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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스가] 비와 6월 13일과, 사와무라 다이치

W. 초록

   비 냄새가 가득 풍기는 아침이었다. 간밤에 내린 비에 촉촉이 엉겨든 흙덩이가 신발 밑창을 툭툭 건드리는, 그런 화요일 아침. 스가와라 코우시는 문득 멈추어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옅은 먹구름이 슬금슬금 하늘을 덮느라 꾸물거리고 있었다. 그 모양을 눈으로 좇다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역시 오늘도 비가 내릴 모양이었다. 걸음을 다시 옮기는데 어쩐지 발이 가벼워 점점 속도가 붙었다. 빠른 걸음을 걷다가 가볍게 뛰다가 어느새 다리를 한껏 뻗어 달리고 있었다. 가방이 덜컹거리는 통에 끈이 어깨를 파고들었고, 웅덩이를 피해 달리고 있었으나 바지 밑단에는 황토색 점들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한참을 내달리다 눈앞에 삼거리가 보이니 힘껏 움직이던 다리가 느린 돋움을 반복하여 모퉁이에서 멈추었다. 스가와라는 멈추어 선 곳에서 사와무라 다이치가 나타날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길 끝과 맞닿은 하늘엔 보다 짙은 먹구름이 넘어오는 중이었다.

 


-카라스노 고교 일 학년 스가와라 코우시는 사와무라 다이치가 조금 어려웠다.

 

   새로 입학한 학교, 학기 초의 떠들썩하고 예리한 탐색기, 세 명-사와무라 다이치, 아즈마네 아사히, 스가와라 코우시-의 일 학년이 입부한 카라스노 배구부, 몰락한 강호교의 그저 그런 부원이고 싶지 않았던 세 사람의 의지. 점심시간마다 모여 연습 방향과 전략을 회의했고, 시간이 맞으면 셋 중 하나의 집에 모여 배구영상을 틀어 공부했다. 새 학교, 새 학년, 새 학기의 그 모든 요소가 세 사람이 친해지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지게끔 했다. 스가와라도 그 흐름을 기꺼워하였으며, 원체 붙임성이 좋은 성격이라 금세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장난을 치는데 스스럼이 없었다. 그러나 스가와라는 왠지 사와무라보다 아즈마네를 대하는 것이 좀 더 편했다. 사와무라가 싫은 건 아니었고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다만,

   스가와라가 말한다. B퀵 속공인가? 사와무라가 덧붙인다. 마침 어제 본 영상이 있는데, 거기선 같은 상황에 오픈으로 라이트를 쓰더라고. 스가와라가 다시 말한다. 투어택은 무리겠지? 사와무라가 대답한다. 아무래도. 아즈마네가 말을 꺼낸다. 지난번에 본 것 중엔 있지 않았어? 스가와라가 씩 웃는다. 혹시 토요일에 봤던 그거 말하는 거야? 사와무라가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너 혹시 금붕어야? 스가와라가 덩달아 심각하게 아즈마네의 등을 두드려준다. 괜찮아. 하루 이틀도 아니니까, 힘내. 그리고 다이치, 금붕어 욕하지 마. 아즈마네가 울상을 짓는다. 스가와라가 입술을 꾹 물고 웃음을 참는다. 사와무라를 흘긋 본다. 사와무라도 스가와라를 흘긋 본다. 참았던 웃음이 크게 터진다. 주제를 마무리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사와무라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 스가와라가 말을 꺼낸다. 참, 너 문학 다 했어? 아즈마네가 고개를 끄덕인다. 스가와라가 한 쪽 손바닥을 내민다. 내놔. 아즈마네가 당황한다. 응? 스가와라가 나머지 한 쪽 손도 내민다. 보여줘. 아즈마네가 말한다. 깡패야? 스가와라가 짓궂게 웃는다. 아즈마네가 입술을 삐죽 내민다. 사와무라가 돌아온다. 아즈마네가 일어난다. 나도 화장실. 사와무라는 말이 없다. 스가와라도 말이 없다. 사와무라는 노트를 한 장 넘긴다. 스가와라는 그걸 본다. 사와무라는 연필 끝을 노트 위에 톡톡 두드린다. 스가와라는 그것도 본다. 스가와라가 고개를 들다가 사와무라와 눈이 마주친다. 스가와라가 말을 꺼낸다. 어, 저기…문학 다 했어? 사와무라가 대답한다. 그럼. …너는? 스가와라도 대답한다. 응, 나도. 사와무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내린다. 정적. 스가와라는 손가락을 꼼질거린다. 아즈마네가 돌아온다. 사와무라가 타박한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 스가와라가 보탠다. 시원해? 아즈마네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너네 솔직히 말해. 둘이 맨날 따로 놀지? 만나서 나 괴롭힐 생각만 하지? 사와무라가 대답한다. 아무렴. 스가와라는 생각한다. 설마.
   학기가 시작한지 세 달이 넘어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스가와라는 아침부터 여기저기에서 축하인사를 받았다. 이 날, 사와무라는 결석을 했다. 집에 일이 있다고 했었다. 스가와라는 그렇구나, 했다. 반 친구들이 선물과 작은 과자에 초를 꽂아주었고, 방과 후 부 활동에서도 선배들이 과자를 하나씩 던져주었다. 스가와라가 학교를 나설 즘에는 비 때문에 사위가 벌써 어두컴컴했다. 아즈마네와 막 헤어지고 조금 더 걸었을 때였나, 몇 걸음 앞에 우산을 쓴 사와무라 다이치가 서 있었다. 안녕? 그가 새삼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스가와라는 꿈을 꾸나 싶어 그 자리에 가만히 섰지만 사와무라는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무언가를 내밀었다. 열쇠고리. 생일 축하해. 스가와라는 눈을 꿈뻑이며 가만히 섰다. 사와무라는 머쓱하게 웃었다. 스가와라는 그 얼굴과 작은 선물을 번갈아 보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속에서 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막혔던 게 툭 터지는가, 생각했다. 목구멍에 걸린 이것은 웃음인가, 아니면 울음인가. 스가와라는 겨우 손을 내밀어 사와무라의 축하를 받았다. 고마워. 동글동글한 까마귀 인형이 달린 열쇠고리였다. 스가와라는 소리내어 웃었다. 못생겼어! 사와무라가 덩달아 웃었다. 처음으로 둘의 시간에 오롯한 웃음이 빗물처럼 번졌다.

 


-카라스노 고교 이 학년 스가와라 코우시는 사와무라 다이치가 조금 신경 쓰였다.

 

   사와무라는 무른 사람이 결코 아니었으나 다정했다. 가까운 사람에게는 유독 세심하기도 했다. 그리고 스가와라는 그와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의 곁에 있을 때는 마치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근 것 같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곳에 오래 잠겨있으니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고 편안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가끔 물 밖으로 몸이 드러나면 새삼 깨닫는 것이다. 사와무라의 온도를.
   한가로운 일요일, 스가와라는 침대에 엎드려 만화책을 보는 중이었다. 아래에는 사와무라가 앉아 침대에 등을 기대고 같은 만화의 다른 권을 펼쳐들고 있었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방 을 채웠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물비린내가 흘렀다. 비가 오려나. 스가와라는 고개를 틀어 까만 뒤통수로 시선을 내렸다. 다이치. 응? 내일 연습 없는데 뭐해? 나랑 놀자. 그는 고민하지 않고 끄덕였다. 그래. 사와무라는 ‘내일’이 무슨 날인지 기억하고 있었다. 아사히는, 하고 묻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역시 비가 내렸다. 비 오는 날의 학교는 구석구석 축축했다. 교실도, 복도도 향이 달랐다. 그래서일까 스가와라는 들뜨는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모처럼 다른 날, 이었으니까. 점심시간이라 도시락을 들고 아사히네 반으로 향하던 길에 복도에서 친구에게 다가가는 사와무라를 발견했다. 몸이 절로 그쪽을 향하다가 대화내용을 들었더니 스가와라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그거 오늘 맞지? 응, 어디로 가면 된다고? 스가와라는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오늘? 어딜 가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거기에서 바로 끼어들어 물어보면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왜? 스가와라는 약간의 한기를 느꼈다.
   띵동-
   스가와라는 종례가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집으로 와버렸다. 사실은 본인을 찾는 목소리가 들릴까봐 천천히 걸었으나, 결국 혼자 집에 도착했다. 축축한 신발과 양말을 벗고 흐느적흐느적 방에 들어가 이불을 덮어썼다. 몸을 둥글게 말고 숨을 쉬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 소리가 들린 것이다. 벌떡 일어나 문 앞으로 간 스가와라는 어쩐지 그 앞에서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초인종이 두어 번 더 울리고 잠깐의 정적이 흐르자 시야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한 방울이 볼을 타고 뚝 떨어지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 황급히 닦아냈는데 이번엔
   쾅쾅쾅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스가와라는 목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누구세요? 스가? 나야. 알아. 스가와라는 속으로 꿍얼거리고는 그제야 발을 움직여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황당한 표정을 한 사와무라가 서 있었다. 뭐야, 너. 혼자 가버리고. 손잡이를 잡아당겨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이유를 묻는 사와무라의 등을 보던 스가와라는 그의 손에 들린 작은 상자를 발견했다. 그거 뭐야? 사와무라는 자기 손에 있는 걸 한 번 내려다보고는 뒷목을 긁적였다. 아, 이거. 그리고는 그걸 그대로 스가와라에게 내밀었다. 케이크. 2반에 걔 알지? 누나가 시내에서 가게를 한다는데 좀 괜찮나봐. 그래서 부탁했지. 근데 너 진짜 왜 먼저 간 거냐? 그 순간 스가와라는 아까부터 느꼈던 한기가 증발하는 걸 느꼈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라 돌아온 거다. 온기가 돌아온 거다. 그걸 깨달아버렸다. 스가와라의 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와무라는 허둥지둥 케이크 상자를 내려놓고는 스가와라의 앞에 섰다. 무슨 말도 못 꺼내고 손을 어깨에 올렸다 내렸다 볼을 닦아주려다 손을 거두었다,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 꼴을 보던 스가와라는 눈물을 매단 채로 조금 웃었다. 그리고 사와무라의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대었다. 화들짝 놀라는 게 느껴졌으나 에라 모르겠단 심정으로 이마를 붙이고 서 있었다. 잠시 후에 따뜻한 팔이 등을 감싸오는 걸 느끼며 스가와라는 이마를 단단한 어깨에 살짝 부볐다. 급하게 온 건지 어깨가 살짝 젖어있었다. 비 냄새 난다. 따뜻해.     


-카라스노 고교 삼 학년 스가와라 코우시는 등굣길에 사와무라 다이치를 기다리면서 이년간의 오늘을 회상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가와라는 멀리서 걸어오는 까만 인영을 발견했다. 팔을 들어 인사하는 걸 가만 보고 있었더니 달리는 모양인지 빠르게 가까워졌다. 스가, 이름을 부르나 싶어 귀를 쫑긋했으나 그 사이 눈 앞에 도착했다. 사와무라는 허리를 푹 수그리고 숨을 고르더니 이내 곧게 허리를 펴고는 스가와라를 마주했다. 넘친다.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동그란 눈망울에서 무언가 일렁인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몇 걸음마다 넓게 고인 웅덩이의 그것처럼, 신발 밑창에 달라붙어 툭툭 건드리는 그것처럼, 땅을 찰 때마다 물기 젖은 알갱이가 튀어오르던 모양처럼.
   “좋은 아침!”
   때가 되면 이토록 흠뻑 내리는 이 비와 같은가 생각했다. 흠뻑, 이라는 단어가 가늠하는 무언가의 양에 대하여 고민했다. 조금에 가깝던가, 그 반대이던가. 후자인 것이 당연했으나, 때로는 당연한 것이 의미를 양보해 주었으면 하는 순간이 있다. 
   “생일 축하해.”
   스가와라는 눈을 깜박였다. 문득 깨달았다. 새삼, 원했다. 그가 오늘의 선물이기를 원했다. 올해의 선물은 그이길 원했다. 원한다는 것마저 깨달아버렸다. 

   카라스노 고교 삼 학년 스가와라 코우시는 사와무라 다이치에게 조금 젖었다. 그가 몰고 오는 이 날의 빗물에, 그 다정한 미소에, 흠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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