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그리고 장미에 대하여
W. 르네
가끔 생각한다. 겨울에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말이다. 겨울을 꽤 좋아했다. 내리는 눈을 마주하고 있을 때의 설렘과 아무도 자국 찍지 않은 눈밭 위에 처음으로 자취를 남길 때의 그 희열. 추워서 입을 호호 불면 나오는 동그랗고 하얀 입김 같은 것들을 말이다.
여름은…. 여름은 그다지 눈여겨볼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 생각해보니 하나 있었다. 장마. 내가 태어난 날은 장마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했다.
여름, 하면 흔히 바다를 떠올리곤 하지만 제게 떠오는 형상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풍경뿐이었다. 어릴 적 생일이라고 들뜰라치면 금세 흐려진 날씨가 기분을 해치곤 했다. 이상하게도 아침엔 해가 쨍쨍한 것이 열두시가 지나 세네 시 즈음 되면 금방이라도 쏟아부을 듯이 어두컴컴해지곤 했다. 그럴 때면 꼭 온 우주가 자신의 생일을 미워하는 듯했다. 네가 즐겁게 하루를 보내는 게 싫어. 라고 말이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과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교실 복도,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비를 머금은 흙냄새. 이 모두가 한데 모여 제 생일을 완성해주곤 했다.
그래도 어릴 적 생일은 그럭저럭 시끌벅적하게 보냈는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이마저도 무던해지고 말았다. 무던해진 것인지 무심해진 것인지 분간할 순 없지만, 여느 보통 날 중의 하나로 지나쳐버린 것이 벌써 몇 년째 지속되고 있었다. 그저 일상 속에서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문자와 전화를 받거나, 아침에 부모님께 전화를 걸거나 하는 등의 일이 추가되었을 뿐, 다른 것은 없었다.
열두시가 되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카게야마였다.
- 생일 축하해요. 스가와라 상.
꾸밈없는 한 마디에 카게야마 답다고 생각했다. 짧게 답장을 하고 누우려는 찰나,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 생일 축하해. 내일 저녁 먹을까?
다이치였다. 다이치는 늦은 시간에도 서슴지 않고 연락을 하곤 한다.
“내가 자는 시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야?”
“자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연락할 수 있는 사이라는 거지.”
예전에 반쯤 장난으로 불평했을 때 다이치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 미안, 오늘은 좀.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혼자 있고 싶은 날이.
- 그럼 나중에 시간 날 때 보자. 못 본지 꽤 됐잖아.
- 그래. 연락할게.
- 응. 잘 자고. 생일 축하한다.
다이치는 두 번이나 강조해 말한다. 그래도 신경 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퍽 기쁜 일이다. 나는 그만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서둘러 길을 나섰다. 지하철역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조금만 더 재촉하면 넉넉하게 출근해 커피를 한 잔 사서 사무실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출근길은 맨션 옆 작게 꾸며놓은 산책로를 따라 십분 쯤 걷는데, 평소엔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들이 시선을 끌어 고개를 돌려보았다.
덩굴장미가 한창이었다.
눅눅한 여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게중에 하나 마음 쓰는 것이 있다면 장미. 길옆 울타리에 칭칭 줄기를 감고 자라나는 덩굴장미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생장미. 그래 저런 걸 생장미라고 했다. 아직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것들은 붉다 못해 살짝 바랜 듯이 검어 보이기까지 했다. 파릇파릇 순이 돋으면서 생일 때 한창인 장미. 함부로 꺾을 수 있지만 아무나 건들지 못하는 생경한 것에 다시 한번 일 년을 되짚어본다. 매년 비슷한 시가에 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보는데 어쩜 그리 태어날 시간을 칼같이 알고 피어나는지 감탄을 넘어서 의아해진다.
좀 더 보고 싶지만 시간에 여유가 없어 쫓기듯이 걸어 나왔다. 괜스레 아쉬워진다.
- 생일 축하해.
모르는 번호로 메시지가 왔다. 도통 머리를 굴려보아도 익숙지 않은 번호였다. 그래도 답장 없이 있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짤막하게 답을 보냈다.
- 감사합니다.
문자는 더 오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에게서 메시지라니 이상하잖아. 스팸 문자인가? 요새는 스팸도 생일 축하한다고 보내나?”
“글쎄요….”
“이따가 경찰이 전화할지도 몰라. 보이스 피싱이니 사기라니 뭐니뭐니 말이야.”
이 이야기를 동료직원에게 하자 호들갑을 떨면서 대꾸해준다.
“그래도… 축하 메시지니까요.”
“그나저나 스가와라 군 축하해.”
“고마워요.”
“그래서 오늘 퇴근하고 뭐해? 데이트?”
“데이트할 사람이 있어야 하죠.”
“그럼 친구들이랑 파티?”
“친구들은 다 다른 곳에 있어서 오늘은 못 만날 것 같아요. 멀리 있거든요.”
“평소와 같은 날이네. 그럼. 아쉽겠어.”
아쉽다. 아쉬운 걸까. 아침에 보았던 장미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장미 향 향수를 하나 사러 백화점으로 향했다. 직원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좀 더 포근한 향을 권했지만, 시향도 하지 않고 장미 향이란 말을 듣고 냅다 사버리고 말았다.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오늘도 역시나, 비가 한두 방울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장마의 시작이었다. 눈으로 보아도 힘입게 내려치는 비에 길가에 펴있는 꽃이 걱정된다. 내리는 비를 피하지 못해 그대로 맞다가 편의점에 들러 우산을 샀다. 옛날부터 투명한 우산을 좋아했다. 빗방울이 흘러 불투명해진 비닐 사이로 밖을 바라보는 것이 썩 기분 좋았다. 길가에 둘려있는 것이 걱정되어 첨벙거리는 물웅덩이에 바지 밑단이 젖어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빨리한다.
우산 밖으로 보이는 장미는 흐릿했다. 물을 머금다 못해 세차게 내리는 장대비에 숨이 죽어 축 처져 있는 모습에 저 자신도 그만 울적해지고 만다. 괜스레 다가가 한 송이 만져보다 돋친 가시에 찔리곤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기만 했다.
언젠가부터 평범한 날의 연속이라 생각했다. 아마 자리를 잡고 친구들이 하나둘씩 바빠지면서 그리된 듯했다. 오늘은 그래도 특별한 날이니까. 아까는 일상적인 평범한 날이라고 해놓고 이제야 특별한 날이라고 애써 자신을 위로한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고요함이 맞이했다. 창을 살짝 열고 나간 탓에 빗방울이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비 냄새와 함께 오늘 산 향수가 떠오르면서 칙칙 한두 방울 허공에 뿌려본다.
방에도 한두 방울 화장실에도 부엌에도 괜히 뿌려본다. 온 집안에 생장미가 넘쳐났다. 오늘 아침에 보았던 햇빛 가득한 것과 저녁에 보았던 물먹은 것 모두 집 안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괜히 그 안에 누웠다.
장마와 장미로 시작한 하루가 이렇게나 길어졌다. 갑자기 쓸쓸한 마음이 일었다.
Rrrrrr
탁자 위에서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스가와라 상!”
“…히나타구나.”
“오늘 생일이잖아요. 카게야마가 저한테 전화하라고, 전화하라고 옆에서 하도 말을 해서요.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잘 지내고 계세요?”
“응 나야. 잘 지내지. 히나타는?”
“저도요. 보고 싶어요. 못 본 지 너무 오래됐어요.”
“나중에 한번 갈게. 그때 보자. 다들 잘 있지?”
“네. 다들 스가와라 상 보고 싶다고 난리예요.”
옆에서 무어라 말을 하고 있는데 대찬 빗소리와 섞여 분간이 잘 안 되었다.
“거기도 비가 오나 봐? 소리가 잘 안 들린다.”
“네. 장마 시작인가 봐요. 스가와라 상 집에 계세요?”
“응. 좀 전에 들어왔어.”
“아! 잘됐다. 잠시만요.”
현관 밖이 시끌시끌해지더니 초인종이 울렸다. 설마 하는 마음에 문밖으로 나가니. 히나타, 카게야마, 다이치, 타나카 등등 이 주르륵 서 있었다.
“…웬일이야?”
“스가와라 상. 섭섭하게 그런 말 하기 있습니까?”
“연락도 없이….”
“생일엔 혼자 있는 거 아니니까.”
다이치가 케이크 상자를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나는 너희들이 올지 모르고… 집에 아무것도 없는데….”
“일단 들어가면 안 될까요?”
“혼자서 궁상맞게 술이나 마시고 있을까 봐 다 같이 왔어. 미리 말 못 해서 미안.”
“아, 응. 들어와.”
“보고 싶었다구요. 스가와라 상. 히나타 아니었으면 오늘 얼굴도 못 보고 갈뻔했네요. 잘했어 히나타.”
“선배가 마침 집에 있어서 다행이에요. 어디 약속 있으신지 알았거든요.”
“스가는 생일 땐 집에 있어. 꼭 혼자 있으려 해서 문제지만”
“그래서 저희가 왔잖아요.”
“생일 축하해요. 스가와라 상!”
어쩌면 오늘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자칫 지나칠 만한 작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까운 사람들의 축하를 받을 때 비로소 환해졌다. 눅눅한 여름 장마 마저 기쁘게 껴안을 수 있을 정도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