 다이치.”
사와무라 다이치와 영원을 약속한 사람이 바로,
나.
스가와라 코우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