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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으리

W. 페보

  도쿄의 1월 기온은 그리 낮은 편이 아니기에, 스가와라는 밖을 나오자마자 제 뺨을 매섭게 때리며 불어오는 바람이 꽤나 낯설었다. 오이카와가 틀어놓은 TV뉴스에서 오늘부터 강추위가 찾아온다고 말했던 것도 같았다. 왜 하필 오늘인거지…, 여름에 태어났기 때문인지 더위보다 추위를 더 못 견뎌하는 스가와라는 가볍게 맸던 목도리를 코끝까지 덮도록 다시 꼼꼼히 돌려 맸다. 급하게 나가려던 저를 불러 세우더니 목도리를 챙겨준 룸메이트 덕에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올라와 집을 구하던 중, 우연히 세이죠의 오이카와도 근처에서 집을 구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적으로 만나본 적은 없지만 괜찮겠지, 하고 덜컥 룸메이트 생활을 시작한 게 2년 전이었다. 걱정했던 것치고는 둘의 관심사가 워낙 비슷하기 때문인 건지 싸우는 일 없이 평탄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약속시각에 여유롭게 도착하도록 출발했지만, 추운 날씨 덕에 발걸음은 의도치 않게 빨라지고 있었다. 장갑을 끼지 않아 붉어진 손은 주머니에 꽂아 넣었고, 바람 때문에 얼얼해진 얼굴을 더욱 목도리에 파묻었다. 지하철역에 도착한 스가와라는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도쿄 체육관까지는 지하철로 20분 정도면 도착한다. 비록 선수로서 향하는 길은 아니었지만, 오늘도 그는 설레는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스가!”
“일찍 왔네! 오늘도 안녕~”

  약속시각 30분 전이었다. 저와 같은 이유인지 약속 시각보다 훨씬 이르게 도착해 있는 그들에, 스가와라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 둘 역시 익숙지 않은 도쿄의 추위에 맞서 완벽히 무장을 하고 있었다.
  도쿄 체육관을 기준으로 정반대 위치에 살고 있는 다이치, 아사히와는 체육관 앞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다이치는 도쿄의 B대학에 진학했고, 아사히는 원하던 회사에 취직한 상태였다. 작년 인터하이 시즌에 함께 카라스노고교를 찾았던 것을 마지막으로, 서로의 생활에 충실 하느라 오랜 기간 얼굴을 보고 있지 못하던 참이었다. 그러다 올해 봄고 대회가 개최된 지 5일 째, 아쉬워했던 기간을 보상이라 받겠다는 듯 그들은 대회기간 동안 매일 만나고 있었다. 나흘 간 함께 경기를 관람했던 시미즈는 월요일인 오늘은 회사에 꼭 나가봐야 한다며 오지 못했다.

“그나저나 진짜네. 결승이라니….”

  새삼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이치는 경기장 내부를 크게 둘러보았다. 오직 두 팀 간의 경기를 보러온 사람들이 경기장을 꽉 채우고 있었다. 응원석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자 맨 앞에는 ‘飛べ’라고 적힌 익숙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응원석 맨 앞자리에 나란히 서있는 세 명을 주축으로 했던 카라스노가 수년 만에 전국대회에 진출했던 게 벌써 2년 전이었다. 그리고 올해는 카라스노가 봄고 결승 경기를 앞둔 상태였다. 재능덩어리인 그들이 1학년일 때부터 카라스노가 전국에 진출했으므로, 2년 뒤 그들을 주축으로 한 완성도 높은 팀이 결승에 오른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새 한 명씩 이름이 불린 선수들이 코트 위에서 상대팀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모두가 숨죽인 채 경기의 시작을 기다렸다. 잠시 후 삐익, 하고 정적을 가르는 휘슬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상대팀의 강력한 서브를 시작으로,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코트 위에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그들을 보며, 스가와라는 2년 전 상대팀의 매치포인트에 핀치로 투입되었던 순간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무척이나 떨렸지만, 제가 해야 할 것은 명확했기에 망설일 것은 없었다. 스가와라는 상대팀의 에이스를 노려 코트 앞쪽으로 서브를 했고, 뒤늦게 반응한 에이스는 조금 흐트러진 리시브를 올렸다. 타나카가 상대팀의 스파이크를 완벽히 리시브한 그 순간, 카게야마와 스가와라는 빠르게 자리를 바꿨다. 스가와라를 제외한 모든 까마귀들의 싱크로 공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가와라는 보통 아사히에게 토스를 많이 올렸고, 상대팀도 그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스가와라는 중앙 돌파를 노리는 히나타에게 토스를 올렸다. 상대팀의 허점을 노린 속공이었기에 당연히 성공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스가와라의 예상과 달리, 상대팀의 블로킹은 히나타의 스파이크를 셧아웃했고 공은 바닥에 떨어졌다.
  상대팀의 매치포인트였기에, 카라스노는 거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허탈함을 달래기도 전에 저에게 “돈마이!”라고 외치는 그들에, 스가와라는 짧게 사과를 건넬 뿐이었다. 아사히가 카라스노에 다시 돌아왔던 그 날은, 스가와라 개인에게도 특별한 날이었다. 코트 위에는 6명이 서는 것이고, 경기에서 지더라도 누구 한 명의 잘못이 아님을 배웠다. 그래서 스가와라는 다른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만큼 지나치게 괴로워하진 않았었다.

 

 


삐익-

  카라스노의 우승을 확정짓는 휘슬 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채우며, 장장 5세트에 걸친 경기가 끝이 났다. 패배한 측의 아쉬운 탄성과 승리한 측의 환호성으로 경기장이 마구 흔들리는 듯 했다.
  그러나 카라스노 응원석의 모두가 기뻐하는 가운데, 이상하게도 스가와라는 의문의 불쾌함과 마주하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사정없이 일그러진 제 얼굴을, 다이치와 아사히에게 보이면 안 되는 건 명확했다.

“스가? 어디 가?!”

  그래서 스가와라는 당황한 다이치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출구를 향해 달렸고, 빠르게 역에 도착했다. 타이밍 좋게 바로 도착한 지하철을 망설임 없이 타자 집에는 금세 다다랐다. 제게는 보러 가지 않을 거라는 듯 얘기했지만, 결국 오이카와도 경기를 보러 간 건지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집 안의 공기만이 스가와라를 맞이할 뿐이었다. 보일러를 틀은 스가와라는 목도리도 벗지 않은 채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진짜 바보 같아….”

  스가와라는 엎드려 누워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쉴 새 없이 진동을 울리던 핸드폰도 꺼버렸다.
  카라스노의 결승 매치포인트, 그토록 원하던 1점을 따낸 것은 카게야마와 히나타의 괴짜 속공이었다. 정확히 맞물린 것도 모자라, 2년 간 폭발적으로 성장해 온 두 재능의 최종 완성작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속공을 본 순간, 스가와라는 같은 상황에서 히나타에게 토스를 올렸던 그 순간을 겹쳐보았다. 스가와라가 알 수 없는 불쾌함과 마주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다만, 이건 그들의 실력을 질투하는, 그런 유치한 이유가 아니었다. 타이밍의 문제였다. 스가와라는 최근 제가 슬럼프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대학 배구부에 가입해 꾸준히 배구를 하고 있지만, 요즘 자신이 실력이 제자리에 맴돌고만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금세 회복하고 더 뛰어난 선수로 성장할 수 있다고, 스가와라는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들의 폭발적인 재능과 마주한 순간, 그리고 자신의 배구와 겹쳐본 그 순간에 스가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제자리에 멈춘 내 실력은, 어쩌면 슬럼프가 아니라 내 최상의 배구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모든 걸 발휘한 게 이정도인 건 아닐까? 자신의 무기인 ‘착실함’을 바탕으로 지금껏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전보다 더 넓어진 배구사회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과 하나 둘 마주하기 시작하며, 스가와라는 마음 한구석에서 조금씩 불안감을 키워왔다.
  과연 나의 무기로 저 위에 있는 이들과 동등하게 싸울 수 있을까?
  그리고 결국 오늘, 그는 착실히 쌓아온 불안감과 함께 크게 무너져 버렸다. 언제나 밝은 에너지를 유지하는 사람일수록, 익숙지 않은 내면의 우울함과 마주할 때 그 감정에 더욱 빨리 젖어드는 법이다. 따뜻해진 공기에 나른해진 몸과 달리, 제 마음만은 도무지 안정시키기가 힘들었다. 오늘만, 딱 오늘만 약해지는 거야. 스가와라는 베개에 제 얼굴을 더욱 파묻었다.

.
.

“어라? 스가쨩, 집에 벌써 왔어?”

  스가와라가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아, 꽁꽁 얼은 얼굴을 한 오이카와가 집에 돌아왔다. 그는 예상치 못했던 따뜻한 공기에 놀라며 신발을 벗었다. 제 부름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살짝 열린 방문의 틈새로 방 안을 들여다보자,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엎드려서 자고 있는 스가와라가 보였다.
  스가와라에게는 제가 왜 보러 가냐며 툴툴대긴 했지만, 오이카와 역시 카라스노의 경기가 궁금했기에 경기장에 다녀온 참이었다. 카라스노가 우승도 했겠다, 축하 뒤풀이로 스가와라는 늦게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던 오이카와에게는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다. 그의 외투라도 벗겨주기 위해 오이카와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지만, 눈물자국이 가득한 그의 얼굴에 곧바로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스가쨩?”

  얼굴을 살짝 찡그린 채 잠들어 있는 그를 보며, 오이카와는 최근 제게 슬럼프가 찾아온 것 같다며 가볍게 운을 띄웠던 스가와라를 단숨에 떠올렸다. 고민 상담을 해주겠다며 자리를 잡고 앉은 오이카와를 두고 스가와라는 민망해하는 얼굴로 괜찮다며 방에 들어가 버렸고, 그 이후에도 깊은 대화는 하지 못한 상태였다. 오이카와는 그저 스가와라가 다시 말을 꺼내겠거니 하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이카와 역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괴짜콤비에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고 온 참이었다. 저를 천재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오이카와는 그들의 경기를 볼 때마다 자신은 천재가 아님을 매번 깨달았다. 두 천재들 사이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왔고, 그로 인한 고민과 좌절의 시간도 보냈던 오이카와였다. 그렇기에 그는 찬란히 빛나는 코트 위의 재능과 마주한 범인(凡人)의 마음을 십분(十分) 이해할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위로하듯 스가와라의 등을 조심스레 두드리고, 그의 방을 나왔다.
  소파에 길게 다리를 뻗고 누워, 스가와라를 어떻게 위로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까 생각하던 오이카와의 핸드폰이 울린 건 그날 저녁이었다. 고민을 하다 자연스레 졸음에 빠진 오이카와는 요란스러운 벨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스가와라와 룸메이트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사적으로 친해지기 시작한 다이치로부터의 연락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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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쏟아지는 과제와 시험에 허덕이다 보니, 벌써 5월 말이었다. 그리고 봄고 결승 날, 그 자리에서 뛰쳐나온 스가와라가 뒤늦게 받은 애들의 연락에도 답장을 하지 않은 게 벌써 4달 째였다. 시간이 늦었다거나 뭐라 써야할지 모르겠다거나, 여러 이유로 답장을 미루다가 바쁜 학기 생활을 보내고 나니 시간이 벌써 그렇게 지나버렸다고, 스가와라는 홀로 변명을 하고 있었다.
  그의 은빛 머리카락은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산들거렸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스가와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오늘도 체육관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자신의 한계를 의심하고 단정 지어 버렸던 그 날을 떨치기 위해, 스가와라는 지금까지보다 더 열심히 연습에 매진했다. 오버워크는 좋지 않다는 오이카와의 눈치 빠른 충고에도, 스가와라는 매일 더 늦은 시간까지 연습에 몰두했다. 연습량은 눈에 띄게 늘어났으나, 매일매일 체력의 한계를 웃도는 연습은 당연히 몸에 무리를 가져다주었다. 스가와라는 결국 부상으로 병원까지 찾게 되었다. 위태로운 스가와라의 모습에, 그가 스스로 자신에게 얘기를 꺼내길 기다렸던 오이카와도 슬슬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내려던 참이었다.

 

 


띠링,

  내일이면 스가와라의 생일이 있는 6월이었다. 주말이라 알람도 끈 채 자고 있던 스가와라는 라인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에 부스스 눈을 떴다. 해는 이미 중천에 뜬 건지, 빈틈없이 쳐놓은 커튼 사이로 들어온 일광 한줄기가 침대 끝을 부여잡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아직 졸음이 가득한 눈을 끔뻑거리며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한 손으로 위태롭게 핸드폰을 잡은 채 메시지를 확인하던 스가와라는 하마터면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다른 손으로 제 눈을 비비며, 스가와라는 발신자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스가와라 선배 오랜만이에요! 올해 봄고 결승 때는 제가 못 가서……」

  보내온 이는 엔노시타였다. 봄고 이후 스가와라가 일부러 답을 하지 않자, 그런 그를 눈치 챈 듯 카라스노 애들에게서는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제 변명에 민망해 하면서도 별다른 행동은 따로 취하지 않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5월 31일 오늘, 엔노시타가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스가와라의 안부를 묻던 그는 제게 고마웠던 점을 간단히 이어 적었다. 그리고 이번 스가와라의 생일에 카라스노고교 근처에서 생일파티를 하자며 메시지를 끝냈다. 발신자 뿐 아니라 너무도 뜬금없는 내용에 스가와라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 스가와라 선배 덕분에 바보콤비들이 머리를 쓰는 걸 배웠어요. ……」
「…… 스가상은 저를 자주 놀렸지만 다 애정의 의미인 걸 알고 있어요!! ……」
「…… 나를 위해 다시 용기를 내겠다고 했을 때 정말 고마웠어! ……」 

  그리고 그 날 이후, 스가와라의 생일을 맞아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광고라도 하듯 하루에 한 명씩 스가와라에게 같은 전개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6월 9일인 오늘은 시미즈에게서 연락이 왔고, 스가와라의 생일 4일 전인 오늘 히나타, 카게야마와 다이치를 제외하고는 모두에게서 메시지가 온 상태였다.
  카라스노 애들이 제 생일 이벤트를 꾸미는 줄 상상도 못했던 스가와라는 엔노시타에게 이미 고맙다며 답장을 했었다. 그렇기에 스가와라는 그 이후 메시지를 보내온 이들에게도 짧게나마 답장을 했다.
  초반만 하더라도 어찌 답장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고맙다는 말만 짧게 보냈지만, 점점 쌓이는 그들의 메시지를 읽으며 스가와라는 제 감정의 변화를 답장에 담아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슬럼프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칭찬을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듯이 그들의 고맙다는 정성스런 한마디에 스가와라가 조금씩 치유를 받고 있는 것은 명백했다. 스가와라는 그들의 메시지에 동해 자연스레 길어지는 내용을 다듬었고, 행복한 고민을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컨디션도 점차 나아졌다.
  그리고 10일과 11일, 모닝콜에 눈을 뜬 스가와라가 핸드폰을 확인하자 히나타와 카게야마에게서는 이미 아침 일찍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오이카와가 며칠 전 합숙을 떠난 터라 집 안은 조용했고, 그 적막 속에서 스가와라는 그들의 진심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스가와라 선배 저 히나타에요! 잘 지내고 있으신 거죠?!
 선배에게 고마운 점을 쓰기로 했는데, 너무 많아서 뭘 적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아마 카게야마도 그럴걸요? 카게야마는 항상 저한테 바보라고 하지만 사실 걔가 더 바보니까요!!
 앗, 이건 비밀로 해주세요..
 입부하기 전에 3:3 시합 준비하는 일주일 동안 매일 리시브 도와주신 것
 경기 사인 정해주신 것 (저에겐 첫 경기 사인이었어요!),
 인터하이 때 괴짜속공이랑 보통속공 사인 도와주신 것
 그리고 경기할 때나 합숙할 때나! 졸업해서도 시간 내서 도와주신 거 모두 감사해하고 있어요!
 이번에 우승한 것도 스가와라 선배가 많이많이 도와주신 덕분에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코트 위에서 같이 뛰진 않았지만, 스가와라 선배가 도와주신 것들이 모두 합쳐진 거니까요!
 선배들이 와서 응원해줄 때마다 같이 뛰고 있는 것만 같았어요!
 며칠 뒤엔 선배 생일이네요~ 같이 생일파티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너무 길어진 것 같지만! 금요일에 봐요 스가와라 선배!」

「스가와라 선배 안녕하세요 카게야마에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오이카와 선배한테도 물어봤는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쓰라고 하더라고요
 선배 덕분에 세터의 역할을 배울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같이 코트위에서 뛴 건 아니었지만 올해 카라스노 우승은 다 같이 이룬 거라는 걸 잊지 않으셨으면 해요   그럼 며칠 뒤에 선배 생일파티 때 봐요」

  히나타와 카게야마의 메시지를 받은 스가와라는, 어쩌면 제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던 건 아니었나 생각했다. 2년 전, 제가 카라스노 애들과 함께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싸운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카라스노는 6명이서 강한 팀이었기에, 전국의 강호들과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다. 그건 제가 싸운 결과가 아닌, 팀 카라스노로서의 결과였다.
  자신이 어느 팀에 속하든, 모든 팀에는 코트 위에 서는 6명이 있다. 분명 그 사실을 배웠음에도, 나는 또 혼자서 싸우려고 한 게 아닐까?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강한 자들과 싸우기 힘들다고 단정 지으며 혼자서 무리했던 자신의 모습을, 스가와라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나저나 카게야마는 역시 배구에 한해서는 눈치가 정말 빠른 것 같네…. 어라?”

  스가와라는 저녁을 먹으며, 저의 생각을 꿰뚫어보는 것만 같은 그들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읽고 있었다. 그리고 카게야마의 메시지에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는 오이카와의 이름에, 스가와라는 오이카와도 이 이벤트에 관여했음을 깨달았다. 아마 다이치랑 같이 준비한 거겠지. 꽤나 유치한 이벤트에 카라스노 애들을 모두 참여할 수 있게 만들 사람은 다이치 뿐이라 생각했다. 스가와라는 다이치에게 뭘 준비하는 거냐며 먼저 연락하기도 했지만, 그에게서 답장은 따로 오지 않은 상태였다.
  늦은 저녁을 다 먹고 나니 어느새 오후 10시였다. 이 시각이면 오이카와가 모든 연습을 끝내고 쉬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합숙 중이라 바쁘다면, 내일 집에 돌아오는 길에라도 확인하길 바라며 스가와라는 핸드폰을 두드렸다.

「오이카와 씨는 언제 준비 했대… 내일 돌아오지? 오랜만에 같이 술이나 마실래?」

  때마침 오이카와는 강도 높은 훈련에 맥이 빠진 채로 샤워를 하고 나온 후였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는 도중 울리는 알람소리에, 오이카와는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앞뒤 맥락이 꽤나 부족했음에도 오이카와는 단번에 스가와라의 말을 이해했다.

「토비오 쨩이 말했지? 쳇, 내일 서프라이즈 해주려고 했는데.. 잘 자고 내일 봐 스가쨩!」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한 오이카와의 메시지에 스가와라는 간단한 이모티콘으로 답장을 보냈다. 오이카와가 언제든 제 고민을 들어줄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스가와라는 괜한 민망함에 그 상황을 피해 왔었다. 그러나 이제 카라스노 애들의 응원에 힘입어 다시 일어설 준비가 된 스가와라였다. 더 이상 저를 걱정하고 믿어준 이들에게서 도망치지 말고, 그들과 마주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스가와라의 생일을 이틀 앞둔 11일 오늘, 스가와라에게 메시지를 보내지 않은 건 다이치 뿐이었다. 학생 때부터 대화 없이도 서로를 잘 이해했던 둘이었기에, 어느 정도 저의 상태를 눈치 챈 다이치가 이런 이벤트를 준비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스가와라는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생각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12일로 넘어가는 그 순간, 스가와라의 핸드폰은 기다렸단 듯 익숙한 알림을 울렸다.

「스가, 안녕! 미리 생일 축하해! 내일 미야기에 같이 가자.
 오랜만에 우리 집에서 같이 자는 건 어때? 내일 봐!」

  스가와라는 지나치게 강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약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아니, 그는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충분히 강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다이치는 제가 아는 ‘스가’라면, 이미 약해졌던 저를 추스른 채 자신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스가와라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쓸 데 없이 길어질 필요가 없었고, 스가와라도 그런 다이치의 생각을 잘 알고 있었다.

.
.

  목요일 훈련을 끝낸 오이카와는 케이크를 들고 오후 4시 쯤 집에 도착했지만, 그때 스가와라는 집에 없었다. 오이카와가 짐정리를 마무리할 무렵, 스가와라가 돌아왔는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가쨩! 왔어?”
“어, 빨리 왔네?”

  오이카와는 제 방에서 서둘러 나와 스가와라를 마중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있는 스가와라의 옆에는 두 개의 커다란 쇼핑봉지가 놓여 있었다. 각자가 좋아하는 술과 안주거리가 담겨 있는 모양이었다. 사온 것들을 모두 정리하고 나자, 둘 사이에는 지금껏 느껴본 적 없던 어색한 정적이 찾아왔다. 스가와라가 작게 헛기침을 하자, 오이카와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 상쾌군~ 드디어 얘기해줄 마음이 든 거야?”

  2년 전 세이죠와의 경기 이후,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반갑다는 듯 스가와라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이미 스가쨩 혼자서 정리 잘 한 거 같아 보이지만 말이야! 서운해, 스가쨩~”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어! 크흠, 바로 마실까?”

  스가와라의 말에 놀란 듯 오이카와는 눈을 크게 떴다. 쑥스러워 하는 얼굴로 방금 넣어 놓았던 술과 안주들을 다시 꺼내는 스가와라를 도우며, 오이카와는 다시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식탁 위에 여러 안주를 늘어놓은 채 둘은 술만 홀짝이는 중이었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고, 스가와라는 어떤 말로 운을 떼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슬럼프에 빠진 적 있어?”
“스가쨩처럼 매일 오버워크하고, 천재들 사이에서 내가 될까? 생각했던 거라면 있지!”

  쑥스러운 마음에 돌려 말하려는 저를 붙잡고 정곡을 찔러오는 오이카와에, 스가와라는 제가 쥐고 있던 마른안주를 그에게 곧장 던졌다. 민망함에 보내는 작은 항의였다. 날아오는 마른안주를 정확하게 입으로 받은 오이카와는 몇 번 오물거리더니 곧장 삼켰다. 훌륭한 리시브라는 생각이 들어, 스가와라는 헛웃음을 지었다.

“…음, 오이카와씨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 내 힘의 상한선은 여기까지고, 천재인… 우시지마나 토비오는 나와 태어난 시점부터 다르다고 말이야!”

  그러나 예상치 못한 그의 이야기에 스가와라는 올렸던 입꼬리를 꺼트렸다. 그들을 부르는 방식이 바뀜과 동시에 오이카와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졌다.

“그런데 오이카와씨 얘기를 듣고는 어떤 분이 말해주시더라고. 내 기술, 체력, 정신력 중에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다고 말이야.”
“…….”
“내가 뭘 하든 그들과 동등하게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 모든 노력을 다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고 말하는데…, 정말 그렇다고 생각이 들더라고! 사실 아직도 천재들과 동등하게 싸우는 게 가능한지 확신은 없어. 하지만 그때 오이카와씨 한계가 여기까지라고 단정 짓고 포기했다면, 지금까지 보내온 시간들보다 더 힘들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
“…….”
“그리고 이건 스가쨩도 잘 알고 있을 거 같지만, 가장 잊기 쉬운 거라서….”

  스가와라는 자기를 쳐다보는 오이카와의 눈과 똑바로 마주했다. 말끝을 흐린 것과 달리, 저를 압도하는 그의 눈빛은 너무도 형형했다.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린 것이 분명했다. 알고 있다면 스스로 얘기하라고, 그는 암묵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어느 팀으로 가든… 배구는 6명이서 하는 거라는 거?”
“역시 부활했네, 스가쨩~”

  오이카와는 기분 좋은 듯 환하게 웃으며 제 앞에 놓인 술을 원샷했고, 스가와라도 덩달아 맥주 반 캔을 한 번에 마셔버렸다.

“혼자 무리하지 않아도 돼. 좋은 팀으로서 싸우는 거야!”

  주량이 그리 세지 않은 오이카와는 그새 얼굴이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내일 카라스노 애들을 만나기 전, 오이카와와 얘기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팀으로서도, 개인으로서도 제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틀린 길이 아니었다. 재능의 정도가 다른 그들과는 다른 방향과 속도로 나아가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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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짤막히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거실에서 자고 있던 스가와라와 오이카와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인지 둘은 평소보다 신나서 술을 마셨고, 각자의 주량을 초과한 술자리는 결국 다음날 심한 숙취를 가져왔다. 눈만 끔뻑거리고 있던 차에 초인종이 다시 한 번 울렸다. 결국 스가와라는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나가요.”

  갈라지는 제 목소리에 놀라 헛기침을 하며 문을 열자, 문 앞에는 다이치가 서있었다.

“풉, 스가… 술 많이 마셨구나. 얼른 씻어. 가자!”

  초췌한 스가의 얼굴을 보고, 다이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는 듯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고, 다이치에게 들어오라는 듯 문을 활짝 열었다. 다이치는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면서 집으로 들어왔고, 가만히 누워있던 오이카와도 한껏 졸린 목소리로 “스가쨩, 생일 축하해….”라고 신음하듯이 말했다.
  드디어 6월 13일, 스가와라 코우시의 생일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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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기도 거의 1년 만인가?”

  작년 인터하이 예선 때 잠깐 들렀던 게 벌써 1년 전이었다. 다이치의 물음에 스가와라는 짧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셋이서 간단하게 늦은 점심을 먹은 뒤 신칸센을 타고 미야기에 도착하자, 어느새 저녁시간이었다. 미야기로 향하는 동안 푹 잤기 때문인지, 스가와라의 컨디션은 그새 꽤나 좋아진 상태였다.

“이젠 괜찮은 거야, 스가?”

  말없이 걷던 다이치는 어느 음식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저를 뒤따라오던 스가와라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다이치는 언제나 믿음직스러웠던 그 주장의 모습으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동료이자 친구인 스가와라를 신뢰한 채 묻고 있었다. ‘괜찮지?’

“…우물쭈물 끙끙대고 주저해서 죄송합니다!”

  카라스노 동네팀과의 시합 날, 제게 부활했다며 말하는 다이치에게 스가와라가 했던 대답이었다. 다이치도 그때를 떠올렸는지 씨익 웃었고, 옆으로 비키며 스가와라에게 문을 열라는 듯 식당의 문고리를 가리켰다. 스가와라는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벌컥, 하고 문을 열었다.

“스가와라 선배! 생일 축하해요!”

  그리고 스가와라가 존재감을 드러낸 순간, 식당 안에서 그를 기다리던 이들은 큰 소리로 스가와라의 생일을 축하했다. 그리고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스가와라 앞으로, 니시노야가 초가 꽂혀있는 케이크를 들고 걸어왔다.

“스가 선배, 소원! 촛불!”

  니시노야의 말에 스가와라는 눈을 감고 소원을 빈 뒤 후, 하고 바람을 불어 촛불을 껐다. 이후 스가와라의 눈치를 보는 듯 잠깐의 정적이 찾아올 무렵, 스가와라는 보기만 해도 기운이 솟는 그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야, 얘들아. 모두들 축하해줘서 고마워!”

  그러자 어색했던 분위기는 그의 말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생일파티 겸 동창회다운 화목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금세 달아오른 분위기는 그들과 함께 배구를 하던 때를 상기시켰다. 벅차오르는 이 감정이 꼭 비슷했다.
  늦은 밤 돌아가는 후배들과 시미즈를 챙긴 뒤, 자리에 남은 건 스가와라, 다이치, 아사히였다. 스가와라와 아사히의 가족은 그들이 도쿄로 떠나면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기 때문에, 셋은 다이치 네에서 함께 자기로 했다.

“우리 꼭 학교 다니던 때 같다.”

  나란히 한 곳을 향해 걸어가는 모양이 꼭 그랬다. 아사히의 말에 동의하는 엷은 미소를 띠며, 스가와라는 서 너 개의 별만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깜깜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어두워도, 아무리 다른 환경 때문에 남들에게 보이기 어려워도, 어디든 빛은 있는 법이다.

‘최선을 다해서, 그러나 즐겁게 배구를 하도록 해주세요.’

  그건 혼자서 하는 다짐에 가까웠다. 그러나 현재의, 그리고 앞으로의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스가와라는 그렇게 소원을 빌었다. 6명이 강한 배구가 강한 것임을 몸소 배웠다. 스가와라는 양 주먹을 꼭 쥐며 다시는 이를 잊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스가와라 코우시의 배구는 이제 다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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