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태어난 밤
W. 은월광
어제는 기분좋은 날이었다. 생일을 핑계로 자주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 몇몇을 불러다가 맛있는 밥도 먹고, 내일이 없는 사람 마냥 밤늦도록 술을 부어라 마셔라하며 즐겼었다. 월요병이 다 뭐야. 지금 당장 즐거워야지. 오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는게 단점이었지만.
두통 때문에 찡그린 얼굴로 밍기적거리며 침대위를 굴러다니기를 몇분. 문득 이제까지 있어왔던 11번의 기이한 현상이 떠올랐다. 꼭 이맘때 쯤 이었는데. 그러니까 오늘이 몇월 몇이...ㄹ... 오늘이네? 멍하게 시계를 바라보니 6시 10분. 기가 막히게도 그 현상이 일어나기 3분전이었다.
'이번엔 바빠서 친구들한테 오늘 꼭 놀러오라고 말도 못했는데. 지금이라도 문자 보내둘까. 지금 자고 있을텐데. 아냐. 오늘은 출근날이니까 준비한다고 깨어있을텐데...!'
생각의 흐름에 따라 손을 놀려 몇글자를 적고 전송을 누르기까지 1분. 초조하게 답장을 기다린 시간 2분. 그리고 기다리던 연락 외에 다른 연락이 3분동안 12개. 다 잠긴 목소리로 통화 몇개를 끝내고 나니 그제야 기다리던 연락이 도착했다. 하지만 내용도 기다릴만한 것이었나면... 괜한 기대를 했나 싶을만큼 반갑지 않은 내용이었다.
-발신자: 시미즈 키요코
내용: 어제 못가서 미안. 오늘이라도 가서 생일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갑자기 출장을 가게되었어. 다음번에 들를게. 생일 축하해.
-발신자: 사와무라 다이치
내용: 미안, 스가! 오늘 오후에 갈 수 있으면 갈게. 안바쁘면. 근데 이거 보내는 동안 나 찾는 전화가 좀 많았어서... 확실하게 간다고는 못하겠다.
-발신자: 아즈마네 아사히
내용: 오늘? 오늘은 좀... 친척집에 잠깐 들르라고 하셨는데... 음... 그분들 얘기가 길어지면 못갈지도 몰라. 거긴 오사카니까... 아마 못간다고 생각해주는게 좋을것 같네... 미안...
연달아 온 메세지들을 읽으면서 화면만 노려보다가 답장도 하지 않은채로 핸드폰을 소파에 던져버렸다.
"내가 분명히 이런식으로 생일 축하할거면 차라리 하지말라고 했는데!"
씩씩거리면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청소용구함을 와르르 쏟아냈다. 평소라면 엄두도 안낼 부분도 청소하자는 생각이 들어서 앞치마도 꺼내입고, 두건도 쓰고, 마스크도 썼다. 마지막으로 빗자루를 허공에 휘적거리면서 여기에 없을 누군가를 향해 소리쳤다.
"오늘은 대청소다! 이것도 막아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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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취를 껴안은채로 청소를 하려니 솔직히 중간에는 그만할까 싶었다. 하지만 이미 세면대 배관마저 뜯어서 머리카락도 빼내는 중이었고, 그러느라 바닥은 물바다가 되어있는지 오래였다. 심지어 머리를 자르고 난 뒤의 조각조각난 머리카락들은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물을 붓자마자 여기저기서 튀어나와있는 꼴이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이를 악물고 처음 가게를 열었을때와 얼추 비슷한 모습이 될 만큼 구석구석을 청소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내일치 체력을 끌어다준다는 음료가 너무 간절해졌다. 분명히 처음에 열받아서 시작한 청소였는데. 혼자 열내고 청소로 분풀이하고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해버린 격이었다.
끙끙거리면서 바닥에 드러눕고나니 잠이 솔솔 몰려왔다. 괜히 힘이나 빼고. 이번에 만나면 다이치랑 아사히랑 시미즈만이라도 놀러오게 해달라고 해볼까. 그것도 못해줄거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같이 있어주기나 해주지... 아니면...... 이불이나 좀.... 덮어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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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하게 종이가 팔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책을 읽어내려가며 넘기는 듯 아주 간간히 들렸지만 정신만 깨어있는 채로 듣고 있으려니 꼭 자장가처럼 들렸다. 오늘 좀 힘들었는데. 더 자도 되지 않을까.
"상쾌군. 더 잘거야? 나 계속 기다렸는데."
...생각이라도 읽고 있었나 싶을만큼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일어나기 싫었지만 따질것도 있고해서 눈은 감은채로 몸이라도 일으켰다. 언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소파에 눕혀져있고 이불이 덮어져있다는 사실은 좀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매번 오늘 하루 볼 수 있는 얼굴이 저 저승사자 한 명... 한 분이라니.
"부탁 하나 제대로 안들어주는 분의 얼굴은 보기 싫은데요."
"헤에. 그래도 상쾌군 생일이라서 일 완전 빨리 끝내고 온건데."
"그냥 평소에 오라니까요? 이런 짓 하지말고?"
"이 오이......저승사자씨는 오늘 아니면 얼굴 못본답니다~ 그나저나 내가 주는 선물은 제대로 못 받았어? 왜 그렇게 피곤한 얼굴하고 찬 바닥에서 자고 있었대?"
"..."
"하루종일 나한테 성질내면서 있길래 빨리 오라고 성화인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거 같고?"
섭섭해라. 조금 기대했는데.
저렇게 얘기하면 괜시리 마음이 약해져버린다. 분명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라며 원하는 상황을 말하라고 했었지. 그때는 공부하느라 피곤하고, 하루쯤 학교가기 싫은 마음에 혼자 있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그게 이렇게 매년 반복될 줄 알았으면 다른걸 빌었지!
"작년까지는 잘 받아놓고는."
"작년엔... 바빴으니까 그랬죠. 이제 소원 바꿔주면 안되나..."
"내가 무슨 램프의 요정쯤 되는 줄 알아?"
저승사자의 손에 있던 드는 것 만으로도 무거워보이는 두꺼운 책이 턱하는 소리와 함께 닫히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가 너 자는동안 맛있는거 좀 해뒀어. 근데 냉장고 너무 부실하더라. 겨우 먹을만한거 만들었네. 하루종일 아무도 못만나고 조용히 있던 나보다 더 입이 근질거렸는지 이것저것 조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 청소하다가 벌레 잡기 싫어서 구석에 밀어둔거도 다 봤어. 아, 이거 혹시 비밀이야? 그래도 밖으로 내보냈으니까 좀 봐줘. 어제 술 마셨지? 마시는 건 좋은데 속 버릴라. 조심하고.
"1년치 잔소리면 그쯤해요."
"어떻게 알았대? 나 진짜 하고싶은 말 많았는데 너 자느라 한마디도 못했단말이야."
"그럼 딱 한마디만 더 들을게요."
"에엑. 치사해."
"아. 한마디 넘었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볼 한가득 바람을 불어넣은게 꽤나 불만이 한가득인 듯이 보였다. 키득거리니 금새 풀렸지만. 내가 너 진짜 좋아해서 이러는거 알지? 응? 알아요. 저도 괜히 심술부려본거예요.
손 하나 닿는것도 혹시나 해서 조심스러운 것도 알고. 내 이름 한 번 잘못 불렀다가 큰일 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는것도 알고. 부르면 닿을 곳에 늘 있다는 것도 알고.
하지만 이름도 모르고 평소에는 볼 수도 없는 누군가를 1년 내내 기다리는데에 지쳐버린지 오래였다. 마침 좋은 생각도 났으니ㅡ
"그럼 한마디 넘겼으니까 나 소원들어줘요."
"뭐어? 얘가 지금 저승사자 뜯어먹으려고 그러네?"
"내가 뭐 많은거 바라는것도 아니고. 성이든 아래 이름이든 하나만 가르쳐주면 되는데."
일부러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있으려니 꽤나 진지한 표정이 된 저승사자가 어디선가 펜 하나를 꺼내들었다. 절대로 소리내서 읽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종이 위에 글자 하나가 적어졌다. 느릿하게 적어지는 글자를 보며 언제 끝날까, 무슨 발음일까, 기다리고 있으려니 딱 한글자여서 조금 김이 새버리긴 했다.
'徹'
"이거 꽤 흔한 이름ㅡ"
"아니야! 아니니까 절대 나 부르지마!"
얼굴이 빨개진걸 보니 분명 위험한건 아닌것 같고. 그냥 부끄러운걸텐데. 어쨌든 십몇년 만에 겨우 알아낸 이름이었다. 못 불렀던 시간만큼, 이름이 닳아 없어질 만큼 불러야지. 토오루 안보일때.
"좋아. 선물 준 셈 칠게. 이번엔 이유는 모르겠지만 편히 못쉬었을테니까. 그 대신으로."
"이거 테츠라고 읽는거죠?"
"...아닌거 알면서 묻는거 진짜 나쁜거 알아?"
"흐응. 아니구나. 난 테츠인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올해 받은 가장 소중한 선물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덤으로 속았다며 잔뜩 억울해하는 표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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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번째 생일 축하해. 네가 태어났을 때와 같은 달 아래에서 축하해줄 수 있어서 정말 기뻐."
"어떻게 매번 그 멘트야..."
"로맨틱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