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편지
W. 다와
D-1, 170612.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는 꾸겨진 종이 사이로 빛을 받아 더 진한 빛을 띠는 고동색의 머리카락이 책상 위에 엎어져 있다. 머리칼의 주인은 왼팔을 베개 삼아 반쯤 감긴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며 다른 손에 펜을 잡고 능숙하게 돌린다. 몇 분이나 채 지나갔을까, 그는 돌리던 펜을 책상 위에 내려두었다. 아무런 소리 하나 없이 정적이 가득하고 어둠이 내려앉은 방, 칠흑 같은 어둠 속 에서 새어 나오는 스탠드의 빛이 그의 밤을 더 나른하고 고요하게 만든다. 후우-. 고요한 정적을 깨는 건 가슴속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한숨이었다. 오이카와는 한 번 더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찡그렸다. 제 옆에 꾸겨진 종이마냥 말이다. 그리고는 오이카와 자신이 지금 이 시각에 왜 이러고 있는지를 설명할 과거의 일을 곱씹어보았다.
D-5, 170608.
별일은 아니었다. 스가와라의 생일을 준비하다가 생긴 일이었다. 처음으로 함께 맞이하는 생일이라 더욱 많이 신경 싶었던 것뿐이었다. 친구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시답지 않은 소리를 들은지라 차선책으로 찾아보게 된 것이 인터넷이었다.
< 연인에게 편지를 써주면 어떨까요? 마음이 담긴 선물, 직접 만든 선물도 좋지만, 손으로 쓴 편지라면 확실히 더 기억에 남을 거예요! >
순정파에 해당하는 것인지, 누군지도 모를 사람이 쓴 글의 손편지라는 단어에 금세 매료된 오이카와였다. 그는 좋네, 좋아! 하고 곧바로 신이 나서 편지지를 사러 간 것이 바로 4일 전의 일이었다. 편지지를 사러 가는 길, 꽃집 앞에 늘어서 있는 다홍빛의 꽃이 오이카와의 눈을 가득 채웠다. 이참에 꽃집도 들러 미리 주문하였다. 생일선물로 주는 꽃이라니, 잘생기고 마음씨 좋은 애인이라 좋겠다며 이것저것 챙겨주는 주인아저씨의 말에 그쵸, 근데 제 애인만 모른다니까요~? 라며 그는 평소처럼 장난기 많은 웃음을 지으며 뒤통수를 매만졌다. 꽃집에서 나온 오이카와는 꽃 색깔과 그나마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편지지를 샀다. 매대 가장 아래에 있는 편지지 종류를 보기 위해 장신의 몸을 쭈그린 자신의 모습에 그는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보다는 설레는 마음이 더욱 가득했다. 물론 그런 마음은 잠시뿐이었다. 그는 집에 돌아와 펜을 잡고 한 자씩 천천히 써 내려갔다. 아니 그렇게 될 줄 알았다.‘ To. 스가와라 코우시. ’ 이건 너무 딱딱한가? ‘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 아, 이것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의 계속되는 반복. 받는 이를 쓰는 부분부터 턱-막히어 도무지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 이렇게 쓰다간 몇 장 들어있지도 않은 편지지를 다 써버릴 것만 같은 예감에 다른 종이를 꺼내 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구!! 끊임없이 반복되는 도돌이표, 그렇게 그날 단 한 줄의 문장도 완성하지 못한 오이카와는 애꿎은 펜만을 탓했다.
다시 D-1, 170612.
그렇게 지우고 쓰길 반복한 결과, 어느새 4일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스가와라의 생일이 하루 뒤로 성큼 다가왔다. 오이카와에게는 더는 편지 쓰는 것을 지체할 여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의 그 마음가짐은 다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초조함이 신경을 타고 흘렀다. 목덜미가 답답하다. 그는 기대있는 등을 의자에서 떼고 손깍지를 껴 몸을 앞으로 쭈욱 뻗었다. 기지개를 켜고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스트레칭을 한 그는 곧 스탠드의 전원을 껐다. 형광등이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것만 같다. 빛 하나 없이 어둠이 내려앉은 방,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요함을 깨는 의자 소리. 곧이어 커튼 뒤에 가려져 있던 달빛 한 줌이 흘러들어왔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이끌리듯이 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창밖의 달의 조각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사이로 경쾌한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갑자기 울린 벨소리에 흠칫-하며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휴대폰을 들어 벨소리의 주인공의 이름을 확인하자 그의 입꼬리가 절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미소를 지었다. 기분 좋은 예감이 오이카와에게 다가왔다.
◇ ◆ ◇ ◆ ◇
D-day, 170613.
지잉- 지이잉-. 몇 분씩이나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진동 소리. 침대 위에 이불을 돌돌 말고 있는 무언가가 이불 밖으로 팔을 뻗어 얇고 하얀 손으로 바닥을 더듬거리더니 곧 손을 이불 안으로 넣었다. 뭐지, 갓 태어난 강아지마냥 커튼 뒤로 약하게 들어오는 빛에도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던 스가와라는 아직도 울리고 있는 휴대전화의 액정을 쳐다보았다. 액정 위로 [ 스가 생일 축하해! ] [ 스가와라 선배, 생일 축하드려요. ] 등의 생일축하 메시지가 둥둥 떠다녔다. 머엉-하니 휴대폰 액정만을 바라보던 스가와라의 눈에 상단 바의 시간이 들어왔다. AM 09:38. 미친. 스가와라의 입술 사이로 후우,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1초 전까지 해도 소중하게 몸을 둘둘 말고 있던 이불을 무자비하게 걷어찼다.
승객들의 원망 섞인 목소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기사는 달리는 버스에 속도를 붙였다. 도로의 신호등조차 무시하고 앞으로 직진하는 버스. 그리고 그렇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스가와라는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잠을 취하고 있었다. 스가와라의 머리가 위태롭게 흔들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창문과 부딪혔다. “으악-. 내려요! ” 그는 잠이 깰 틈도 없이 정류장을 확인하고 곧바로 사람들 틈에 섞여 버스에서 내렸다. 그는 눈을 반쯤 뜬 채로 정류장 의자에 앉아있다가 문득 시계를 보았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아침 10시를 가리키던 손목시계는 눈 깜빡할 사이에 돌고 돌아 밤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계를 보고 안도와 지침의 한숨을 내쉬던 스가와라의 고개는 다시 위를 향했다. 쏟아지는 띵동-. 스가와라는 휴대폰을 꺼내 문자에 대한 답을 보내고 문자메시지함을 살펴보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몇 번씩이나 액정을 뚫어지라 쳐다본 후에야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 터질듯한 문자함 속에서 오이카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다. 왜지? 얼마 전의 대화를 곱씹어보니 오늘은 바쁠 것 같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평소처럼 휴대폰을 들어 번호를 치고 통화버튼을 누르려던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바빠서 연락 한 통 없었는데, 제 전화를 받을 리가. 짤막한 문자를 남기었다. 괜히 그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았다. 스가와라가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 하나하나, 그 뒤로 무거운 그림자가 바닥에 드리웠다. 가는 길목마다 가로등은 짜기라도 한 듯 깜빡거리거나 꺼진 상태, 구름에 가려진 달의 빛은 그나마 조금 남아있는 전등 빛과 맞물려 절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자신을 데려다주면서 가로등 빨리 고쳐야 해! 하며 구청에 전화하라고 저에게 말하며 서로 장난을 치던 장면이 스가와라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바로 전에까지 꺼져있던 집 앞 가로등의 불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우체통 안에는 무엇인지 모를 물건의 형체가 가로등이 깜빡거리는 찰나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하다. 이를 본 스가와라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팟-. 가로등이 그의 집 앞을 환히 비추었다. 그제야 편지함에 있던 게 무엇인지 눈에 들어왔다. 편지 하나와 작은 꽃 한 송이. 이제 스가와라의 손에는 편지 한 통과 꽃 한 송이가 쥐어져 있다. 그는 처음 세상 구경을 나온 병아리처럼 주변을 둘러보면서 슬그머니 현관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선다. 쿵…, 쿵…, 쿵…. 적막하고 고요하던 집 안에서 기분 좋은 울림이 사방에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스가와라는 가방을 안중에도 없듯 집어 던지고, 꽃은 선반 위에 두고, 편지를 손에 들고 소파에 기대앉았다. 차분히 숨을 고르고 한 손으로 편지를 잡고 한 손으로는 조심스레 포장을 뜯어냈다. 곱게 들어있는 편지를 꺼내 들고 위에서부터 천천히, 눈으로 내용을 훑기 시작했다. 째깍째깍, 그의 시선은 벽에 걸려있는 시계로 옮겨졌다. 시간을 확인한 그는 다시 편지를 집어 들고 몇 분이고 편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니, 뗄 수 없었다는 표현이 맞았다. 스가와라는 편지를 봉투에 넣고 싱크대로 발걸음을 향했다. 선반 위에서 가장 아끼던 컵을 꺼내 잠기지 않을 정도로 물을 받아 꽃을 넣고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시계를 보고는 신발을 우겨 신고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댕댕-. 문에 붙어있는 풍경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6월의 밤공기는 슬슬 쌀쌀한 티를 벗으려는 중이었지만, 공원에선 아직까진 꽤 쌀쌀한 공기가 맴돌았다. 그리고, 그곳 벤치 앞엔, 손목의 시계와 공원 입구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안절부절못하는 오이카와가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 남자가 걸음을 천천히 늦추며 공원 안에 들어왔다. 바로 전에까지 뛰다 온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바삐 숨을 고르는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공원 입구를 쳐다보면 오이카와와 두리번거리던 그, 둘은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입꼬리를 싱긋 올리며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서서히 오이카와에게 다가오던 그는 바로 딱 한 걸음 앞에 서서 오이카와와 두 눈을 마주쳤다. 연신 숨을 고루 내쉬던 그는 기분 좋은 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곤 한 걸음 다가가 오이카와를 껴안았다. 으앗-. 저를 껴안은 그를 한참 바라보던 오이카와의 눈꼬리가 내려가며 예쁜 미소를 보였다. 뭐야~ 스가쨩. 떨어지지 않고 계속 저를 껴안고 있는 스가와라를 내려다보던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를 조금 떼어 놓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몸을 감고 있던 손을 떼 스가와라의 붉게 상기된 볼을 어루만졌다.
" 코우시, 생일 축하해, 사랑해. "
" 나도, 고마워. 토오루. "
서로를 마주 보던 오이카와와 스가와라는, 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을 감았고, 살짝 무릎을 숙이고, 살포시 뒤꿈치를 들었고, 온기를 나누었다. 6월 13일, 쌀쌀하게 느껴지던 둘의 밤이 다홍빛으로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