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W. 윶
얼마 전부터 애들이 이상하다.
나를 빼놓고 속닥속닥거리는데다가 내가 다가가면 마치 간신배가 계략을 꾸미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 때문에,
흠칫거리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나 야치는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괜찮냐고 물어보려 다가가면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저 멀리 튕겨나간다.
내가 예민한건가. 아니야. 저 애들, 수상한 티를 팍팍 내고 있다고!
***
그러니까 작년에 받았던 내 생일선물을 잊을 수가 없다.
‘스가와라 관찰기’ 라는 이상한 제목의 책을 받았었는데, 뭐 나름 재밌기도 했고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도 추억이려나.
배구부 1학년부터 3학년이 나를 하루 동안 관찰했던 것인데 감동 이런 것보다는 웃겼다.
글이라기보다는 아무말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지금, 카라스노 고등학교 배구부는 다시 만나기로 했다.
이것들, 30분이 지났는데 아직 아무도 안 나왔다.
이 더운 여름날에 서서 기다리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저 멀리서 뭔가 달려오는 것 같기도.
아, 아니네.
인사하려고 뻗었던 손을 머쓱하게 거둔다.
이번에는 과연 내 생일선물을 핑계 삼아 얼마나 이상한 선물을 줄지 감이 안 온다.
딱히 싫었던 건 아니지만, 사실대로 말해보자면 기쁜 쪽에 가까웠지만.
***
히나타 쇼요
****년 05월 20일 날씨: 맑은 것 같다.
내가 무려 스가와라 선배의 생일선물의 스타트를 끊다니…!
혹시라도 들킬까봐 두근두근거린다.
그러니까 이건, 스가와라 선배를 위해 특별제작 된 생일선물이라나 뭐라나.
하여튼! 들키면 안 되는 것 같다. 다이치 선배의 얼굴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문제는 대체 뭘 적어야할지 모르겠다는 거다.
분명 관찰한 걸 써야하는 데 카게야마 때문에 관찰 같을 걸 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생일축하 인사는 해야되겠지.
스가와라 선배, 생일 축하드립니다.
카게야마 토비오
****년 5월 21일 날씨: 체육관 안에만 있어서 모름
오늘은 일요일. 어김없이 배구 연습을 하러 나왔다.
물론 스가와라 선배도 있었다.
10시: 워밍업할 때 스가와라 선배가 짓궂은 표정으로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뭔가 싶어서 빤히 바라보자 이내 시미즈 선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간다.
둘이 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워보여서 히나타를 괴롭히기로 결심했다.
12시: 배구부원들끼리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아,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생각이 안 난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여튼 스가와라 선배가 긴장한 듯한 야치에게 물을 건네주었다던가, 야마구치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었다던가, 나에게 격려의 말을 해 주었다던가 이런 일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것만 보면 스가와라 선배는 천사가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
가끔…이 아니라 틈만 나면 나름 스가와라 선배만의 애정표현인 등짝때리기를 시전하는데 나도 한 번 맞아봤다.
어깨가 너무 아파서 다시는 배구를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다른 부원들에 비해 몸이 가느다란 느낌이 든다고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는 것을 절절히 깨달았다.
16시: 연습시간에 히나타 보게 자식 때문에 한참 열을 올리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다 보니 이걸 쓰는 것을 잊고 있었다.
선배는 대체 오늘 무엇을 했을까.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스가와라 선배는 나와는 다르지만 분명히 대단한 사람이다.
나와 다르게 스파이커들의 기분도 잘 알아차리고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데 특출난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아마 나는 3학년이 되어도 절대 선배처럼 될 수 없을 것 같다.
스가와라 선배, 생일 축하드립니다.
야치 히토카
****년 05월 22일 날씨: 음, 맑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쓰는데 너무 떨려서 손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다.
우선 내가 알고 있는 스가와라 선배는 착하고 착하고 착하다.
확실히 카게야마의 말처럼 전형적인 남고생 느낌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음, 난 아직 잘 모르겠다.
옆에서 츠키시마가 칭찬을 적으라고 한다.
어, 음, 칭찬이라…
그래, 내가 기억하는 스가와라 선배는 등근육이 멋졌다.
어라, 츠키시마가 웃는다. 이렇게 적으면 안 되는걸까.
나도 모르겠다…
스가와라 선배, 생일 축하드려요!
***
오랜만에 읽어보니 감회가 색다르다.
애들이 써놓은 게 너무 웃겨서 휴대폰으로 찍어놨었더랬다.
가끔 체육관에 가면 알 수 없는 위화감 때문에 조금 서글퍼질 때도 있지만, 역시 기대처럼 잘해주고 있었다.
주장 엔노시타가 많이 힘들어 보이기는 했지만.
***
그런데 얘네 진짜 왜 안 나오냐.
내 생일 까먹은 거 아닐까.
라인을 보내봐도 전혀 답장이 없다.
너무 더워서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졸업하고 나서 3학년들과 자주 갔던 곳이다.
항상 앉던 테이블에 앉자, 우리가 했던 낙서가 보인다.
'다이치, 스가와라, 아사히, 시미즈 왔다 감.'
졸업한 3학년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면, 모두 대학교에 입학했다.
다이치와 나는 같은 대학교에 갔고 아사히와 시미즈와는 다른 학교이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꾸준한 만남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3학년 때는 배구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는데 막상 대학교에 가보니까 배구 없는 날도 나름 즐거웠다.
분명히 3학년 때와는 다른 즐거움이겠지만.
***
나는 지금 짜고 매운 마파두부를 먹고 싶었기 때문에 커피도 반 정도 남기도 밖으로 나왔다.
라인을 읽지도 않고 누군가 나올 것 같지도 않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데 키요코에게서 전화가 왔다.
"코우시, 미안. 애들이 좀 늦을 것 같대."
"아, 괜찮아. 걔네 늦는 건 여전하네."
"풉, 그런가. 이따 저녁에 갈게."
키요코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통화하는 내내 웃음을 머금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웃는 키요코에게는 차마 짜증을 낼 수가 없었다.
***
집 바닥에 널브러져서 애꿎은 휴대폰만 만지작만지작 거렸다.
남자 3명이 함께 있으면 질식해서 죽을 것 같을 정도로 좁은 집이었다.
그 만큼 조금만 방 안을 뒤적거리면 물건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딱히 할 일도 없겠다, 노래나 들으려고 이어폰을 찾으려고 책상 안을 손으로 더듬었다.
먹고 나서 안 버린 사탕 껍질,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종이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책상 서랍 안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곳에서 이어폰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숨을 푹 쉬고 이어폰 찾는 것을 포기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머리가 타버릴 것 같은 더위에 한 시간이나 있었고,
왠지 모를 짜증이 밀려왔기 때문에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던 건지.
밖이 꽤 어두워졌다.
내 스무살 생일도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잘해줘봤자 아무 소용도 없네. 다 부질없다.
혼자서 투덜투덜거리며 거울을 지나가다가 순간 움찔했다.
저 거울에 비치는 게 왠지 니시노야 같기도 하고.
빡빡머리는 타나카인 것 같기도 하고.
잠이 덜 깬 건가 싶어서 뺨을 두 어번 정도 착 때리자, 어디선가 히익-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건 야치네.
변한 게 없는 듯한 아이들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스가와라 선배, 많이 외로우시구나. 그쵸?"
"그래, 그렇구나."
히나타가 저런 말도 할 줄 알고 많이 컸다고 생각했다.
마음놓고 하하 웃고 있을 때
"보게! 어디 뚫린 입이라고 하늘같은 선배님께 그런 말을 해대는 거냐!"
"아니, 카게야마. 난 별로 상관없는데..."
"뭐, 보게라고? 과연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있을까?"
결국 또 싸움판을 벌이는구나.
이제는 주장이 된 엔노시타가 늘 이렇다는 듯이 능숙하게 둘을 떼어낸다.
"히나타, 카게야마. 너네 또 이러면 그 땐 정말 믹서기에 둘을 같이 갈아버릴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그 말에 모두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푸핫, 엔노시타. 그런 말은 어디에서 배운거야?"
다이치가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묻는다.
"뭐, 그냥, 마음의 소리를 솔직하게 말한 것 뿐이죠."
***
"케이크랑 마파두부랑 같이 준비하느라고 늦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다이치가 건네준 케이크 상자와 밀폐용기.
내가 아무리 마파두부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케이크와는 같이 먹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라고 말하기 전에 커다란 숟가락들이 내 입 속으로 막무가내로 들어왔다.
키요코가 만든 음식이라는 것을 깨닫고 차마 맛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며 꾸역꾸역 삼키는 게 전부였다.
역시 대학 생활도 즐거웠지만 너희들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 가장 즐거웠던 것 같다.
***
"선배, 이건 진짜 선물!"
"뭐야, 이건 또."
의문스러운 포장지에 있는 선물이다.
올해는 또 어떤 생일 선물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