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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스가] Amaranth of Moon

W. 이튿

1.
그날 저녁 도로 옆의 작은 꽃집에 들어가 장미꽃 한 송이를 포장해달라고 말한 것은 어느 정도는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고민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길다면 긴 시간을 이 결정을 내리는 데 보내느라 온종일 다른 일은 뒷전이었다. 다만 어떤 일은 분명 곤란해질 것을 알면서도 결국은 저지르게 되곤 했고 그것이 다행히도 혹은 하필이면 그날이었던 것이다. 이미 답은 반쯤 정해져 있었던 고민의 끝에 결국 꽃집의 문턱을 넘을 때에는 어떻게든 될 것 같았던 것이, 다시 뒤돌아 나오면서는 한없이 막막해지고 말았다. 오이카와는 우두커니 서서 손에 들린 꽃잎에 맺힌 물방울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런 일은 흔치 않았기 때문에 오이카와는 자기 스스로도 제 행동이 생경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 것이기도 했다. 한껏 부풀었던 걸음이 구멍이 난 풍선마냥 점점 늘어지다 결국은 길 위에 추락해 멈춰 섰다.
일전에 얻었던 번호로 축하한다는 말의 상투적인 메시지를 보내고 말 수도 있었지만, 사실 그게 더 자연스러웠겠지만, 그 정도로 끝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여름에 문턱 앞에 다다라 볕은 눈부셨고 바람은 달았으며 공기에는 약간 두근거리도록 숨을 쉴 수 있을 만치 습기가 섞여 있었으므로, 이 문장의 마지막은 계절을 맞아 피어난 꽃을 마침 축하를 받아야 할 누군가에게 쥐여주었다는 말로 끝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충분한 계단을 딛고 서 있었냐면 그건 아니었다. 멀리서 볼 때는 낮아 보였던 턱이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주 높이 뛰어도 넘을 수 없는 벽 같았다. 가만히 있었음에도 숨이 턱 막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의식적으로 느리게 숨을 쉬려고 노력하며 심호흡을 했다.
오이카와는 평범하게 포장된 꽃 한 송이를 들고 거리에 멈춰 서 한참을 서성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몇 발자국을 내디뎠다가 다시 뒷걸음질 치기를 반복했다. 오늘은 네가 축하받아야 하는 날이어서 꽃을 샀다고, 그리고 정말 많이 축하한다는 평범한 말을 어떻게 평범하게 전할 수 있을지 아무리 고민해도 이렇다 할 답은 나오지 않았다. 입에서 그 단어들이 모여 문장을 이루는 순간 이미 혼자서만 넘쳐흐른 마음이 스며들어 주변의 모든 것을 부자연스럽게 뒤틀어놓을 것만 같았다. 마음이 꽃잎이었다면 그 무게 때문에 여름의 초입을 넘기지 못한 채 흙바닥에 쌓이고 말았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애꿎은 바닥을 툭툭 신발 끝으로 찼다. 신발코에 조금씩 얼룩이 패였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장미꽃 가지들이 마치 저를 놀리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 꽃들 사이에 숨을 콱 박고 죽기라도 하고 싶었다. 아주 진심이었느냐면, 그건 아니긴 했다.

 

오래된 이야기였다.

 

 


2.
하필이면 오후까지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오이카와는 맨 뒷자리에 가방을 두고 대충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마침 학교 근처에 꽃집이 있었으므로, 그곳을 들렀다가 스가와라의 학교에 가면 시간은 그럭저럭 넉넉할 것 같았다. 어떤 색 장미를 살까. 몇 송이 정도가 가장 예쁘려나? 안개꽃도 같이 달라고 할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중에 강의실의 앞문을 열고 교수가 걸어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교수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출석부를 펼쳤다. 오이카와는 더 바짝 고개를 낮추고 가방끈을 움켜쥐었다.

조금 더 큰 꽃다발을 만들고 싶었지만 충분히 예쁘게 핀 장미를 골라내다 보니 꽃다발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정성 들여 포장된 꽃들을 받아들고 나니 오히려 이 편을 스가와라가 더 좋아할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오이카와는 혹여나 모양이 흐트러질까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온 꽃다발을 들고 학생들이 오가는 정문 옆에 섰다. 맑은 초여름 날, 붉은 장미 꽃다발을 든 남자가 홀로 서 있는 데에 흘끗흘끗 시선을 주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네가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마음이 자꾸만 벅차올라 여기서 조금만 더 떨린다면 자연스럽게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런다고 시간이 빨리 가는 것도 아님을 알면서도 자꾸만 손목시계의 시곗바늘을 확인했다. 초침이 한 칸 한 칸 움직일 때마다 그 몇 배의 수만큼 심장이 뛰었다. 의식적으로 느리게 숨을 쉬려고 노력하며 심호흡을 했다. 코우시가 오면, 꽃다발을 건네고, 축하한다고 말하고, 작게 포옹을 해야지.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가며 말간 얼굴 전체로 흐드러지게 피었다. 첫 발자국을 내디뎠던 그 언젠가가 어렴풋이, 동시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더 이상, 정처 없이 서성거리지 않아도 된다. 새삼 그 사실이 감격스러워 오이카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바람 한 조각에 나풀거렸다. 리본을 묶어 장식한 장미꽃다발을 괜스레 등 뒤로 감추어 보았다. 고백하자면, 매일매일이 감격에 찬 나날들이기는 했다.

 

 


3. 
 모든 일정을 마치고 클럽하우스로 돌아온 오이카와는 대충 짐을 정리한 후 곧바로 샤워실로 걸음을 옮겼다. 며칠 전부터 머릿속에 드문드문 메모했던 작은 고백들을 모두 꺼내 모아 이리저리 맞추어보았다. 스가와라에게 어떤 말부터 꺼내는 것이 좋을지 그리고 어떤 단어를 써야 할지 천천히, 분주히 고민하느라 샤워기를 든 손은 평소보다 느려졌다. 뭘 그리 오래 씻었느냐는 동료의 말에는 너풀거리는 웃음만 지어 보이고 말았다. 거울 앞에 서서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오이카와는 이내 다시 긴 고민으로 접어들었다. 

…  멀리 떨어져 있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여기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너를 생각나게 해. 연습을 대충 했다는 건 아니야. 네가 많이, 아주 많이 보고 싶다는 말이야. 아침 식사에 함께 나온 아보카도, 휴게실의 약간 빛바랜 소파, 아침에 커튼을 걷으면 눈부시게 비춰오는 햇빛, 그리고 길가의 장미. 그런 것들 있잖아. 그런 모든 게 꼭 너를 떠올리도록 만드는 것 같아. 극적일 만큼. 네가 내 타임라인에 촘촘히, 가득히 스며들었나 봐. 아, 예전부터 항상 이런 말이 하고 싶었는데. 드디어 적절한 표현을 찾은 것 같네. 음. 신기하지. 암스트롱이 달에 발자국을 남긴 건 아주 오래전 일이잖아. 그래도 사람들은…  
다음 단어를 떠올리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눈꺼풀이 가물가물 움직이다 이내 천천히 감겼다. 

 

 


4.
손끝에 닿는 감각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집에 도착하면 이불 빨래부터 해야겠다. 냉장고도 채우고.
돌아가는 길에는 장미를 사야지.
공항에서 집에 가는 길에 꽃집이 있던가.
아, 미리 전화해서 충분히 예쁘게 핀 꽃들로만 준비해달라고 부탁해놓아야겠다. 안개꽃도.
예전에 갔던 그 꽃집, 아직도 하고 있었으면 좋겠는데.
나 없는 동안 아보카도랑 바나나는 다 먹었으려나. 마파두부 먹는 반만 챙겨 먹으라니까.
저녁 전에 아보카도 주스 만들어둬야겠다. 치커리를 넣은 샐러드랑.
케이크랑 무알콜 샴페인… 선물도.
일부러 미술관까지 들러서 샀는데, 맘에 들어 하려나.
맘에 들었으면 좋겠다.

 

 


5.
오이카와는 매년 아주 오랫동안 공들여 고민해 선물을 고르고 이벤트를 준비했다. 그래서 매년, 스가와라가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지 아주 자세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매년, 스가와라는 눈물점이 가리지 않는 것이 이상할 만큼 깊게 눈꼬리를 접어 웃었으므로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를 따라 아주 깊게, 달의 표면에 크레이터라도 만들 듯 마주 웃어 보이고만 말았다. 그리고 올해에도 아침부터 밤에 잠들기 전까지의 시간들이 모두 맘에 들었느냐는 질문은 다시 갈무리해 넣어두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달을 볼 때마다 암스트롱을 떠올리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6.
아침부터 수업이며 일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생각이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었던 탓이었다. 책상에 엎드린 눈꺼풀이 가물가물 움직이다 이내 천천히 감겼다. 주위의 소리가 차츰 멀어져가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어… 뭐라고 보낼지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집에 가기 전에는 문자를 보내야겠다. 


그러지 말고 돌아가는 길에는 장미를 살까? 요즘에 예쁘게 피던데.
그쪽으로 가는 도로에 꽃집이 있던가.
꽃다발을 만들어달라고 할까? 안 돼. 한 송이만. 딱 한 송이만.
전에 카네이션 샀던 그 꽃집, 아직도 하고 있었으면 좋겠는데.
꽃은 아무래도 부담스럽긴 하겠지.
아냐, 요즘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는 선물이라고 둘러대면 돼.
아. 이런 날 꽃 사보는 건 처음인데, 맘에 들어 하려나.
맘에 들었으면 좋겠다.

 

 


7.
새벽녘에 눈이 뜨인 것은 오랜만이었다. 몸을 뒤척여 옆으로 돌아눕자 전하지 못한 장미꽃 한 송이가 보였다. 스가와라 코우시의 생일은 지났다. 부풀었던 마음이 부질없을 만큼, 스가와라에겐, 여느 때와 같았을. 머리맡의, 갈 곳을 잃은 꽃송이를 한참 바라보던 오이카와는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 새벽녘에 눈이 뜨인 것은 오랜만이었다. 몸을 뒤척여 옆으로 돌아눕자 스가와라의 손에 들려주었던 장미꽃다발이 보였다. 스가와라 코우시의 생일은 지났다. 여느 때처럼 웃음을 한껏 담은 축하와 함께. 케이크를 자르고, 샴페인을 따고, 선물을 열어보는 일련의 일 때문에 화병에 옮겨 담는 것을 잊은 꽃다발을 한참 바라보던 오이카와는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아마도 비어있었을 투명한 화병을 꺼내어 씻었다. 맑은 물을 채우고 꽃송이들을 정리해 가지런히 담았다. 그리고 스가와라의 눈이 가장 자주 가닿을 법한 곳에 조심히 꽃이 담긴 화병을 올려두었다. 오이카와는 벽에 비스듬히 기대 서 물방울이 맺힌 꽃잎을 한참 바라보았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 아침이 오면 자신은 커튼을 걷을 것이고, 이른 시간이어도 계절이 계절인 만큼 부신 빛에 스가와라는 눈을 떠 몸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는 소파에 앉아 아보카도에 바나나를 조금 넣은 주스를 마시며, 올해에도 드라이플라워를 만들자고 말할 것이다. 꽃잎들이 시들어 떨어지지 않도록. 오래된 이야기였다. 오이카와는 오랜만에 꽃을 머금었을 화병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려보다 기대 선 몸을 일으켰다. 투명한 화병의 끄트머리가 달빛을 받아 엷게 반짝였다.

침대맡으로 돌아온 오이카와는 곤히 잠든 스가와라의 옆에 누워 품 안에 들어오는 몸을 익숙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생일 축하해. 여름의 문턱 앞에 설 때마다 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쁘다. 정말, 많이.
흰 얼굴이 어슴푸레한 빛을 받아 달처럼 빛났다. 작은 크레이터가 만들어지듯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8.
그 꽃은 지금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오래된, 여전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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