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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스가] 너의 시작과 끝에서

W. 제로

   “그래서 저에게 죄를 물으러 온 건가요?”

 


   하얀 날개를 펄럭이는 천사가 창가를 넘어 스가와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내 날개를 감춘 천사는 망가진 인간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채 마르지 못했던 눈가에서 떨어진 눈물이 천사의 손을 적셨다. 놀란 천사가 잠시 손을 떼었다가 다시 마른 볼을 매만졌다. 그 손길은 넘치는 눈물만큼이나 애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돌연 스가와라의 앞에 나타난 이 아름다운 존재는 인간의 영혼을 감시하는 천사라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스가와라는 종교가 없어서인지 천사나 악마라는 것에 믿음이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와 이제껏 본 적 없는 새하얀 날개를 가진 존재를 천사 말고 달리 부를 이름이 없었다. 단지 스가와라에겐 그뿐이었다. 오히려 갑작스러운 천사의 방문이 달갑지 않은 편이었다. 스가와라는 천사의 손을 뿌리치며 올곧은 시선으로 그를 마주하였다.

 


   “인간은 어쩌면 이렇게 무지몽매할까?”

 


   천사는 대답을 바라지 않는 혼잣말을 하며 스가와라의 방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나풀거리며 춤을 추듯이 허공을 가르던 천사의 손은 세워져 있던 물건들을 모조리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둔탁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반복적으로 울렸고, 금세 바닥은 형태를 알 수 없는 물건들로 난잡해졌다. 그러나 스가와라는 천사를 말리지 않은 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깨진 유리컵의 파편이 날아왔으나 놀란 기색조차 없었다. 마침내 좁은 방 안을 돌아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온 천사는 낡은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천사는 경이로울 정도로 맑은 미소로 태연하게 스가와라의 현실을 부수었다. 스가와라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으나 그 미소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그나마 익숙한 자신의 방이었기에 동요를 감추고 천사를 마주하고 있는 스가와라였다.

 

   이번에는 천사의 입에서 질 나쁜 농담에 가까운 말이 들려 왔다. 스스로 질문을 했으니 스스로 답을 찾아라. 거만해 보이는 말이었으나 정작 그의 태도는 퀴즈 게임을 기대하는 순진한 아이 같았다. 덧붙여 천사는 원활한 대화를 위한 것이라며 스가와라에게 자신을 오이카와 토오루라고 부르게 했다. 성경에 나오는 천사의 이름과는 많이 동떨어진 울림이었다. 그 꼴이 마치 무지하다고 나무랐던 인간을 흉내 내는 것처럼 보여 스가와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애초에 스가와라는 커다란 모순을 느끼고 있었다. 천사는 죄라고 하는 게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인간 사회가 정해 놓은 규칙을 어기는 것이 죄인가? 아니면 인간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따로 만든 죄라는 게 있는 것인가? 스가와라는 이도 저도 아니라면 본인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그런 스가와라를 간파하기라도 했는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아주 오래전부터 봐 왔어. 거짓말이라면 통하지 않는다는 경고와 같았다. 그래서 스가와라는 솔직하게 말했다. 고등학교 때, 친구를 심하게 질투했던 적이 있노라고. 똑같은 일을 해도 언제나 스가와라의 쪽이 우수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칭찬과 주목을 받는 쪽은 스가와라가 아닌 친구였다. 어린 마음에 심술이 났던 스가와라는 친구의 물건을 일부러 감추거나 뒤에서 몰래 이간질을 했었다. 스가와라에게 있어서는 늘 후회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죄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헌데 오이카와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걸로 심판을 받는다면 세상에 남은 인간은 없어.”
   “스스로 찾으라고 했으니 제가 죄라고 생각하면 그게 죄가 되겠죠.”
   “아니. 그것보다 다른 게 있잖아. 응? 너의 감정 깊은 곳에 있는 거.”

 


   네가 감추고 있는 거. 파르르 스가와라의 속눈썹이 떨렸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말을 못 들은 척, 눈을 닫았다. 하지만 보기 좋게 오이카와에게 흔들려 버린 스가와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자 언제 움직인 건지 스가와라의 앞에 선 오이카와가 입술로 손을 뻗어 왔다. 예쁜 입술이 망가진다며 이를 세우지 못하게 한 오이카와의 행동을 스가와라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스가와라의 입술은 이미 부르트고 터져서 피딱지가 앉은 지 오래였다. 그리고 눈을 뜬 스가와라는 공들여 만든 예술품 같은 오이카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스가와라는 그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죄라고 치부해버릴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인간이건, 천사건 아니 그 어떤 대단한 존재가 이 감정을 죄라고 불러도 스가와라 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스가와라가 그렇게 말하자 오이카와는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즐거운 얼굴로 손뼉을 쳤다. 시끄러운 박수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박수 소리가 끊김과 동시에 오이카와는 전에 없이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감정이 뭔데?”

 


   사랑이었다. 모두가 죄라고 부르는 스가와라의 감정은 사랑이었다. 사랑에 빠지는 건, 단 몇 줄로 표현한 연애 소설을 읽는 만큼 순식간이었다. 눈만 마주쳐도 심장이 뛰고, 일상적인 대화에서조차 의미를 부여하며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스가와라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스가와라의 마음을 가져간 상대는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늘 함께 있었던 쿠로오였다. 처음에는 이상한 머리 모양을 한 가벼운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쿠로오는 가볍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을 끌어모으는 리더십이 강했고, 자신의 주변을 돌볼 줄도 알았다. 스가와라와 가까워졌을 때도 늘 의견을 묻고,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써 주었다. 스가와라가 조별 과제 때문에 동기들과 사이가 틀어졌을 때에도 쿠로오가 나서서 오해를 풀어 주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깊은 우정이라고 느꼈던 호감은 다른 쪽으로 변해 있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감정을 깨닫고 난 후, 필사적으로 친구 연기를 지속했다. 아무리 예전보다 유연해진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해도 동성애자를 향하는 시선은 여전히 따갑기 일쑤였다. 그러므로 스가와라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는 감정을 꾹꾹 눌러 참았다. 평생 쿠로오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줘도 그저 옆에만 있고 싶었다. 그러나 감정이라는 것은 쉽게 다룰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스가와라는 어느 날부터인가 쿠로오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여유롭게 대처하던 쿠로오가 작은 일에도 당황하고, 실수를 반복했다. 게다가 심각한 얼굴로 자주 한숨을 내뱉었다. 걱정된 스가와라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쿠로오는 얼굴을 붉히며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고백했다.

 

   그 후로 쿠로오는 스가와라를 볼 때마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정도는 감수하고 있었을 텐데 밀려 나온 서러움은 스가와라의 감정을 멋대로 폭로해버렸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지만, 스가와라는 한 편으로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겼다.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 깔끔하게 끝내고서 진정한 친구로 쿠로오의 옆에 남고 싶었던 스가와라였다. 그렇다면 모두 좋은 추억으로 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처음 느껴 본 사랑은 비록 처음부터 나쁜 결말로 정해져 있었지만, 행복했던 순간이 더 많았다. 뒤에는 아플 일이 더 남았을지 몰라도 그게 쿠로오라면 스가와라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쿠로오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었다. 새빨개진 스가와라의 두 눈이 다시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역겨우니까 저리 꺼져.”

 


   당시 쿠로오가 했던 말이 오이카와의 목소리로 다시 재생되었다. 스가와라의 눈에 매달려있던 눈물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렇게 스가와라는 쿠로오와 멀어지게 되었다. 쿠로오의 일상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스가와라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스가와라도 그런 말을 들은 이상 쿠로오와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같은 과였기 때문에 완전히 얼굴을 안 볼 수는 없었다. 어쩌다 우연히 쿠로오의 옆자리에 스가와라가 앉기만 해도 그는 있는 대로 얼굴을 구겼다. 대놓고 스가와라를 피해 다녔고, 있어도 없는 사람처럼 대하였다. 스가와라는 점점 쿠로오와 같은 공간 안에 있는 게 힘들어졌다. 그저 자신이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 쿠로오를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울고 있는 스가와라를 흘겨보던 오이카와가 탁자 위에 있던 팔찌를 손에 들었다. 이리저리 팔찌를 만지며, 눈앞에 가까이 가져가기도 하고 멀리 떨어뜨리며 특별할 게 없는 물건을 관찰하고 있었다. 잠시 뒤, 오이카와가 양손에 팔찌를 나눠 잡았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서로 반대 방향으로 팔찌를 당겼다. 당연하게 끈이 끊어지고, 장식되어 있던 구슬이 요란하게 바닥을 두드리면 추락했다. 사방으로 굴러가던 구슬 하나가 스가와라의 발가락을 톡 치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작고 투명한 구슬 안에 갇힌 스가와라가 눈물을 닦으며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 있었다.

 


“바라는 대로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건 내 분야가 아니야. 악마라도 소개해 줄까?”
“아니요. 나만 바라는 일은 좋아질 수 없어요.”
“그렇다면?”
“내가 사라져서 쿠로오가 행복하다면, 그거라면 모두 웃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신의 감정은 죄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던 스가와라였지만, 쿠로오를 볼 때마다 느끼는 죄악감을 지을 순 없었다. 결국엔 누구도 말하기 전에 스가와라가 스스로 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억지로 밝은 표정을 만들어 내는 스가와라를 보다가 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의 손에 놓인 물건은 날이 선 단검이었다.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스가와라에게 다가간 오이카와가 그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네가 기뻐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 스가와라는 망설임 없이 단검을 가져갔다. 칼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바로 상처가 생기고, 핏방울이 맺혔다. 오이카와가 고개를 숙여 갈라진 스가와라의 살결을 핥았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뜨거운 피가 몸의 감각을 고양했다. 그것은 어쩐지 스가와라가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넘겨받은 듯했다.

 

   여전히 아름답게 웃고 있던 오이카와는 칼이 들린 스가와라의 손을 맞잡아 그의 목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스가와라를 유혹하는 것처럼 고통은 없을 거라고 말해 왔다. 그때야 스가와라는 진심 어린 미소와 함께 오이카와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오이카와가 손을 놓자 날카로운 쇠붙이가 연약한 살결을 가르고 스가와라의 내부로 들어가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흔들림 없이 그 광경을 모조리 주시하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정말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지, 그대로 목을 그어버렸다. 피가 튀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으나 스가와라의 몸에서는 한 방울의 피도 나오지 않았다. 거기다 방금 목을 그은 사람임에도 하얀 목은 여전히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러나 툭 하고 떨어진 칼과 함께 스가와라의 몸이 시체처럼 축 늘어졌다. 날개가 다시 펼쳐지고, 오이카와는 조심스럽게 미동 없는 스가와라를 끌어안았다.

 

 

   “희생마저 마다치 않는 감정이 죄일 리 없잖아. 오히려 질투 날 정도로 사랑스러워.”

 


   오이카와는 스가와라가 태어나던 날부터 그를 지켜봐 왔다. 그가 어떻게 자랐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부모보다 스가와라 본인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스가와라가 처음 사랑에 눈을 떴을 때도 스가와라는 몰랐으나 오이카와가 곁에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남자에게 스가와라는 마음을 빼앗겼다. 오이카와는 그때부터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에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쿠로오를 사랑하는 스가와라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여서 오이카와는 조금만 더 그를 바라보기로 했다. 우습게도 오이카와가 봤던 어떤 것보다 숭고하던 스가와라의 사랑은 점점 그를 비극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스가와라가 고통스러워할수록 오이카와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이카와는 성인이 된 스가와라의 생일이 돌아오는 날, 멋진 선물을 주기로 하였다. 한없이 따뜻한 눈으로 스가와라를 내려다보던 오이카와가 그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처음으로 주는 생일 선물인데 마음에 들어?”

 


   눈을 감고 있는 스가와라의 입가엔 근래에 볼 수 없던 평안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오이카와는 티 없이 맑던 스가와라의 웃음이 다시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제야 드디어 다시 마주하게 된 얼굴인데 오이카와는 좀처럼 웃을 수가 없었다. 식어가는 스가와라의 얼굴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이 감정을 대체 뭐라고 해야 하면 좋을지 오이카와는 몰랐다. 스가와라는 분명 눈을 감는 순간에도 쿠로오를 떠올렸을 것이다. 오로지 쿠로오 테츠로가 행복하길 바라면 선택한 죽음이었다. 그 죽음을 만들어낸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지만,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는 여전히 식지 못하고 있었다. 칭송받는 대천사인 오이카와가 죄 없는 영혼을 죽여버렸다. 그러나 오이카와에겐 후회가 없었다. 끝까지 이쪽을 보지 않더라도 스가와라가 다시는 고통스럽지 않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스가와라를 놓칠세라 그를 꽉 껴안고 있던 오이카와의 하얀 날개가 서서히 검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결국, 완전히 빛을 잃어버린 오이카와가 힘겹게 스가와라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생일 축하해. 내 사랑스런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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