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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스가] Android 2.2

W. 제뉴

   사와무라는 긴장으로 바짝 마른 입술을 몇 번 문질렀다. 집처럼 드나들던 곳인데도 심사 날만 되면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뒤에서 카트를 끌던 조수가 오늘 날씨가 어떻다는 둥 점심은 어떤 게 좋겠냐는 둥 일상적인 얘기를 떠들고 있었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멈춰선 사와무라는 말없이 카트 위의 검은색 케이스에 손을 얹었다. 제 키보다 이 센티미터 정도 작을 뿐, 사람 크기와 다를 바 없는 크고 길쭉한 박스였다. 승인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조수의 얼굴은 저보다 배는 밝았다. 사와무라 다이치는 B단지의 유일한 선임연구원이었고, 그가 만든 ‘상품’은 언제나 극찬을 받으며 만장일치로 승인되었으니 믿음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여유롭게 통과할 수 있을 거였다. 사실은 사와무라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다.

   “불허합니다.”

 

   승인이 거절되었음을 알리는 레드라이트가 점멸하는 것을 일 분쯤 바라보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사와무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통과하지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어쩐지 마음 한 구석에서는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조용한 저를 대신해 조수가 더 길길이 날뛰었다. 부품 스펙, 배터리 지속성, 사고능력 전부 기존의 상품들보다 훨씬 상위 레벨인데 왜 불허하는 거죠? 사와무라도 묻고 싶은 말이었으나 돌아올 대답도 알고 있었다. 심사단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기계처럼 말했다.

   “감정 수치가 너무 높아.”
   “그건 그냥 상황 데이터 분석력이 좋아서 그런 거예요! 어차피 진짜 감정도 아닌데 그게 다른 스펙보다 더 중요한가요?”
   “위험 범위를 넘어섰어.”
   “당신들 정말!”
   “그만해.”

   사와무라는 차분한 얼굴로 그것-의 허리를 잡고 들어 케이스 안에 다시 넣었다. 특별히 외양에 신경 쓴 보람이 있는지 손바닥에 닿는 살이 진짜처럼 말랑말랑했다. 저를 향한 회색 눈동자가 반질거렸다. 특수 광물질로 만들어 실제 인간의 동공을 98% 이상 똑같이 재현한 것이었다. 손바닥으로 눈 위를 덮자 부드럽게 눈꺼풀이 내려가 꾹 닫혔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만들기 위해 꽤 고생했었다.

 

   “오늘 안에 폐기하는 거 잊지 마.”
   “알고 있습니다. 이만 실례하죠.”

   솔직히 말하면 자존심이 상했다. 거의 삼 년을 매달려 만들어낸, 나름대로의 역작이었는데. 심사장을 나온 조수는 자기가 더 분한 듯 눈물까지 그렁그렁 매달고 있었다. 사와무라는 그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리고 카트 손잡이를 직접 잡았다.

   “선임님.”
   “내가 직접 가지고 갈게. 오늘은 여기서 퇴근해.”
   “저는 정말 이해가 안 돼요. 얼마나 고생해서 만든 건데…”
   “원래도 감정 수치가 아슬아슬하긴 했었잖아. 그것만 조절해서 다시 만들면 되지.”

   말이야 쉽지, 데이터가 있더라도 하나를 아예 새로 만들려면 또 일 년쯤 걸릴 거였다. 수치 하나를 조절하려면 메인 보드부터 뜯어고쳐야 할 거고, 하나를 고치면 또 다른 쪽도 전부 손봐야 할 테니 여간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 여전히 울먹이는 조수를 잘 달래 돌려보낸 사와무라가 엘리베이터 벽에 등을 기댔다. 상품용 엘리베이터는 인간의 것보다 두 배는 느리게 움직여서,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기에 좋았다.

   안드로이드 2.2가 상품 허가를 받지 못했다.

   감정 수치가 너무 높다는 게 이유였다. 그 말인 즉, 상품 주제에 지나치게 사람 같다는 얘기였다. 사와무라는 슬쩍 케이스를 열어 눈을 감은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좀 더 인위적으로 만들 걸 그랬나. 눈동자 색과 맞춘 회빛 머리칼에서는 윤기까지 흘렀다. 심사 기계에 들어갔다 나오느라 흐트러진 것을 적당히 정리해주자 정수리 위로 머리카락 몇 가닥이 붕 떴다. 이것도 나름 포인트였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한숨을 내쉰 사와무라가 카트를 밀며 연구실로 들어섰다. 밥도 잠도 잊고 온 정성을 쏟아 만들었는데 그간의 노력이 한 순간에 부정당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로봇이라도 사람처럼 생긴 걸 몇 년씩이나 매일 보면 정이라는 게 생길 수밖에 없었다. 사람 마음이 그랬다. 통로 형태의 폐기함 앞에 멈춰 케이스를 카트에서 내렸다. 무게까지 인간과 비슷해서 제법 힘을 주지 않으면 옮길 수도 없었다. 후우. 심호흡을 한 사와무라가 케이스를 열어 안드로이드를 꺼냈다. 면바지에 니트, 운동화까지 해서 갖출 건 다 갖춘 모양새였다. 하얀 피부 위로 얼핏 드러난 핏줄까지 완벽했다. 너무 완벽한 나머지 폐기 선고를 받았지만.
   어차피 쓰지도 못할 거, 더 보고 있어봤자 미련만 남을 것 같아 곧바로 폐기함 스위치를 켰다. 로딩을 기다리는 동안 나름대로의 작별인사를 위해 그것의 어깨를 두드렸다. 말로 하기에 미묘한 감정을 표현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으나, 너무 습관이 되어버린 나머지 사와무라는 제가 전원 버튼을 어디에 삽입했는지도 잊어버렸다. 그것이 실수였다.
 
   - 안드로이드 2.2, 시스템 시작합니다.
   “아.”

 

   망했다. 재빨리 뒷주머니에서 강제종료 칩을 꺼냈지만 스펙도 좋고 성능도 좋은 신제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로딩을 마쳤다. 굳게 닫혀있던 눈꺼풀이 들리며 반질반질한 회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와무라는 정통으로 쏟아지는 시선에 흠칫 몸을 굳혔다. 그것은 눈을 뜨자마자 근사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당신의 안드로이드 2.2. 만나서 반가워요. 청소, 빨래, 요리, 공부, 운동, 못하는 게 없답니다! 은밀한 취향이 있다면 그것도 오케이! 제 이름은 뭔가요?”
   “아, 저기. 음. 안녕. 눈 뜨자마자 이런 말해서 미안한데, 너 곧 폐기될 거거든.”

 

   특수 광물질로 만들어진 눈동자가 예리하게 사와무라의 전신을 스캔했다. 뚫어져라 눈을 마주치는 것은 홍채 인식을 위한 행동이었으나, 어쩐지 속내를 들켜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시선 끝이 조금 내려갔다. 애초에 좀 저돌적인 성격으로 만들어진 버전이었다.

 

   “확인했습니다, 사와무라 다이치씨. 제 이름은 뭔가요?”

 

   사와무라는 이 와중에도 언어구사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에 만족했다. 안드로이드 특유의 기계음도 없고, 발음도 목소리 톤도 나쁘지 않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저도 모르게 그것의 턱을 붙잡고 들었다. 일정 시간에 맞춰 침을 넘기도록 설계한 목울대가 마침 일렁였다. 엄지로 툭 튀어나온 부분을 쓸자 사람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굴곡이 느껴졌다. 이런 건 다시 만들라고 해도 못 만들 것 같은데. 미간을 찌푸린 사와무라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오늘 안에 폐기 데이터가 본부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놈의 위원님들이 득달같이 저를 체포하러 달려올 것이었으나, 평생의 역작을 이런 식으로 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대답 없는 사와무라를 빤히 보던 그것이 재차 말을 걸었다.

 

   “제게 이름을 주세요.”
   “…곧 폐기할 거라니까. 이름이 필요해?”
   “그럼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름이 있어요.”

 

   너를 계속 존재하게 할지 말지 고민 중이니까 조용히 해 봐. 그 말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와무라가 작전을 세우는 동안 다섯 번도 넘게 이름을 달라 외쳤고, 좀처럼 짜증내는 일이 없는 사와무라도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대충 눈에 보이는 활자를 읽었다. 실험용으로만 쓰이는 하얀색 가루의 명칭이었다. 슈가.

 

   “슈가는 설탕이잖아요. 저는 다른 것과 겹치는 이름은 싫어요.”
   “하아?”

 

   안드로이드 2.2는 로딩 후 시간이 지날수록 의사표현이 강해진다. 초기 설정 수치 범위 안이긴 했지만, 그것은 초 단위로 제 성격을 찾아가고 있었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싫다’고 말하는 모습에 사와무라는 크게 당황했다. 제가 만들긴 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시스템을 시작한 것은 처음이었다. 시스템을 돌리는 것은 협회의 승인을 받고난 이후의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눈앞의 로봇은 사와무라에게도 완전히 미지의 것이었다.

 

   “그럼, 그러면… 스가.”
   “음. 좋네요! 마음에 들어요.”

 

   표정까지 풍부해진 그것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시스템에 제 이름을 새겼다. 그래봤자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이 전부였다. 아무리 봐도 사람이었다. 유능하고 열정적인 안드로이드 연구원 사와무라는 제가 만든 굉장한 로봇을 더 연구하고 싶은 욕구에 휩싸였다. 감정 수치가 높게 나왔는데, 정말로 사람과 비슷할까? 감정으로 인해 생기는 생체 변화도 사람과 같을까? 정해놓은 체력 게이지가 바닥나면 지칠까? 전류 충전기 말고 잠으로도 에너지를 회복할 수 있을까?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참. 근데 아까 나 폐기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이런 성격까지 넣은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불쑥 튀어나온 반말에 황당한 얼굴을 하자 히히 소리를 내며 입을 크게 벌려 웃는다. 지나치게 미소년으로 만든 탓에 사람도 아닌 것의 웃음에 마음이 약해졌다.

 

   “다이치, 나 버릴 생각이야?”
   “누가 이름 부르래.”
   “버릴 거냐니까? 이름까지 지어줘 놓고!”

 

   당장 폐기함에 넣어버린다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사와무라 다이치는 흔들렸다. 사람도 아닌 것의 ‘버린다’는 말에, 어쩐지 시무룩해 보이는 얼굴에, 이어지는 개구진 웃음에, 전부 흔들렸다. 물론 연구 목적으로도 데리고 있을 가치가 충분했다. 남은 것은 어떻게 협회의 눈을 속일 것인지 하는 현실적인 문제였다.

 

   “데이터 같은 건 대충 복사해서 줘버리면 되잖아.”

 

   시스템이 구동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아 스가는 이 세계의 일반 지식까지 모조리 습득했다. 제 집인 양 연구실 구석 소파에 드러누운 그는 인간보다 더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야. 복사 데이터를 버린다고 해도 조회해보면 원본인지 아닌지 정도는 바로 나오니까.”
   “어, 진짜로 나 안 버릴 건가 보네.”
   “….”
   “고마워 다이치. 기분 좋은데?”

 

   어쩔 도리 없이 한숨을 내쉰 사와무라가 맞은편의 소파에 앉았다. 이렇게까지 스스럼없는 성격으로 설계했었나, 곱씹어봐도 성격 수치에 대한 부분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스가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팔짱까지 낀 채 고민하고 있었다. 제 일인데도 남의 일을 걱정하는 듯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그럼 원본을 줘버려.”
   “원본을 주면 널 폐기하는 거랑 뭐가 달라.”
   “나한텐 복사한 데이터를 넣어주면 되지.”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쉽게…”

 

   쉽게…될 것도 같았다. 폐기 데이터는 원본 여부만 확인하고 그대로 소멸되니까, 어쩌면 속일 수 있을 지도. 사와무라는 급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2.2버전 정도의 데이터를 복사하려면 족히 세 시간은 걸린다. 다행히 아직 여덟 시였으나, 꾸물거릴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와무라는 급하게 연구실 보안을 최대치로 올렸다. 메인 컴퓨터가 부팅되는 동안 스가의 뒷머리를 헤집어 포트를 찾아냈다. 뒤통수에 시커먼 전기선을 주렁주렁 매단 모양새가 된 스가는 또 한 번 불만을 터트렸다. 기분 완전 별로야. 아무리 불평해봤자, 그 기분이라는 것도 결국 복잡한 알고리즘의 결과로 산출되는 감정의 근사치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와무라는 잔뜩 찡그린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주며 그를 달랬다. 잠시만 참아. 스가는 백여 가지의 계산식을 거쳐 안도감을 답으로 냈다.

정확히 세 시간 후에 안드로이드 2.2의 데이터 복제가 끝났다. 사와무라는 일단 스가에게서 원본 데이터를 뺐는데, 데이터가 사라져 가만히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이 생소해 소름이 돋았다. 얼마나 봤다고 그새 익숙해진 건지. 약간 불안한 마음을 다잡으며 복제한 데이터를 도로 가득 채워 넣었다. 반짝 떠진 눈을 마주하자 절로 한숨이 났다.

 

   "오랜만이네, 다이치.”
   “오 분도 안 걸렸는데.”
   “이거 빨리 빼줘. 기분 진짜 이상해.”

 

   그가 ‘기분’이라고 말하는 게 사실은 진짜 기분이 아니라고,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도 저도 이미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지적해서 어쩌겠는가. 사와무라는 원본 데이터 칩을 적당한 마네킹에 심었다. 망설임 없이 폐기 통로로 던져버렸다. 열한 시 반이었다.

 

 

*

 


   “아아. 다이치- 한 번만. 응?”
   “안 된다니까.”
   “하루 종일 앉아있는 건 건강에도 안 좋잖아. 그러니까 딱 한 번만.”

 

   하아. 한숨을 내쉰 사와무라가 의자에 달라붙어 우는 소리를 내는 스가를 떼어냈다. 그와 함께 생활한지도 벌써 일 년쯤 됐다. 사와무라는 원래부터 개인 연구실을 집처럼 사용했고, 자연스레 스가도 연구실 안에만 틀어박혀 있게 되었다. 주기적으로 데이터 검사를 하거나 수치 파악을 하기에도 용이한 장소라 사와무라는 연구실 생활에 매우 만족했다. 제가 열어주지 않으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으니 스가를 숨기기에도 좋았다. 데이터가 소멸된 것을 확인했지만 마냥 안심하고 있기엔 불안한 감이 있었으므로, 웬만하면 바깥출입을 자제할 생각이었다. 하나 있는 조수에게도 긴 휴가를 줬다. 그러니까 적어도 삼 년은 버티려고 했는데.

 

   “스가, 저번에도 말했잖아. 아직 밖에 나가는 건 너무 위험…”
   “심심해.”
   “심심한 건 알겠지만. 이 정도는 감수를…”
   “그럼 너라도 나랑 놀아주던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사와무라의 허벅지에 턱을 괸 스가는 애처로운 눈길을 보냈다. 어차피 올해 목표치는 다 끝냈으니까 몇 주, 아니 며칠쯤은 쉬어도 괜찮잖아. 안드로이드를 이렇게 방치하는 주인이 어디에 있어. 다른 집 애들은 주인 사랑 듬뿍 받으면서 하루하루 행복하게 산다던데,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공부랑 연구밖에 모르는 주인을 만나가지고, 서러워서 살 수가 없,

 

   “못하는 말이 없어.”

 

   아랫입술을 쭉 잡아당기자 더욱 우는 표정을 짓는다. 분명 제가 직접 설계하고 만든 것이 맞는데도, 사와무라는 이럴 때마다 잠시 혼란에 빠졌다. 말랑말랑한 입술이나 설탕이 묻어나올 것처럼 하얀 볼을 만질 때 특히 그랬다. 이름을 그냥 슈가로 할 걸 그랬나. 실없는 생각을 하는데 그가 제 엄지를 덥석 물었다. 아프지 않게 이빨로 잘근잘근 깨물며 말을 잇는다.

 

   “밖에 나가는 게 안 되면 안에서라도 놀자. 로봇도 심심하답니다, 주인님.”
   “야, 스가, 야, 이거는 빼고, 말해.”
   “시이러.”

 

   아예 양 손으로 손목을 붙잡고 앙 소리가 나게 물었다 떨어졌다 하는데, 어쩐지 온 몸이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그의 얼굴을 꾹 눌러 밀어내자 웬일로 순순히 물러난다. 엄지에 잔뜩 묻은 침이 정말로 인간의 것 같아서 고개를 내저었다. 요즘 들어 부쩍 쓸데없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스가가 사실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그런.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만들어지는 과정을 제 눈으로 전부 지켜봤는데도 그랬다. 그도 그럴게, 스가가 하고 있는 양을 보고 있으면 도저히 알고리즘이라든가 계산식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그는 언제나 자기가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물론 그러한 욕구도 미리 설계된 것에 불과했다. 다만 사와무라는 알면서도 모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주 가끔.

 

   “다이치이.”
   “오늘은 정말로 안 돼. 아직 다 못 봤어.”
   “그럼 내일은?”

 

   저렇게 반짝반짝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것을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금세 눈 아래 근육이 치켜 올라가며 둥근 얼굴을 만들어냈다. 내가 만들었지만 참 진짜같이 잘 만들었어. 스가가 웃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내일 뭐 하고 놀까?”
   “음, 일단 나 이만큼 다 보고…”
   “흐음.”
   “…여기까지만 보고 같이 생각하자는 얘기였어.”

 

   그제야 만족스럽게 끄덕이는 머리통을 괜히 한 번 쓰다듬었다. 천성-이라고 말하는 것도 웃기긴 하다-이 그런 건지, 스가는 자주 애정과 관심을 원했다. 초기값에 넣지 않았던 설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학습의 결과로 발현되는 것 같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런 것들도 전부 연구 대상이었다. 인간과 함께 생활한 2.2의 학습 결과 및 성격 변화 조사, 같은 이름의.

 

   “안 그래도 내일은 비우려고 했어.”
   “응? 왜?”

 

   본인은 모르나. 아니면 아직 그런 쪽의 지식은 습득이 안 됐나? 데이터가 없는 건 아닐 텐데 한 번에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부분을 수정해야…까지 생각하던 사와무라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상하게, 그를 로봇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미묘한 거부감이 몰려왔다. 보통은 반대여야 할 일인데.
   그런 게 있어. 대충 얼버무린 사와무라는 다시 눈앞의 그래프에 집중했다. 스가는 짧게 한숨을 내쉴 뿐 더 이상 조르지 않았다.

 


*

 


   외출은 절대 안 된다는 사와무라의 고집에 따라 중앙의 침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쉬는 날이라 해도 연구실 안에 달리 재밌는 놀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라서, 느지막이 일어나 하루 종일 영화를 보는 것으로 합의했다. 영화 같은 건 한 번에 몇 만 개도 넣어줄 수 있다고 하자 스가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로봇이긴 하지만 그렇게 무식하게 데이터를 먹고 싶진 않아. 당연히 식사를 하지 않는 그는 데이터를 ‘먹는다’고 표현했다. 직접 물은 적은 없었지만, 어쩌면 그도 내심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만뒀다. 스가에게는 뭔가 하고 싶다는 감정도 진짜가 아니었다.

 

   “다이치. 나 누워도 돼?”
   “웬일로 그런 걸 물어? 눕고 싶으면 누우면 되지.”

 

   첫 번째 영화는 그저 그런 액션이었고, 두 번째 영화는 유명하지만 지루한 로맨스였다. 잠깐 쉬었다가 이제 막 시작한 세 번째 영화는 제법 진한 정사신이 들어간 성인물이었다. 스가는 사와무라의 허벅지를 베고 옆으로 누웠다. 거기 누울 줄은 몰랐는데. 밀어낼까 싶었지만 딱히 그럴 이유도 없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사와무라와 스가는 심드렁한 얼굴로 화면 속에서 뒤엉키는 두 개의 인영을 바라보았다. 자극적인 소리가 연구실 안에 가득 울렸지만 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유능한 연구원 사와무라는 원체 이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렇다 치고, 너는 어떻게 저런 걸 보고도 반응이 없어?”
   “너는 왜 그렇다 쳐?”
   “난 로봇이잖아.”
   “너도 조건만 갖춰지면 성적으로 흥분할 수 있게 해뒀는데.”
   “으악. 진짜?”

 

   정말이었다. 흥미가 생긴 듯 얼굴이 밝아진 스가는 벌떡 일어나더니 잔뜩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열 번 정도 질문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평소에는 한없이 진지한 사와무라는 갑자기 지극히 학술적인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예를 들면 이렇게.”

 

   그의 옆구리를 느리게 쓰다듬자 단숨에 몸이 굳었다. 얼굴까지 빨개졌다. 손을 내려 허벅지 안쪽을 스치자 윽 소리가 났다. 덜컥 무서워진 사와무라가 재빨리 손을 뗐다.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명백하게 두려운 감정이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돌았다. 사와무라는 여전히 진득한 장면이 나오고 있는 영화를 껐다. 어느새 해가 졌는지 창밖이 어둑했다.

 

   “왜 그만해?”
   “뭐?”

 

   스가는 답지 않게 눈을 피했다. 덩달아 바짝 긴장한 사와무라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신기함을 핑계로 그의 얼굴 여기저기를 주무를 때부터, 버릇처럼 입술을 잡아당길 때부터, 포트 밑의 하얀 목덜미에 시선이 오래 머무르게 되었을 때부터, 아니면 단순히 안드로이드 2.2에 불과했던 그를 스가-라 불렀던 순간부터?

 

   어찌 되었든 사와무라는 침대에서 내려온 김에 미리 준비한 물건까지 꺼냈다. 멍하니 앉아있던 스가의 시선이 사와무라의 손에 닿았다. 뭐야? 들릴 듯 말 듯 작게 묻는 목소리가 귀여웠다. …그래, 이 정도는 인정할 수 있다. 귀여웠다. 사와무라는 작은 박스를 열어 까만색 귀걸이 한 짝을 꺼냈다. 별 무늬 없이 평범하게 동그란 것이었으나, 제 오른쪽 귓불에 꽂힌 것과 같았다. 오해하지 마. 위치 추적기니까. 민망한 기분에 선수를 쳤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기쁨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표정 하나는 진짜 풍부하다니까. 이마를 긁적인 사와무라가 말했다.

 

   “생일 축하해, 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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