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그 단 꿈
[오이스가] 夏、その甘い夢。
W. Q t'aime
오늘 분명 좋은 날인데, 분명 기쁜 날인데. 최고로 행복해야 하는 날인데, 분명 그래야 하는데!
“야호, 상쾌군 안녕~.”
왜 저 자식이 여기에 있는 거야!!
-夏、その甘い夢。
“세이조 주장이잖아?”
“무슨 일로?”
본능적으로 적개심을 띤 스가와라를 대신하여 다이치와 아사히가 오이카와를 맞았다. 표정이 굳은 스가와라는 오이카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반면 생글생글 웃고있는 오이카와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상쾌군 보러왔지~오늘 내가 상쾌군 좀 빌려도 될까?”
“우. 리. 스가한테는 무슨 볼 일이실까?”
다이치가 ‘우리’를 강조하며 웃으면서 말했다. 아는 사람만 안다는 저 살벌한 미소, 하지만 오이카와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여전히 생글생글이었다. 아니, 오히려 여유로워 보였다.
“그건 상쾌군한테만 알려줄 거야. 상쾌군, 얼른 따라오라구!”
오이카와는 다이치와 아사히 뒤에 숨어있던 스가와라를 단숨에 붙잡아 끌고 갔다. 당황하여 버벅거리는 사이 스가와라는 남은 두 명과 저만큼이나 멀어져버렸다. 앞을 보니 오이카와의 듬직한 등이 보였다. 오이카와에게 잡힌 손목 부근이 뜨거웠다.
“하……하……너, 말이야……뭐 하는 짓이야?”
“휴―, 상쾌군 납치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꽤 먼 거리를 달려 숨이 찬 스가와라는 헉헉거리며 물었지만, 손바닥으로 이마를 슥 훑어 땀을 걷어낸 오이카와는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을 뿐 멀쩡해보였다. 괜히 더 분한 마음이 든 스가와라는 얼른 숨을 진정시키고 오이카와와 눈을 맞추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래에서 위로 노려보았다. 오이카와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 지, 아까부터 계속 생글생글 모드를 유지하고 있다.
“상쾌군, 나 목 말라. 음료수 좀 뽑아주라.”
“하?”
“난 여기 앉아 있을게. 저 쪽에, 공원 입구 바로 옆에 자판기 있어. 오이카와 씨는 사과맛 요구르트로 부탁할게.”
“이봐, 오이카―”
“아, 혹시 잔돈이 없어? 자, 여기.”
스가와라는 손바닥 위에 올려진 100엔짜리 동전 두 개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늘진 곳에 있는 벤치에 그새 드러누운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가방을 배고 편한 자세로 누워 휘파람을 불어 대는 오이카와를 보고 있자니, 더 화가 끓어올랐다. 좋아, 어디 한 번 제대로 어울려주지.
“이봐, 일어나. 마셔.”
요구르트와 본인의 음료수를 뽑아 온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가슴팍에 요구르트 팩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눈을 감은 채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던 오이카와는 살며시 눈을 떠 요구르트를 슥 보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먹여 줘, 상쾌군.”
스가와라는 순간 잘 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 번 물었다. 뭐?
“먹여 달라구, 저거. 오이카와 씨 지금 움직이고 싶지 않아.”
“……하, 그래 좋아.”
“오~상쾌군! 오이카와 씨 좀 감동이야.”
오이카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만족한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스가와라가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 지는 상상도 못 하고.
“마셔~.”
“잘 마시겠습―아악!”
스가와라가 내민 요구르트의 빨대로 음료를 한껏 빨아들인 오이카와는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목을 부여잡은 오이카와는 괴로운 목소리로 스가와라에게 물었다. “상쾌군……대체 무슨…….” 스가와라는 작은 공병을 승리의 표식이라는 듯 자랑스럽게 들어보였다. 공병에는 ‘칠리소스’라벨이 붙어있었고, 방금까지 내용물이 들어있었던 듯, 병의 벽면에 빨간 것이 묻어있었다. 그러나 정작 칠리소스는 한 방울도 없었다.
“리벤지 성공!”
“상, 큭……!”
오이카와는 사나운 기침을 계속 해야 했다.
+ + +
“대체 칠리소스 따위를 왜 소분해서 들고 다니는 거야!”
“맛있으니까.”
“이해할 수 없어!”
오이카와는 아직도 얼굴이 발갛게 된 채로 성을 내고 있다. 칠리소스를 아낌없이 털어 넣은 요구르트를 한껏 마셨으니, 매운 걸 좋아하지 않는 오이카와로서는 한참동안 고통에 시달려야했다. 스가와라는 태연하게 아이스크림을 뜯어 입에 물었다.
“상쾌군!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일단 귀는 안 막았으니까. 들리긴 다 들려.”
“야!”
오이카와는 소리를 꽥 지르고 스가와라를 보며 씩씩거리더니, 아이스크림 포장지를 거칠게 벗겨 입에 넣고는 아이스크림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리고 3초 후에 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으아아아아아!!”
“시끄러워! 지금 몇 시인 줄은 알고서나 소리 지르는 거야?”
“아직 8시밖에 안 됐어!”
“충분히 늦은 시간이야!”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는 새 아이스크림을 사서 “너 때문에 아이스크림을 세 개나 사게 됐잖아, 사람은 둘인데.” 라고 투덜거리며 오이카와에게 건네줬다. 아니, 그냥 건네주려다가 또 버릴까 싶어 직접 까서 입에 제대로 넣어주었다. 오이카와는 입을 크게 벌려 받아먹었다.
“항캐근, 어이카아 히랑 어이 가아.”
“아이스크림 빼고 말해.”
오이카와는 딱 잘라 말하는 스가와라를 한 번 째려보곤 춥―소리를 내며 아이스크림을 입에서 뺐다.
“오이카와 씨랑 어디 가자, 상쾌군.”
“너랑 어디를 또 가라고? 이 시간에? 안 돼, 오늘 부 활동도 빼먹었는데.”
“괜찮아, 넌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고 있잖아. 자, 가자.”
오이카와의 말에 순간 당황한 스가와라는 무어라 말도 못 한 채 또 오이카와에게 끌려갔다. 이번엔 급하지 않게 천천히, 끌고 간다라기 보단 이끌고 데려가주는 듯 한 느낌이었다.
“짜잔~여기야, 상쾌군.”
“여기, 너희 학교잖아.”
나 집에는 어떻게 가? 스가와라의 질문은 생각도 못 한 건지, 잠시 고민하던 오이카와는 택시타고 가, 라고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옆구리를 한 번 세게 찔러줬다.
“따, 따라와, 상쾌군……. 이쪽이야…….”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손가락으로 북동쪽을 가리킨 오이카와의 얼굴은 5년은 늙은 듯 했다. 척척 걸어가던 스가와라는 문득 뒤돌아 오이카와에게 물었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야?”
빠른 속도로 옆구리를 회복한 오이카와는 다시 생글생글 웃으며 스가와라에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시도하다가 옆구리를 한 대 더 맞았다. 오이카와는 끙끙거리며 대답했다. 우리 배구부실……윽…….
“배구부실 왜 가? 너 두고 온 거 있어서 그래?”
스가와라의 물음에 오이카와는 당황한 듯 말을 못 했다. 어어, 어……그, 경기 녹화한 CD를 두고 와서, 하, 하하……. 오이카와는 어색하게 웃었다. 스가와라는 자기를 왜 데려가나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오이카와를 따라갔다. 부실건물의 끄트머리가 보이기 시작할 때, 오이카와는 별안간 멈추더니 뒤돌아서 스가와라의 어깨를 붙잡았다.
“상쾌군! 그, 기말고사 끝나면 같이 축제 가지 않을래?”
“축제? 여름 축제?”
“응응!”
오이카와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신의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의 은빛 머리카락, 선한 눈매, 왼쪽 눈의 예쁜 눈물점, 하얀 피부, 자기도 모르게 짓고 있는 미소, 손 아래로 느껴지는 단단한 체격. 참 예쁘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너희 부원들도 가는 거야?”
이런 오이카와의 심정을 아는 건지, 스가와라는 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순간적으로 맥도 풀리고 당황한 오이카와는 엣……그러니까……만 반복하며 말을 못 잇지 못했다. 스가와라는 얌전히 그가 대답하기만을 기다렸다.
“다, 당연히 우리 부원들이랑 너희 부원들도 다 같이 가는 거지! 안 그래도 너희 주장한테 얘기 해 보려고 했어!”
“그럼 아까 얘기하지, 왜 나한테 지금 얘기하는 거야?”
“그, 그야 지금 생각한 거니까!”
‘얘가 우시와카처럼 왜 이래! 원래 이렇게 눈치가 없는 건가?’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싶었는데, 오히려 순진한 얼굴로 되물어오는 스가와라를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스가와라는 찝찝하지만 일단은 알겠다고 말했다. 본인 어깨에서 오이카와의 손을 떼어내고 먼저 부실 쪽으로 향했다.
“이봐, 배구부실이 어디야?”
스가와라는 동아리실 건물 앞에 서서 오이카와에게 물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안했다.
“그, 그게, 상쾌군…….”
“말해 봐!”
“그게 사실…….”
오이카와는 계속해서 말을 못 하더니 스가와라가 잔뜩 짜증을 내며 뱉어낸 온갖 험한 말을 다 들은 이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우리 부실……반대쪽이야…….”
“……네?”
“그……나도 맨날 헷갈려서 이와쨩이 데리러 와……. 배구부실 3년 째 들락거려도 한 번에 못 찾겠어…….”
하……. 스가와라는 한숨을 푹 쉬더니 체념한 표정으로 오이카와의 등을 떠밀었다. 아까 험한 말을 다 해서, 오히려 지금은 그저 어이가 없다. 그래, 그럴 수 있지. 학교가 크니까 동아리실 건물이 두 개 일수도 있고, 아무리 주장이라도 길치일 수 있고, 그래서 3년 째 들락거리는 부실을 한 번에 못 찾을 수도 있지, 그럼. 근데,
“그럼 외부인을 데리고 오지 말았어야지!”
스가와라는 기름 터지듯 뿜어 나오는 분노를 순간 주체하지 못하고 오이카와의 등짝에 스파이크를 날렸다. 오이카와가 힘이 더 세다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배구 선수니까, 음음. 아마 며칠 정도 손자국이 남아있을 것이다.
“미안해, 상쾌군. 대신에 내가 재밌는 거 보여줄게!”
“네 놈 배구실력보다 재밌는 게 있을까.”
“칭찬이야 욕이야?”
오이카와는 씩씩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스가와라는 특유의 그 짓궂은 미소를 환하게 지으며 배를 잡고 웃었다. 파도처럼 청량하게 부서지는 그 웃음소리가, 저물어가는 노을 속에 서서히 물들었다.
“어? 치자나무네.”
“어어, 맞아. 근데 어떻게 한 번에 알아봤어?”
하얀 꽃이 노을빛을 받아 예쁘게 빛나는 치자나무 앞에 멈춰 선 스가와라에게, 오이카와가 물었다. 이건 우리 학교 학생들도 잘 못 알아보는데. 오이카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 내 탄생화거든.”
스가와라는 입 꼬리를 예쁘게 말아 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 자식 때문에 잊고 있었는데, 오늘은…….
“받아.”
“에?”
오이카와가 스가와라에게 나뭇가지를 불쑥 내밀었다. 정확히는, 흰 꽃이 서너 송이 피어있는 나뭇가지를. 꽃이 제일 많은 가지로 꺾었어, 걸리면 좀 혼나면 되지, 뭐. 오이카와는 입을 비죽 내밀곤 괜히 생색을 냈다. 스가와라는 얼결에 받아든 나뭇가지를 소중하게 바라보았다.
“상쾌군, 가자.”
스가와라는 얌전히 오이카와를 따라갔다. 배구부실이 있는 동아리실 건물에는 금방 도착했다. 오이카와를 따라 들어선 부실은 냉기가 돌았고, 어두웠다. 한 쪽에서 에어컨의 표시등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오이카와는 잠시만 기다리라며 먼저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빛은 부실 안까지 들어오지 못했고, 덕분에 불을 켜지 않은 부실은 더욱 캄캄했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가 준 나뭇가지의 꺾인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환한 불빛이 켜지면서 펑―소리와 함께 팡파르가 터졌다.
“상쾌군, 생일 축하해!”
오이카와가 부실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민트색 고깔모자를 쓰고, 터진 팡파르를 들고 선 오이카와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웃음을 지어보였다.
“뭐, 뭐야? 뭐하는 거야?”
당황한 스가와라가 버벅거리자,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에게 직접 오렌지색 고깔을 씌워주곤 그를 부실 안으로 데려와 바닥에 앉혔다. 부실 바닥은 엉덩이가 시릴 만큼 차가웠다.
“잠깐, 잠깐! 무슨 상황인 지 설명 좀 해줘.”
“보이는 그대로, 오이카와 씨랑 상쾌군이랑, 단 둘이서 하는 상쾌군의 생일파티야!”
오이카와는 자신의 캐비닛에서 우유빵 두개를 꺼냈다. 그 중 하나를 받은 스가와라는 포장을 뜯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음, 안상했네. 이거 때문에 계속 에어컨 틀어 놓은 건가?
“이와쨩한테도 안 나눠주는 건데, 오늘 특별히 상쾌군한테 줄게.”
“아……그래.”
스가와라는 느끼한 우유빵이 그렇게 기쁘진 않았지만, 어쨌든 깨끗하게 다 먹었다. 말랑말랑 부드러운 느끼한 걸 먹었더니, 매운 컵라면이 먹고 싶어졌다.
“상쾌군.”
스가와라가 매운 컵라면을 생각하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오이카와가 꽤 진지하게 그를 불렀다. 스가와라는 물음표를 띄우고 그를 쳐다봤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를 곧게 바라보았다.
“나는 국가대표가 될 거야.”
“아, 어어……그래.”
“그렇지만 국가대표가 돼서도,”
오이카와는 말을 잠시 멈추고 스가와라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계속 상쾌군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어. 옆에서.”
“…….”
“좋아해, 상쾌군.”
스가와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이카와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네가 좋아.”
“…….”
“……코시.”
달콤한,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