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스가] 저온화상
W. 체어
1
아무도 믿지 않더라도 스가와라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나 사실 단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마침 집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었던 스가와라의 내일을 위해 친구들은 온갖 스위츠를 품에 안겨주었다. 미리 생일 축하한다 스가와라. 맛있게 먹어. 넌 이런 거 좋아할 것처럼 생겨서. 제가 언젠가 저렇게 말했던 건 다들 까맣게 잊었는지. 잘 먹겠다는 말을 하려고 과장하여 입을 열었더니 굳어버린 턱에서 아드득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울고 싶은 기분을 숨겼다.
스가와라는 자취를 시작한 이래로 한 번도 제 돈을 주고 달게 하는 것만이 목적인 먹을거리들을 사본 적이 없다. 혀와 머리가 아릴 정도로 단 건 차라리 통각에 가까웠다. 음식이란 누구든 먹을 수 있을 만한 것을 부르는 말이 아닌가. 먹는 사람을 달게 하는 것만이 목적인 음식들을 음식이라고 여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를테면, 사탕이나 초콜릿이나 케이크 같은 것들.
그중 최악은 마카롱이었다.
스가와라 코시는 반의 반나절씩이나 마카롱 안에 필링을 짜 넣는 일을 했다.
필링이 너무 적은 마카롱은 폐기되었다. 주의하라는 말을 허투루 듣고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조심 짜 넣었더니 정말로 클레임이 들어왔다. 제조 담당으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제가 쓰는 모든 재료를 아까워하던 때의 스가와라와, 저와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은 동기 하나만이 출근했던 날이었다. 그런 것들을 염려해 짜내는 손에 힘을 빠악 주었다간 속이 쉽게 흘러넘쳤다. 필링을 잔뜩 묻힌 손을 들고 머쓱한 얼굴로 점장님의 눈치를 보아야만 했다. 망할 놈의 마카롱.
점장님은 여긴 유명 마카롱 가게의 한 30번째 체인점 정도는 되는 곳이니 꼭 적정량을 넣으라고 당부했다. 망가진 것들은 전부 만든 사람이 먹어치워야 했기에 스가와라도 이왕이면, 적정량의 필링이 들어서 적당히 예쁜 마카롱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게 점장님도 자신도 손님들도 하물며 누군지도 모를 마카롱 가게의 사장님도 기뻐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하루에 하나 이상은 꼭 망가진 마카롱이 생겼다. 손을 박박 씻어도 끈덕지게 남는 단내 때문에 코를 쥐어막지도 못했다. 스가와라는 단내에 뇌를 절여가며 적정함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내내 고민했다. 생각하다 손에 힘이라도 들어가면 꼬끄에 금방 금이 갔다. 정말, 정말로, 망할 놈의 마카롱.
아무튼, 그런 것들에 스가와라는 모르던 시절부터 왕창 질려있었다. 그러니까 당분만을 채워 넣은 먹을거리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싫었다는 이야기다. 스가와라는 길에서 단 향의 향수라도 맡았다간 당장에라도 토할 것처럼 위태롭게 구역질을 할 수 있었다.
포장된 색색의 단 것들을 안고 돌아가는 손님들의 얼굴이 어땠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적어도 처치곤란인 당분 덩어리들을 테이블 한 가운데에 왕창 쌓아둔 자신이 짓는 표정보다는 그럴 듯한 것이었으리라. 다가올 6월 13일을 십 분도 채 남겨두지 않고 스가와라는 12구입 마카롱을 꾸역꾸역 치워두었다.
2
기록: 6월 11일 오후 스가와라는 익숙한 발신인으로부터 이런 메일을 받았다.
「요코하마에 놀러 왔어.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3
고등학교 동창 중에 사와무라 다이치라는 애가 있었다.
특별한 사이는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
걔와는 우연히 부활동이 겹쳤고 둘 다 제법 그럴듯한 부원이었기 때문에 나란히 주장과 부주장이 되었다. 고등학교 삼 년이 같은 반이었던 것도 딱 이만한 이유다. 선생님들은 닭장에 닭들을 몰아넣듯 같은 부 애들을 한 반에 몰아넣으려고 했다. 되도록. 왜? 편하니까.
네 명뿐인 배구부 3학년 중에 진학을 희망하는 사람은 저와 사와무라밖에 없었다. 그러니 같은 반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건 필연이나 우연으로 다룰만한 일이 되지 못했다.
친한 친구를 꼽자면 서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도 들지 않았다. 스가와라도 사와무라도 잘 알았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몰랐다. 사와무라가 부재한 날에는 자연히 제게 그 애의 행방을 물었다. 글쎄, 모르겠어. 스가와라 선배라면 아실 거라고 생각, 했는데요…….
저와 사와무라는 대체로 서로를 비롯한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었으므로 곧잘 뭉뚱그려졌던 것이다. 이건 큰 오해다. 걔가 좋은 사람인 것과는 별개로.
내가 쟤에 대해 알긴 뭘 알아.
그러면서도 스가와라는 무던히 넘겨짚었다. 알아야만 그게 오해임을 밝혀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사와무라라면 마땅히 알고 있을 거라고. 이게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이었던지.
4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취방에서 스가와라는 사와무라의 태연한 얼굴을 보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손에 휴지며 먹을거리들을 바리바리 싸든 사와무라가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왜? 이건 좀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다이치……가 여긴 무슨 일이야?
자취한다며. 집들이 오겠다고 했잖아.
걔는 당연한 듯이 새 집에 들어와서 이것저것을 살폈다. 너는 옆에서 닦달하지 않으면 밥도 잘 안 먹잖아. 이거 봐, 즉석식품밖에 없을 줄 알았어, 이러면 부모님이 걱정하신다고…….
스가와라는 얼이 빠진 채로 식탁에 앉아서 사와무라가 식재료를 늘어놓는 걸 기다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앉아있는 틈에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너, 요리 할 줄은 알아?
생각 없이 속에 있던 말을 뱉어버린 줄 알고 스가와라는 순간 입을 확 틀어막았다. 응?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답을 채근하는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내 말이 아니구나. 그런데 네가 물을 말도 아니잖아. 스가와라는 뚱하니 대답했다.
먹고는 살아.
정말.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던 건지 저를 한 번 흘긴 사와무라는 몇 번이고 비슷한 질문을 만들어냈다. 밥을, 먹고 있기는 하지? 냉장고에 술만 잔뜩 있잖아. 도시락 먹으면 돼. 학교 가느라 요리할 시간도 없고. 그래도 간단한 것 정도는 먹어야지, 즉석식품도 매운 것만 두고. 맛있잖아. 그러다가 속 다 상한다니까…….
스가와라는 한 번도 그를 만족하게 하지 못했다. 굳이 제가 다이치에게 그런 배려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조금 미안해지기는 했다.
어느 새부턴가 걔는 주말 저녁이면 꼬박꼬박 제집으로 찾아왔다. 스가와라는 성가시게 구는 사와무라를 위해 침구를 한 세트 더 들여놓았다. 가끔 놀러오는 친구들의 몫으로 까두었던 칫솔을 화장실 청소용으로 족족 소비할 때마다 양치 컵에 비스듬히 놓여있는 사와무라 다이치의 샛노란 칫솔이 눈에 턱 걸렸다. 뻔뻔하게도.
걔는 오지 못할 사정이 생기면 메일로 구구절절하게 이유를 들었다. 맹세코 사와무라를 기다려 본 적은 없었다. 바라지도 기다리지도 않은 사람이 당연하게 돌아오는 건 곤욕이었다.
다만 걔랑 있으면 좀 편했다. 이것만은 스가와라도 입으로 내어 말한 적이 있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이라면 뭐든 좋아할 것처럼 생겨먹은 스가와라 코시는, 사실, 많은 것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명확한 기준은 없었다.
우선 먹는 일을 점차 즐기지 않게 되었다. 배구를 그만둔 뒤로 몸이 요구하는 식사량이 줄어들더니, 근육이 빠지면서 끼니를 간간이 챙겨 먹는 데에 만족하게 되고, 지금은 대강 살아갈 수 있는 선에서 영양분을 충족하고 있다.
그러나 드물게 폭식하는 날도 있었다. 오늘따라 왜 그러냐고 묻느냐면 대답할 수가 없었다. 스가와라도 몰랐다. 아릴 정도로 단 건 싫었지만 쓰라릴 정도로 매운 건 좋았다. 마찬가지로 설명하기는 성가신 것들이다.
사와무라는 제 입맛이며 잠버릇 같은 세세한 것까지 꿰었다. 맥주 두 캔과 먹을 간식으로 언제나 짜고 매운 감자칩을 사 왔다. 달아서 더 먹고 싶지 않은 빵을 남기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옆으로 밀어두었다. 나도 단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렇구나. 다시 먹고 싶은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런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그럼 사와무라는 더 캐묻지 않는다. 그 성가신 사와무라 다이치가 말이다.
사실 그거에 감동했던 적 있어.
돌아누우며 이렇게 말했더니 사와무라는 파스스 웃었다. 의외네. 뭐야, 나를 뭐라고 생각해 온 건데. 투정부리듯 말끝을 늘였다. 그랬더니.
“너는 너지.”
깔깔 웃었다. 재미없어. 머쓱했는지 귀를 붉히며 사와무라가 말했다. 나한테서 재미를 기대하지 마. 알잖아. 글쎄, 모르겠는데. 내내 웃던 스가와라가 읏챠, 하며 몸을 일으켰다. 씻고 올래. 그때 걔는 자기가 사 온 물티슈를 들고 바닥에 흐른 정액을 닦아내고 있었다.
사와무라와 섹스를 한 적은 없다. 그 비슷한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 스가와라에게 키스나 섹스는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음이란, 성기를 쥐고 흔드는 일이란, 몸이 달거나 머리가 복잡하거나 잠깐의 쾌락을 느끼고 싶을 때에 마침 혼자 있다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유흥거리였고, 다이치와 함께하는 주말 동안은 ‘마침 혼자 있는 시간’이 영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서로의 것을 손에 쥐고 흔들어주자. 쾌락을 느낄 수 있는 조금 다른 일을 하자. 게임처럼. 섹스와는 한참 멀지만 마침 두 사람이니까 마스터베이션은 못 되는, 그런 거 있잖아.
이해하지?
사와무라는 한참 후에 대답했다. 응.
한 명쯤은 이런 사람이 필요하지. 이런 마음으로 걔와 함께하게 된 주말에 익숙해졌다. 가끔은 허리를 맞대고 바르르 떨었다. 사와무라보다 먼 타인들에게서도 들을 수 있는 조금의 잔소리만 그래그래, 적당히 삼켜내면 그만이었다.
사와무라는 몸이 좀 더운 편이었다. 이불과 함께 다이치의 몸 한구석을 뒤집어쓰면 뜨끈뜨끈히 달아오르는 게 좋아서 필요할 때마다 끌어안고 몸을 착 붙였다.
스가와라는 사와무라가 가진 온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없으면 살지 못하는 쪽에 가까웠다. 미처 알지 못한 데에서 출발했지만 이보다 편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스가와라는 적당히 걔를 좋아하며 살았다. 그게 불편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5
사와무라의 스무 살 생일을 함께 보냈다. 스가와라는 귀가하기 전에 온전히 남을 위한 자그만 케이크를 하나 사 왔다. 자그만 주제에 더럽게 달아서 스가와라는 먹을 수 없는 생일용 케이크였다.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는 사와무라는 케이크를 맛있게 먹었다. 싹싹 비웠다. 보는 사람이 다 뿌듯할 정도로.
다이치, 달지 않아?
달아.
단 걸 좋아했었나. 스가와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케이크 상자를 치워두었다.
김이 빠진 맥주를 발이 닿지 않는 곳에 두고 나란히 누워서 드라마를 보았다. 소파에 기대앉아서 영화를 틀어두고 서로를 보고 있는 연인들이 있었다.
지루하다.
그래서 사와무라의 나른한 정신이 힘없이 붙잡고 있는 눈매를 보았다. 현실감이 없어서 슬슬 만져도 보았다. 사와무라는 야릇한 표정으로 스가와라를 올려다봤다. 몸을 조금 더 가까이 붙이고 걔의 얼굴에서 특히 낯선 부분들을 더듬었다. 헉. 어느 시점에서 다이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리모컨을 잘못 눌렀는지 채널이 바뀌었다. 요란하여 소음에 가까운 목소리들이 귀를 찢도록 들렸다.
“뭐, 뭘 하는 거야.”
스가와라도 몰랐다. 다만 다이치가 좀 과민반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야만 옳았다.
걔의 행동을 납득해선 안 되었다.
망할 놈의, 사와무라 다이치.
입술 껍질을 뜯으며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번들거리는 눈으로 서로의 입술만을 바라보고 있던 두 사람이 사라지고, 잠시 후면 새해가 밝아옵니다. 마침 그 애의 생일이 12월 31일이었구나. 제 페이스를 되찾은 사와무라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네 생일이 끝나가고 있다고. 카운트 다운! 10, 9, 8, 7…….
“스가, 우리 밤새고 하츠모우데 하러 갈까.”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다이치.”
“응?”
사랑하는 사람들이 키스하는 꼴을 함께 보기 직전에 채널을 돌려서 참 다행이라고.
“이제 됐어. 이상하잖아.”
우리 사이에 이런 일들을, 해가 바뀌도록 말이야. 3, 2, 1. 데엥, 귀를 멍하게 울리는 종소리보다 아주 조금 이르게 말을 맺었다. 그러니 머리까지 울리는 파동은 제 말의 잔여물에 아주 조금 더 가까웠다.
잘 자.
너도.
사와무라와 스가와라가 그 날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였다. 내뱉고 들었던 게 무색하도록 둘은 밤새 자지 못했다.
옆에 누운 온기 덩어리가 뒤척이는 것을 느끼며 스가와라는 눈을 감고 떠오를 새해를 대강 그렸다. 새해라고 다를 건 없잖아. 그냥, 매일 보았던 해가 다시 뜨는 거고. 눈이나 좀 오면 특별해지려나. 아, 아사히의 스무 번째 생일인 건 좀 새로웠다. 축하한다고 전화나 해 줘야지. 신사에는 갈 생각이 없었다. 새삼스럽게 무슨.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오자 핸드폰을 만지작대던 다이치가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제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이런 걸 다 알아챌 정도로 스가와라는 멀뚱히 깨어 있었다.
메일이 하나 왔다.
「신사에 갈게. 새해 복 많이 받아.」
사와무라 다이치라는 애의 바보 같은 면을 종일 탓하다가 스가와라는 답장도 하지 못한 채 까무룩 늦은 잠에 빠져들었다. 중간에 아사히에게 전화를 하느라 한 번 일어났던 시간을 제외하면 한 번도 깨지 않았다. 오래오래 잤다.
깨어난 스가와라는 개운해진 몸과 마음으로 평범한 일과를 며칠이나 보냈다. 조금 들뜬 거리를 제외하면 신년은 정말로 별다를 게 없어서 조금 아쉬울 정도였다.
「여행 동아리에 들기로 했어. 주말마다 여행을 간대.」
「그동안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하다.」
마찬가지로, 걔가 없는 새해는, 달리 울거나 슬퍼할 것도 없이 조금 아쉬운 정도였다.
6
메일을 받자마자 스가와라는 봐두었던 주말 아르바이트 자리에 지원했다. 구석진 상가에 자그마하게 자리한 마카롱 가게.
점장님은 꽤 좋은 분이셔서, 남는 마카롱들을 파트타이머들에게 두어 개씩 주었다. 망친 것은 먹어도 된다는 허락까지 받았다. 말이 허락이지. 스가와라는 그 친절하신 점장님이 혹여 쓰레기통에 버려진 마카롱을 보고 크나큰 상심을 겪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워했다. 꾸역꾸역 먹었다.
그러나 스가와라는 여전히 단 게 죽도록 싫었다.
틈만 나면 손을 씻고 돌아오자마자 바로 샤워를 해도 바디워시와 샴푸와 마카롱 향과 살 본래의 향들이 기묘하게 섞여서 역한 단내가 났다. 당에 익숙해지기까진 숱한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다.
그동안 사와무라로부터 몇 통의 메일이 왔다. 교토에 놀러 왔어,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에노시마에 왔어. 몰랐는데 나 뱃멀미를 좀 하더라.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대학 동아리 주제에 잘도 쏘다녔다. 뒤늦게야 동아리에 든 사람치고는 잘도 섞여들었다. 스가와라에겐 차라리, 이게 좀 더 익숙한 사와무라 다이치였다.
저렇게 나다니는 걸 좋아하는 애가 그간은 어떻게.
이런 사소한 거스러미들을 생각해보면 사귀었던 것 같았던 때는 있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들을 악착같이 그러모아 갖가지 오해와 희망과 미련으로 뭉쳐내면 분명히, 있었다. 그보다 한참은 길었던 걔한테 익숙해지려고 애썼던 나날들마저도 곡해하려고 애쓰면 비슷한 것이나마 되었다. 그렇게 살을 붙여야 겨우 사귀었던 것이 된다.
이마저도 사와무라가 사실 너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고 이야기하면 쉽게 금이 갔다. 바스러지거나 모양이 흉해지면 더는 그랬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만큼 취약하고 사소한 뭉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내가 걔를 좋아했나. 스가와라는 고심했다. 걔가 있을 때는 비슷한 감정조차 느껴본 적이 없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데인 것처럼 아리고 쓰려서 확인해 보았더니 부풀어 오른 마음.
원인은 사와무라 다이치의 별거 아닌 온기였다.
「생일선물이 갖고 싶어.」
타인보다 조금 많이 안고 태어난 온기. 열이라고 말하기도 모호한 온기.
달리 가지고 싶었던 건 없었지만 그걸 가지고 올 걔는 조금 보고 싶기도 해서, 스가와라는 바랐다. 걔가 어떤 선물이든 들고 나타나서 이 역한 단 것들을 와구와구 먹어주기를. 단 걸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주었기 때문에 전부 먹어치웠던 때처럼.
줄 건 많았다.
그러니 와 주기를.
7
스가와라는 조촐한 생일을 맞았다.
생일 축하합니다. 몇 통의 전화와 수십 개의 메일, 산더미처럼 쌓인 미리 받은 생일 선물들은 스가와라 코시라는 사람이 꽤 많은 애정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는 지표가 되었다. 그러나 스가와라는 손에 꼽도록 외로운 생일이라고 여겼다.
티비를 틀어놓고 아무렇게나 뉘인 몸이 서서히 나른해졌다. 자세가 불편한지도 모르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러다 꺾여있던 고개가 누군가의 의지로 제자리를 찾았다. 으응. 아, 미안. 깨웠네. 더운 숨이 흐린 시야를 확 걷어냈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멋대로 들어와서 미안해. 전화를 안 받아서…… 비밀번호 안 바뀌었길래…….
사와무라 다이치.
개 같은 자식. 스가와라는 눈물을 왈칵 쏟았다.
“왜, 왜 그래 스가.”
“넌 진짜 개자식이야. 나를, 씨발, 나를 이렇게나 익숙하게 만들고. 괴롭게 만들고. 나쁜 놈아…….”
왜 그랬어.
축축하게 젖은 말이 듣기 싫게 우그러졌다.
왜 그랬냐고. 왜.
스가와라에게는 유독 걔를 기다리는 습관이 있었던 거다. 모르는 사이에. 그래서 네가 오지 않을까 봐 맘 졸였어. 그러니 이건 다 네 탓이다. 제멋대로 온기를 주고, 데이는 줄도 모르게…….
미안해. 정말. 진작 왔어야 했는데. 겁이 많아서, 보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어. 미안…….
저를 꽉 안은 다이치의 단단한 팔에 입이 턱 막혔다. 거름망을 하나 둔 기분이 들어, 온전치 않은 발음으로도 안심하고 투정할 수 있었다.
“개새끼야.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올 때는 언제고…… 이제야 내 생각을 하는 척.”
“미안해. 정말 미안해, 스가.”
“그래. 다이치는 죽을 때까지 사과해야 해.”
“그럴게.”
“그런데 나 몰래 죽으면 죽는다. 진짜.”
“응.”
걔는 내 말이면 의심하지 않고 뭐든 순순히 따랐다. 그런데 또 앓게 하던 온기로 나를 마음 놓게 하고.
그래서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미운 사와무라는 가슴께에 맘껏 비비던 제 젖은 얼굴을 들어다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체온에 달궈져 뜨뜻미지근한 눈물을 몇 배는 더 뜨거운 혀로 마구 핥았다. 그러면 얼굴이 더 축축해지잖아. 건조하게 만드는 게 목적은 아니었는지 걔는 습기는 놔두고 눈물만을 닦아내려고 애썼다.
늦어서 미안. 생일 축하해.
다이치는 그 말을 마치려고 눈가의 점에 명료한 버드키스를 했다. 고마워. 스가와라는 말했다. 그런데 혹시 선물이 케이크는 아니지? 낮은 웃음소리가 코앞에서 울렸다. 너 케이크 안 좋아하잖아. 그래서, 와인이라도 따려고 했지. 와인. 나 와인 좋아해. 품에서 벗어난 스가와라가 개구진 표정을 해 보였다.
“네 안주 저기에 잔뜩 있어.”
“뭔데?”
마카롱. 으으. 다이치는 앓는 소리를 냈다.
그제야 스가와라는 좀, 소리 내어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